남기고 싶은 글/황산과 그 문우들

6, 25 아품과 황산 김유근의 벼루

추읍산 2012. 6. 25. 07:51

제 나이 7살 때 일어난 6, 25전쟁은 우리나라 유사 이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유물들의 수난도 함께한 이때 어느 대고모 할머니는 저희 집(양평군 개군면 향리로 당시는 여주군)에 오셔서 조상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하셨겠지요? 친정을 보호하시려는 결행이었겠지만, 왜 말리지를 못했는지 답답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소산(김병주)께서 받으신 그 두꺼운 시호 교지(붉은색 종이)가 얇게 뜯겨 있음도 태우기 위함이었다는데 불 속에 넣기 직전 목격하신 어머님의 만류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산 할아버지의 절친한 벗인 추사 김정희와 이재 권돈인의 영정이 온존함을 볼 때 섭섭한 마음 금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마을에 진입한 중공군은 겨울 한파를 녹이려고 많은 고서를 불태웠다고 저의 집으로 피난 오신 외사촌 형님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1, 4 후퇴 때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 갔고 이때 고서는 방공호에(피난시절에도 어머님께서는 30리 거리의 양선영을 오가셨는데 한번은 오니 방공호에 물이 차 집안 여기저기 널어놓고 효지리로 가셨는데 하루는 향리에 오시니 어떤 낯선 피난민이 고서를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서 분실된 서책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유기로 된 제기들은 우물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물은 이웃 계전리의 김이중(金履中 1736~1793, 김조순의 부친) 할아버지 가문의 묘막 대청 한가운데 마루를 뜯어내고 그 속에 묻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30리 거리의 흥천면 효지리를 향해 걸었고 남한강을 건넜습니다. 도로에는 탱크가 굉음을 울리며 달리고 있었고 이고 진 피난행렬은 길을 메웠습니다. 우리 가족도 8명으로 대가족인데 함께 하려는 마을분과 동행하였으니 그 고단함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효지리는 저희 제2 선영으로 6대조 참의공(金龍淳 1754~1823), 5대조 황산 김유근(金逌根 1785~1840으로 생부는 金祖淳) 묘역이 자리한 곳이고(지금은 개군면 향리로 묘셨습니다.) 묘막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용인이씨 할머니와 두 분 숙부와 막내 고모님께서 머므르시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저희 식솔도 벅찼는데 여기에 마을 분들이 쫓아온 것입니다. 눈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면 헛간이고 어디고 자리 잡으려고 하였고 남아있는 분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웃 마을인 귀백리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1951년 그곳 흥천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수업시간에도 싸이랜 소리 울리면 소개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1953년 아직 휴전 전인데 저희는 원래의 선영인 개군면 향리로 복귀하였습니다. 계전리 묘막은 전쟁의 와중에서 불탔습니다. 이때 영안 부원군(김조순)댁 유물과 그곳 대청마루 속에 묻어둔 저희 가보도 함께 불탔습니다. 녹고 일그러진 패물, 황산 할아버지의 벼루도 불에 타 조각났고 희게 발했습니다. 멍하니 바라볼 뿐으로 전흔은 여기에도 있었습니다. 용트림한 황산 할아버지의 벼루에는 한자로 된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님께서 목놓아 우셨습니다. 한때 향리 저희 집으로 피난 오셨던 외가 식솔들은 군포로 피난 가셨는데 중공군 집결지로 오인(?)한 미군전폭기의 공습으로 외조모, 외숙모, 외사촌 형제자매와 향리에 오셨을때 대동한 마을 이승제누님이 모두 방공호에서 부둥켜안고 운명한 것입니다. 다행히 외삼촌과 큰형님은 마을 앞 논으로 뛰여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삶의 현실은 어려웠고 어머님의 삮바느질 재봉틀 소리는 방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농토는 할아버지때 많이 없어졌고 그나마 농지분배에 의해 일부 위토를 빼놓고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어머님의 조상공경은 지극하였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속에서도 황산 할아버지의 불탄 벼루는 조각조각으로 남아 1970년 초까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나마 남은 유물들은 하나둘씩 분실됐고 황산 할아버지의 인장이 가득 찍혀진 인장첩(얇은 종이로 된 책)도 어찌 된 일인지 보이지를 않아 보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느끼게 합니다.

 

충절과 문학을 꽃피운 문풍속에서 세도정치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중심에 서기도 했던 저희 가문! 저 한자로 된 글 속에서 조상님의 숨결이 묻어 있을 것이고 그 속에는 무엇이 진실인지 가리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개하고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연구하는 길을 택하기로 가족 간에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남아있는 모든 유물은 2006년 건설되고 있는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에 기증했고 이제는 도록도 나왔고 기획전시회도 있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배우면서 글을 쓴지 몇 년이 흘렀고 검색과 지난겨울의 <향곡 안동김씨 문정공파 전시회> 도록에 실린 그 잃어버린 벼루에 새길 글을 보면서 필자가 직접 본 황산 할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벼루와 그 안에 새겨진 글자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아래 사진과 글 출처: 제3회 양평의 명가전 향곡 안동김씨 문정공파 도록 pp100~101[황산과 추사, 그리고 이재의 교우와 예술: 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집필]에서 발췌

김정희<김유근 벼루를 위한 글> 11.5×4.5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황산은 일찍 죽은 친구 담화擔華 심자순沈子純이 남긴 시 2구를 마져 채워 4구의 절구絶句를 지어 그 친구가 준 벼루에 새기려고 하였다. 담화는 심의직沈宜稷(1774~1807)이란 요절한 문장가이다. 황산은 자신이 쓴 시와 글을 추사에게 부탁하여 써 달라고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라 탄식이 절로 나는데    秋人發歎息

흰 이슬은 난초 언덕에 내리네   白露生蘭皐

강 달은 그제와 똑같겄마는       江月宛如昨

그대 그리워 마음만 괴롭네       思君心獨勞

 

상구上句는 옛 친구 담화 심자순의 시이다. 예전에 어울리던 일을 생각하고 하구下句를 채워 절구 한 수를 짓고 그가 준 벼루 뒤에 새겨 넣는다. 황산거사

上句則故友澹華沈子純詩也,感念舊遊, 足成一絶, 銘于所贈硏背, 黃山居士

 

당시 사람들의 깊은 우정이 여운을 남기는 사연이다. 이 내용을 추사가 글씨로 쓰되 여러 서체로 글씨를 연습한 종이가 지금껏 남아있다. 아쉽게도 벼루 실물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