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선현들의 발자취

할머니를 키우신 이정숙 여사

추읍산 2012. 12. 11. 09:28

 

 

  • 생몰년 : 1858-1935
  • 시대 : 조선, 항일기
  • 분야 : 교육/사상 > 교육자 > 여류 교육가
이정숙(李貞淑)에 대하여

이정숙(李貞淑)
1858(철종 9)∼1935. 여류교육가.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양주출생. 해석(海石)의 둘째딸이다.
16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趙大妃)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와 혼인하였다. 조영하는 1863년 과거에 급제한 뒤 호조판서·훈련대장·병조판서·도통사 등을 지내고 예조판서로 있던 중, 1884년 갑신정변 때 피살되었다.
1875년에는 정부인(貞夫人)에서 정2품 이상의 관직부인에게 주어지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호칭을 받았다.
1906년 1월 엄황귀비(嚴皇貴妃)가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여 총재를 맡았을 때 회장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6월 엄황귀비의 후원을 받아 종로구 수송동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지금의 淑明女子中高等學校)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여 여성의 신교육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 양가자녀를 기숙사에 입학시켜 학비와 기숙사비 등을 받지 않고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이후에는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등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여 졸업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 매년 일본의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奈良女子高等師範學校) 등에 진학을 시켰다.
1924년에 학무국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27년 동아일보사로부터 민간교육공로자로 선정되어 은배(銀杯)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여자교육보급진작의 공로로 다시 학무국으로부터 은배를 받았다.
1935년 임종 직전에 퇴직금 전액을 학교법인 숙명학원(淑明學院)에 장학기금으로 희사하였다. 현재도 제자 및 졸업생들의 협찬으로 이정숙장학회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

 

 

淑明七十年史(淑明女子高等學校, 1976). 〈鄭忠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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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아랫글에서 이정숙여사를 생각하였다.

 

 

 

발췌한 곳: 향곡 안동김씨 문정공파 기증유물 기획전시회에 붙여

 

 

할아버지 김익진[金翼鎭 1884 ~1943 자: 文述 |호: 香山居士]

 

증조(김정규)와 증정부인 남양홍씨 사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한말과 일본 강점기를 거쳐오시고 영능참봉의 임무를 수행하시면서 여주군 개군면 하자포리(현 양평군 개군면 소재지)에서 교육사업에 매진하셨는데  망국의 설움을 민족교육으로 승화하셨습니다. 여주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고 이는 어머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일본 강점기인 1927년 介軍面(河紫浦) 私設學術講習會第四會卒業紀念으로 앞줄 가운데가 할아버지(金

 

翼鎭으로 그때는 44세)로 추정된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개군면 최초의 체계적인 민족 교육이다.

 

 

『 -- 또한, 야학회는 아니지만, 김익진(金翼鎭) 등은 1922년 7월에 교원 2명과 학생 35명으로 하자포학술강습회(河紫浦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  출처: 아래 http://history.yj21.net/Search/SearchForm.asp?SearchWord=%EA%B9%80%EC%9D%B5%EC%A7%84&x=16&y=8

 

필자는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주위에선 저희 집을 참봉댁으로 불렀습니다. 일본 강점기 때도 참봉은 존속? 했었는가 봅니다. 할머니(조동희 1886~1915)는 풍양조씨 조창하(趙昌夏 1847 - 1897)의 따님으로 조실부모하여 중모인 이정숙[李貞淑 1858~1935,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엄비의 후원 아래 숙명 여학교를 설립하시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숙명여고에는 이정숙 기념관이 있어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부군은 조영하(趙寧夏)] 사의 집에서 자라시고 교육을 받으셨으며 할아버지의 배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필자의 아버지 네 살 때인 1915년 삼십 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서울 박동의 이정숙 여사댁을 1933년경 찾은 어머님은 인력거를 타셨다고 합니다. 대동한 아기이셨던 김임동 큰 누님(1932년 생)을 안으시며 동희(할머니)의 며느리고 손녀냐고 감격해 울컥하셨다고 합니다. 저희는 또 한 분의 할머니인 용인이씨(1898~1951)를 모시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김익진)가 실린 안동김씨 문정공파 족보

잘못된 족보로 吏參 康夏를 昌夏로 바로 잡는다. 

 

개군면은 양평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묘소는 개군면 향리로 통일하여 삼위합장으로 모셨다. 위 사진에서 보면 할머니 친정쪽으로 父 康夏(昌夏로 잘못된 기록이다), 祖 秉澤, 曾祖 敏永으로 되어있다. 이정숙 여사의 부군인 조영하(趙寧夏, 1845~1884)는 조창하의 둘째 형님으로 조병기(1821년∼1858)에게 입후하였다. 또한 5대조 이신 황산(김유근 1785-1840)의 계통상 외손자 이시기도 하다.

 

 

 

출처: http://www.kostma.net/FamilyTree/PersonView.aspx?personid=pd050169&person_uci

 

趙秉錫

(조강하의 부친으로 맨위 김익진 족보사진에서는 趙秉澤으로 기록되어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은 趙章永의 아들로 일반적으로 알려졌으나 生父는 趙敏永임을 유념하기 바란다.

 

 

 

족보에 기록된 황산 세 따님의 출가처

 

 

 

 족보에 등재된 황산 할아버지의 세 분 따님께서 출가한 곳이다. 여기에서 보면 셋째 따님은 조인영의 아들 조병기하고 혼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병기에게 입후한 조영하의 생부가 조병석임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위 필자의 할아버지(김익진) 족보에 등재된 趙秉澤은 옮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인듯 하다.

 

더 볼 곳: 혜인 조영하(惠人 趙寧夏, 1845~1884)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