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선현들의 발자취

나이를 초월한 사랑

추읍산 2016. 4. 17. 13:12

魂逐行人去   나의 혼은 그대를 쫒아가고

 

身空獨依門   빈 몸만 문에 기대어 섰오

- 신임 평안감사.

 

 

 

驢遲疑我重   나귀걸음 느려 내 몸이 무거운가 했더니

添載一人魂   남의 혼 하나를 함께 싣고 있었구려

- 김부용(시명 운초).

 

김부용이 평양에서 나귀를 타고 그리운 임(김이양) 계신 서울로 향할때 모습이란다. 운초는 예술과 시문에 빛을 발휘해 성도의 설교서(薛校書)란 칭호를 받는다.  금수강산을 유람한 후 문을 굳게 닫고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하늘의 가리킴인가? 그때  김이양(金履陽 1755∼1845 호가 淵泉)은 은퇴 후 봉조하(奉朝賀) 때로 추리하는데 유람차 평양에 들린 일이 있었다(참고 : 김이양은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없다. 그분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분이시다.).  이때가 김이양(金履陽 1755∼1845 호가 淵泉)은 77세 김부용은 19세였다.

 

무엇이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을까?

 

 "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                                         

세상에는 30객 노인이 있는가 하면 80객 청년도 있는 법입니다. "  

 

芙蓉堂聽雨(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듣다)


 明珠一千斛(명주일천곡) 遞量琉璃盤(체량유리반)
 箇箇團圓樣(개개단원양) 水仙九轉丹(수선구전단)
 

   옥구슬 일천 말을 유리 쟁반에 쏟는구나.
   알알이 동글동글 신선의 환약(丸藥)이런가.  

 

꾸밈없고 아름답고 감성깊은 저 여인, 주책이라도 좋았을것이다. 꿈같은 흐름 그러나 김이양서울로 갔고 기적에서 빠진 부용은 그리운 임과 재회하는데  촉매제가 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 대감(김이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 살던 곳이 녹천당(祿泉堂)이다.

 

18442월 김이양은 회방(回榜: 과거 급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조상들의 성묘를 위해 고향인 천안 광덕사(廣德寺) 경내에 있는 자신의 장원(莊園)에 부용을 동반하고 순행한다. 김이양은 이듬해인 184510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 때 김 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十五年來今日流 (십오년래금일유)
 峨洋一斷復誰栽 (아양일단부수재)
 

   십오 년 정든 님 오늘도 눈물 짓네,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부용은 인연을 회상하면서 외부와 교류를 끊고, 오로지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운초시집'에 150 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운초는 사후 부군인 천안 광덕산 김이양 묘역 근처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단다. 심금을 울리는 사랑! 운초의 묘역에선 해마다 추모제가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고 지금은 문화재로 신청까지 하였다는 소식이다. 대비되는 두 분! 이 또한 운초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김이양[1755(영조 31)∼1845(헌종 11)]은 최근 올린 명온공주[1810년(순조 10)∼1832년(순조 32)]의 시할아버지임을 말씀드린다. 무려 손부인 명온공주보다 13년을 더 살으셨다.

 

전해오는 이야기라 커지고 부풀려져 일부는 잘못 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분의 사랑이 기초하였음은 분명하다. 우러러보고 싶은 운초(김부용)의 연천(김이양) 사랑이 솔바람 타고 광덕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그곳 계곡을 함께 걷는 연천과 운초를 그려본다. 두 분의 사랑이야기가 방방곡곡 메아리치고 있다. 한 때만이 아닌 언제까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