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문화유산

주유천하 4인 인근 답사

추읍산 2013. 1. 9. 12:46

어제 오후 주유천하 인솔자 김천일, 천영식, 임경일과 함께 인근인 남양주시 불암사, 덕흥대원군 묘소, 의정부시 장암동의 반남 박씨 서계 종가와 가문 묘역을 탐방하였다. 휴대폰으로 찍은 것으로 비교적 잘 나와 현대화된 오늘에 살고 있음이 여간 고맙지가 않다. 오후 2시경 먼저 찾은 곳은 불암산의 불암사이다.

 

남양주시 쪽에서 바라보는 불암산

  

불암산으로 그 아래 불암사가 있다.

 

불암사 아래로 이곳에 주차하였다.

 

 

 

불암사는 824년(신라 헌덕왕 6) 지중이 창건했다고 추정하며 도선(道詵 827~898)과 자초(自超 1327~1405) 중창하고 조선조 세조(재위 1455~1468) 때 동쪽 사찰이라 하여 東佛巖으로 불렸고 성종(재위 1469~1494) 때 중창한 것을 1776년(영조 52) 폐사상태에 이른 것을 명관(明瓘)이 크게 중수 이어 1782년(정조6)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중수 제월루를 세웠다. 1844년(헌종 10) 다시 중수하고 춘봉(春峰)이 향로전을 재건하고 1855년 혜월(慧月)과 보성 등이 중수하였다. 1910년에는 독성각, 산신각, 동축당을 세우고 1955년에는 만허가 칠성각을 세우다. 현존 건물로는 대웅전, 제월루, 관음전, 산신각, 독성각, 동축당, 수성전 등이 있다.

 

한호의 글씨임을 알리는 大雄殿 현판

-----------------------------------

 

 

불암사를 나와 의정부 장암동 서계 유적지로 가는 중 도변에 德興大院君[1530(중종 25)~ 1559 명종 14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창빈 안씨이다.] 묘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따라갔다. 흰 눈에 둘러싸인 묘역

 

묘비

 

-----------------------------------

서계 박세당 유적지

 

주유천하 임경일의 안내를 따라 서계 박세당과 그 종택을 찾았다.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에 있었고 오후 늦은 시간으로 종손 내외분과는 지인이라 미리 전화를 드렸단다.

 

서계 초상화로 숙종 연간(1690년경) 조세걸(曺世杰)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단다.

 

종부께서는 두 권의 책자를 주셨다. 위 그림은 서계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서계 박세당을 안내한 첩 표지에 실려있다. 또 한 권은 서계 박세당 선생과 석천동 경영 학술심포지엄이다.

 

서계 종택으로 당대의 건물은 아니고 5세손 朴宗吉이 1,800연대 중반에 개축한 것이다. 당호는 정매당(征邁堂). 이곳에서 종부로부터 차를 대접받았다. 종부께서는 출타 중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셨고 문중 일과 각 문중 종손 종부 모임을 통한 선양에 열심히 하시다. 퍽 인상 깊었는데 모습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눈에 덮인 서계 묘역

 

서계는 어떤 분 이실까?  

아랫글 발췌한 곳: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8b3533b 

박세당 [朴世堂]

태어난 때 1629(인조 7)
죽은 때 1703(숙종 29).
소속 국가 한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조선
직업 문신·학자
1629(인조 7)~ 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개요

경학에서부터 경세론에 이르기까지 반주자학적인 유학사상을 전개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체계화하는 데기여했다.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할어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미 밑에서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겸경연시강관, 함경북도평마평사를 두루 지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오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현감을 지냈다.

만년

그는 소론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시 정치상의 주요사안이었던 대청(對淸) 문제에서 온건론자로 간주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로부터 '오사'(五邪) 가운데 하나라고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대학자·대정치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인으로서 그 뜻을 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석천동에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강학과 연구에 몰두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자, 사실상 야인이었던 그에게 호조참판·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지중추부사 등 요직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1702년(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비문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노론계를 자극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金鎭玉)·정호(鄭澔) 등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여 명의상소로 삭탈관직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반주자학적 경학사상

박세당은 당시 통치이념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창적인 학문세계를전개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만년에 14년에 걸쳐 저술한 〈사서사변록 四書思辨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대학〉·〈중용〉·〈논어〉·〈맹자〉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반기를 들고, 주자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자기 나름의 주해를 붙인 것이다.

반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인물일체관'(人物一體觀)을 기초로 '천인상감'(天人相感)을 믿었던 데 반하여, 그는 '물아이분관'(物我二分觀)을 기초로 의인화된 하늘과의 상감(相感)을 부인했다. 인간과 분별되고 오직 인간의 역량으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물리학적인 자연관'을 공고히 했다. ② 본성(本性=天理)의 선험적 본구(本具=天命)를 믿음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자와는 달리 본성의 본구를 부인하여 윤리 도덕의 가변성·선택성에 대한 각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③주자의 현실재론적(現實在論的) 시각을 배격하고 '주기적(主氣的) 경험주의' 철학을 견지했다. ④ 도심(道心) 못지 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다. 이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서주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반주자학적 경전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당시 노론계열로부터 "위로는 주자를 모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이어져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연원적인 역할을 했다.

노장사상

그의 반주자학적인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노장이 말한 '수신'과 '치인'이 유학에서의 의미와 같은것으로 보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언설의 간결함과 의미의 심오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끌어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노장의 용어를 유학의 용어로 대치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사상의 내용까지 유학의 의미로 해석했다. 예컨대 노자의 '도'를 '무'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또 '이'(理) 즉 '태극'(太極)으로 설명하는 해석이라든지, '자연'이 '본성(천성)대로 하되 지나침이 없는 의미'라는 〈중용〉식의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문(文)보다 질(質)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에 호감을 갖고 그것을 유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에 집약되어 있는데, 〈도덕경〉의 근본정신이 치자의 지배욕구 포기에 있다고 보고, '무위' 또는 장자의 '무위자연'이란 치자가 사사로운 지배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무욕의 정치, 곧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개혁사상

이러한 실제성 추구의 경학사상은 경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일종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정치·경제·국방의 문제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무위도식하면서 당쟁에만 매달려 있는 지배세력인 양반들에게 일반 백성이 수탈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왕이나 대신들이 먼저 성실하고 근검해야 백성들이 살기 좋다는 전제하에서 횡렴(橫斂)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제의 일원화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항시 '허문'(虛文)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효를 거두는 '무실'(務實)의 정책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현실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농서 편찬이었다. 그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새로운 농서의 편찬이 요구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한전농업(旱田農業) 중심의 농서 〈색경 穡經〉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과 여타의 농서를 토대로 저술한 것인데,구체적인 작물의 재배기술 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농학을 보는 안목에 관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농학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 위주가 되는 농업·농학을 수렴하고자 했다.

한편 대외정책에서도 당시 주자학자들이 주장하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 속의 예로서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과, 고려말 원·명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한 것을 들어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당시 숭명배청론자들이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란 왕조가 바뀌면 으레 변하게 마련이므로 청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학통의 계승과 저서

박세당은 노론에 사문난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남인성·남구만·최석정(崔錫鼎) 등 소론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의 혁신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제자들로는 이익명·이인엽·이탄·이덕수(李德壽)·조태억(趙泰億) 등이 있으며, 소론의 거두인 박태보(朴泰輔)가 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사변록〉·〈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색경〉 등이 전한다.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옆면

 

서계 묘소로 아래 경사가 심해 앞에서 묘역 전체를 볼 수 있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근래에 세운듯한 비각으로 묘역 아래이다.

 

 

 

박태보[1654(효종 5)∼1689(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나주).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묘소. 서계의 아들로 성품이 깨끗하고 원칙을 지킨 분이시다. 필자가 어린 시절 부친께서 들려주신 기억을 되살리면 제례 때의 불에 달구어진 향로를 제자리로 놓는데 잡은 두 손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도 놓지 않고 봉향할 자리로 받들었다고 한다.

 

아랫글은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였다.

 

박태보(朴泰輔, 1654년 ~ 1689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선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남인의 모함을 받아 선천에 귀양갔다가 복직되었다.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많았으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이조좌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 지방을 시찰할 때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 서인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숙종은 후회를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 다시 영의정으로 가증되고 시호가 내려진다.

 

 

 

묘역을 둘러보고 하산하는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마침 종손도 집에 와 있어 인사를 나누고 근처 식당에서 묵밥으로 저녁을 들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향하였다. 휴대폰 사진인데 비교적 화질이 좋은 편이다. 훼파람 소리나 확인하니 11일 광평대군 묘역을 탐방하자는 김천일 씨의 메시지다. 글 올리는 이 시간 사방은 적막강산이다.

'남기고 싶은 글 >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계동 정자와 백사실 계곡  (0) 2013.01.31
광평대군과 그 문중 묘역 답사  (0) 2013.01.11
서원리 소나무  (0) 2012.12.05
선병국 가옥  (0) 2012.12.05
법주사  (0) 201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