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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대군과 그 문중 묘역 답사

추읍산 2013. 1. 11. 19:14

주유천하에서는 겨울철 번개답사로 광평대군 묘역을 답사하니 오늘 오전 11시 서울 인근인 수서역 1번 출구 앞으로 나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날씨도 좋아 추위는 많이 풀렸고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더없이 좋았다. 광평대군 묘역답사라고 하였는데 찾아보니 정문에 정릉봉양회 그리고 영능봉양회라고 되어있어 아마도 광평대군을 비롯한 문중 묘역 관리와 함께 두 능의 봉양도 겸하고 있는가보다. 들어서니 놀라운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광평대군 묘역답사라고 제목을 정하였을까? 아마도 그곳 대표되는 분이라서 그렇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정릉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을 가리키며 성북구 정릉에 있다. 영능은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의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께서 잠들어 계신 곳을 가리킨다.

 

 

아래에서 바라본 광평대군 묘역

 

광평대군(廣平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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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세종 7)∼1444(세종 26).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아버지는 세종이다.1432년(세종 14)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에 힘써 《효경》·《소학》·사서삼경·《좌전 左傳》 등에 능통하였고, 《문선 文選》과 이백(李白)·두보(杜甫)·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 등의 문집을 읽고 국어·음률·산수에도 밝았다.1437년 방번(芳蕃)에게 입양되어 후사(後嗣)가 되었다.1438년에 새로이 개척한 북변(北邊)의 국방강화 및 풍속교화를 위하여 서울에 경재소(京在所)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그는 종성(鐘城)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용자(容姿)가 풍미하며 총명, 효제하고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광평대군 묘역 위에서 바라보았다.

 

무안대군 묘소로 아래이다.

 

무안대군 [撫安大君]

 

1381(우왕 7)~ 1398(태조 7).

조선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이름은 이방번(李旁蕃). 어머니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이고, 부인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1392년(태조 1) 8월 무안군에 책봉되었다. 태조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배극렴(裴克廉) 등 대신들의 반대로 세자위가 동모제(同母弟)인 방석(芳碩)에게 돌아갔다. 그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芳遠)이 방석의 세자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장악에 반대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즉위 후 휼전(恤典)이 추거(追擧)되었고, 1437년(세종 19)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이 후사(後嗣)가 되었다. 숙종 때 대군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혜(章惠)이다.

 

무안대군 묘비

 

일대의 펼쳐진 문중 묘역 중 한 곳으로 수없이 조성되어 국내 최대일 것 같은 느낌이다.

 

하산하여 또 한곳 고택을 찾았는데 그곳 정원 한쪽에 서 있는 이유의 신도비이다. 이곳에도 필자의 조상님 흔적이 보였는데 이유의 부친 이중휘(李重輝)는 청음할아버지의 손서로 12대조 동지공(휘 광찬)의 셋째 따님의 부군이다.

 

안동김씨 문정파 세보에서

15세 尙憲 - 光燦 - (壽增-壽興-壽恒-壽徵-壽應-壽稱-壽能)

 

16세 光燦의 셋째 따님의 기록

女 李重輝 全州人郡守贈領相 父掌令贈贊成逈子濡領相漉川湛郡守 女權尙夏安東人逸左相遂菴父執義贈領相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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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李濡)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현종(顯宗) 9년
과거시험연도 : 1668 무신
시험명 : 별시(別試)
등위 : 병과8(丙科8)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유(李濡)
자 : 자우(子雨)
호 : 록천(鹿川)
본관(本貫) : 전주(全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혜정(惠定)
전력(前歷) : 유학(幼學)
관직(官職) : 영의정(領議政)

[가족사항]

손(孫) : 이존중(李存中)
손(孫) : 이최중(李最中)
부(父) : 이중휘(李重輝)
조부(祖父) : 이형(李逈)
증조부(曾祖父) : 이후재(李厚載)
외조부(外祖父) : 김광찬(金光燦)
처부(妻父) : 어진익(魚震翼)

 

 

아랫 글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8a0174a 

 

이유(李濡)

 

1645(인조 23)~ 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아버지는 금산군수 중휘(重輝)이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의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지평·수찬·교리를 거쳐 승지·경상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89년 왕자정호(王子定號)가 너무 이르다는 송시열(宋時烈)의 상소에 대해 대사간으로서 아무런 성토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었다. 1696년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압록강 하류의 여러 섬에 사는 백성들에게 섬의 개간을 허용해줄 것과 건주로부터 만포 사이에 둔전을 설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그뒤 호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뒤 1702년 병조판서로 호포(戶布)보다는 구포(口布)가 양역을 변통하는 데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조판서를 거쳐 1704년 우의정에 올라 양역 업무를 주관하면서 민진후(閔鎭厚)·유집일(兪集一) 등과 함께 〈오군문개군제급양남수군변통절목 五軍門改軍制及兩南水軍變通節目〉·〈교생낙강자징포절목 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만들었다. 1710년 판부사로 북한산성의 수축을 주관했고, 경리청을 창설하여 성역(城役)의 경비를 조달했다. 1712년 영의정이 되었다. 양역변통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서 호포는 인족징(隣族徵) 등의 폐단을 야기한다며 반대했고, 교생고강(校生考講) 등을 통해 낙강자에게 징포하는 등 피역자들을 찾아내어 군역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조선초 이래의 한정수괄책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종 묘당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혜정(惠定)이다.

 

 11대조 문곡 할아버지께서 전액(篆額)을 쓰셨다.

 

전액은 문곡(金壽恒) 할아버지께서 쓰셨다고 한다.

 

신도비 주인공 이유의 아버지 이중휘(李重輝)는 필자의 13대조 청음(김상헌 1570~1652 시호 文正)의 손서(孫壻)로 12대조 동지공(광찬 1597~1668 | 호: 雲水居士)의 사위이고 문곡 할아버지 에게는 매부가 되신다. 따라서 주인공 이유는 문곡 김수항 에게는 생질녀의 남편이다.

 

탐방을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하는 주유천하 답사 팀원들

 

설영숙 여사로 영안 부원군 댁이 외가라서 더 친근감이 간다.

 

이어 2013년 주유천하 일정표를 지참 다음을 기약하고 귀가 중 인솔자이신 김천일 씨의 제의로 황학동 민속품 가계를 들렸고 견문을 넓혀 오늘 일정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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