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스크랩] 영의정 김수항, 김창집에 관한 안김족보 세적 기록

추읍산 2013. 1. 25. 13:29

영의정 문곡 김수항, 영의정 몽와 김창집 선생에 대하여 안산김씨 족보에 기록된 세적 입니다.

 

이 자료는 영의정을 지내신 문곡 김수항 선생의 12대 후손이신 백촌거사님의 요청에 의해 제공하는 자료입니다.

 

안동김씨((新안동) 문곡 선생님과 참봉공(촌로공)은 산(山)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分山) 뒤를 이어 그 두분의 자제는 친형제 이상의 정을 나눈 정말 대단한 인연으로 맺어져 이후 두문중을 빛내주었습니다.

 

문곡 김수항 선생의 분산시(分山詩)와 참봉공시를 올려드리고 

 

추가하여 김수항 선생의 자제분인 영의정 김창집과 형제분이신

창협, 창흡 선생의 촌로공(참봉공) 만장 내용과 제문 자료 등을

올려 드립니다.

 

영의정 김창집 선생의 촌로공 묘갈명(묘비명)은 기존의 자료가 등재되어 있어 생략합니다.

 

참고로 영의정을 지내신 김창집 선생은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김수항은 형 수흥과 함께 형제 영의정, 아들과 함께 부자 영의정 으로 가문의 중심이 된 인물이다.

 

김창집의 증손 김이소(金履素)가 정조때 좌의정에 올랐고, 철종때 안동김씨 60년 세도의 기틀을 닦은 순조임금의 국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김조순(金祖淳)은, 김창집의 현손(5세, 4대손, 증손자에 아들, 손자에 손자)이니, 헌종이후 조정을 주름잡은 안동김씨 세도가들은 모두 김수항의 후손들이다.

 

문곡 김수항 가계도

 

(5대조부)평양서윤 시강원문학 김번

(고조부) 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

(증조부) 삼가현감 증의정부영의정 김대효

(친증조부)돈녕부도정 증영의정 김극효

 

(조부) 좌의정 증영의정 청음 김상헌  生父극효

(친조부) 장단부사 증좌찬성 김상관

(부) 운수거사, 동지중추부사 증의정부영의정 김광찬

       生父 상관 (장단부사,증좌찬성)

       (형님) 공조참판 곡운 김수증

       (형님) 의정부영의정 퇴우당 김수흥

 

17세 수증(곡운,공조참판), 수흥(퇴우당,영의정)

       [당숙 광혁(장단부사 상관의맏아들)에게 입후],

       수항(문곡,영의정)

18세 창집(몽와,영의정), 창협(농암,예조판서),

       창흡(삼연,사헌부집의, 증이조판서)

19세 (죽취,우부승지), 숭겸(관복암,증사복시첨정),

       양겸(증이조판서)

20세 성행(취백헌,증영의정), 달행(증좌찬성),

       탄행(남원부사,증영의정), 원행(증이조판서)[生父제겸],

       범행(가평군수,증좌찬성)

 

21세 이장(장락원정), 이기(광주목사), 이중(서흥부사),

       이경(증좌찬성), 이소(좌의정), 이직(증이조판서),

       이현(풍기군수)

22세 이순(증영의정), 용순(공조참의),

       조순(풍고,영안부원군,홍문관예문관대제학,증영의정),

       명순(이조참판), 지순(충주목사), 인순(거창부사),

       달순(일청,우의정)

23세 문근(영은부원군,증영의정), 유근(황산,판돈녕부사),

       원근(증이조판서), 좌근(하옥,영의정,영돈녕부사),

       홍근(좌의정), 흥근(영의정), 조근(영흥부원군,증영의정),

       수근(한성판윤)

24세 병필(예조판서), 병주(이조판서), 병지(공조판서)

       병기(사영,병조판서,판돈녕부사), 병시(영의정),

       병덕(좌의정), 병학(영의정), 병국(영의정)

 

文谷 (諱 壽恒) 先生 家系圖

 

아래 가계도를 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묘소 사진은 본문 하단에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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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문곡 김수항 선생의 유증 분산시

 

金文谷 諱 壽恒 留贈 參奉公分山詩  

김문곡 휘 수항 유증 참봉공분산시  

 

文谷集卷之三

<白雲山。留贈金君聲大> 백운산。유증김군성대

瓊巖琪樹玉爲溪。경암기수옥위계

再入仙源路不迷。재입선원로불미

茅洞卜隣從此始。모동복린종차시

與君分占水東西。여군분점수동서

 

한시를 잘 몰라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원문에 가깝게 의역 해보면

 

아름다운 빛깔의 바위와 나무 옥과 같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다시 와 보아도 신선의 길처럼 끊임 없고 무엇에도 홀리지 않네

연곡에 거처를 정하게 된 것은 이웃이 좋은 것에서 비롯되었고

그대를 위해 산을 동서 나누니 자손만대 의리를 지켜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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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留贈(유증) : 머무를유, 줄증, 남겨준다는 분산(分山)의 뜻임, 기증, 드림

    遺贈(유증) : 유언으로 자기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무상으로 타인에게 주는 행위

 * 茅洞(모동) : 포천시 이동면 연곡(鷰谷)의 옛 지명 (제비연 : 燕 = 鷰)

                    (* 現在 연곡4리 燕谷4里 = 제비울)

                    초가(草家)나 띠집(짚 이나 풀로 지붕을 얹은 집)은 아님

 * 水東西(수동서) : 개울의 동서 = 산을 나눔(分山)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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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공시(參奉公詩) 편의상 사진 파일로 공개합니다.

 

참봉공시 (참봉공 증 대사헌 김성대)

 

돌 위 장송 소나무 그늘에

극한 사람 달을 안고 옷깊이 얼음에 비쳤도다.

어찌타 구로는 연사에 놀았고

여러 현인 죽음에 죽림을 부러 안하노라

다행이 시옹이 있어 의서가 많구나

장차 아름다운 경치 처음에 들어오길 위하도다.

읇으고 노래함이 족하지 않아 차탄이 오래구려

서산生 침침함을 깨닫지 않았도다.

 

집안어르신이 족보에 올린 해석인데 이해가 부족하여 아래와 같은 해석을

올립니다.

 

石上長松松下陰 석상장송송하음

幽人抱月照氷襟 유인포월조빙금

何湏九老遊蓮社 하회구로유연사

不羨羣賢會竹林 불선군현회죽림

幸有詩翁多意緖 행유시옹다의서

爲將佳景入淸위장가경입청음

詠歌未足嗟嘆久 영가미족차탄구

不覺西山路沉沉 불각서산로침침

 

백촌거사님이 해석해 주신 내용과 설명입니다.

 

바위 위 긴 소나무 솔 그림자 드리웠고
은자가 안은 달빛 마음 맑게 비추네.

어찌 굳이 아홉 노인 모임에서 놀겠는가.
어진 이들 대숲에서 모인 일 안 부럽네.

다행히 시인 있어 정서가 많아져서
앞으로 좋은 경치 맑은 노래 들게 하리.

읊는 노래 부족해도 찬양은 이어지나
서산 길 침침함에 깨닫지 못하리라. 
                      

그냥 제 느낌대로 읊어 보았습니다.

문곡의 분산시를 받고 백운산 연곡 골짜기로 벗이 되어 온다는 그 약속에 훌륭한 시인을 만나게 되는 내면적인 기쁨, 그러나 나이가 많고 깊은 산골에서 그리 배운 것이 없어 칭찬해주고 찬양하는 소리들을 깊이 깨우치지 못한다는 겸사가 담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의 연대도 문곡이 시를 쓰신 연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문곡께서 사화로 인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노촌공께서 문곡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도와 주셨겠지요. 여기에는 그런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 1 2 행>- 두련: 소나무 그늘 덮인 깊은 골짝에서 유인이 되어 살아가는 분위기 바위. 소나무. 솔그늘. 훤한 달빛--- 세속과 떨어진 선원 같은 마을.
유인은 노촌공 자신.
< 3.4 행>- 함련: 깊은 골짜기에서 혼자만 풍류를 즐긴 자신의 자랑과 찬탄
중앙에서의 시 모임이나 시단 같은 것이 없는 순수함. 죽림칠현. 백련사 단체 같은 모임과 는 전혀 먼 자신이라는 것.
< 5 6행> 경련: 문곡이 이곳으로 오신다는 약속에 기쁨을 가짐. 좋은 시옹을 만나 시의 정서도 풍부해지고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흐뭇함. 시옹- 문곡
< 7.8행> 미련: 점차로 늙어져 가는 것에서 오는 자신의 우수감. 서산길- 노촌공께서 점차로 늙어가고 있다는 아쉬움. 그렇게 큰 상징적이고 비유된 서정은 담겨 있지 않다고 봅니다. 
  

전 국회의원 김용채 종인 작품 (문곡선생 분산시 와 참봉공시)

 

족보에 등재된 촌로공사 휘 성대

참봉공시

안산김씨 족보 세적

대사헌 호 촌로공 관련 세적 목록

 안동김씨 공조참판 곡운 김수증(영의정 김수흥 兄, 영의정 김수항 큰 兄)

 만장 내용

 

詞場吐氣老崢嶸 一命衣冠曠世榮  사장토기로쟁영  일명의관광세영
此去定無餘憾在 滿庭蘭玉摠成名  차거정무여감재  만정란옥총성명

林泉邂逅卄年心 峽裡幽居閑華岑   림천해후입년 심협리유거한화잠
惆悵白雲山澗下 舊遊如夢更難尋   추창백운산간하 구유여몽갱난심
老淚哀歌遠送君 春城病臥獨消魂  노루애가원송군  춘성병와독소혼
忍看他日掃山路 依舊煙霞鷰谷村  인간타일소산로  의구연하연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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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생략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선생이 村老 聲大 어르신을 위해 쓰신글 입니다.

 

農巖集卷之一

雪後。村老金公 聲大 騎牛來過。同訪白雲山。宿普門菴。有僧翕然方與其徒開講。

 

寒山朝霽好。一望興悠哉。不有騎牛過。那成並馬來。路侵氷澗轉。菴對雪峰開。偶値高僧講。因之宿未廻。

 

농암집 제29권 제문(祭文) : 農巖集 卷29 祭金參奉文

   *** 농암집(農巖集)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창협(金昌協)의 시문집

 

김 참봉 성대(聲大) 에게 올리는 제문

 

을해년 3월 임술삭(壬戌朔) 27일 무자에 안동 김창협은 삼가 근간에 돌아가신 참봉 김공의 영령께 박한 제수로 제사를 올리고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

 

옛날 우리 선친께서 / 昔我先子

백운산에 은거할 제 / 買山白雲

필마로 동쪽 와서 / 一馬東來

공의 집에 들르셨네 / 過公衡門

나는 그때 따라와서 / 我時隨行

공을 처음 알았는데 / 識公云初

키가 크고 중후하여 / 脩幹厚質

경박한 이 아니었네 / 非便儇徒

거친 베옷 몸에 감고 / 大布裹身

늙어감이 애석하나 / 老矣可惜

산중에서 밭을 갈고 골짝에서 낚시하며 / 巖耕谷釣

유유자적 지내는 그 생활이 부러웠네 / 而羨其適

이웃하여 살자고 약속 맺으며 / 卜鄰之約

선친께선 시까지 지으셨으니 / 先子有詩

일은 비록 어긋나도 / 事有難偶

뜻은 아니 쇠해서 / 意未或衰

유배지를 떠돌며 / 竄逐流離

누차 시로 읊어내어 / 屢形吟詠

시집 한 권 엮은 것이 / 編爲一集

사영시(思潁詩)에 비길 만해 / 可比思潁

이에 우리 형제들이 / 惟余兄弟

선친 뜻을 이어받아 / 寔承厥志

집을 짓고 와서 사니 / 作室來居

기미년의 일이었네 / 于歲己未

공이 실로 도와주어 / 公實相之

집 짓기를 끝낼 즈음 / 汔于有濟

풍경 소리 울리는 집 / 風佩之築

김씨네라 이름했네 / 遂名金氏

이내 몸이 서울 가서 / 逮余赴洛

십 년 동안 못 올 적에 / 十年不歸

공과 산에 대한 생각 / 思公與山

하루인들 잊었을까 / 何日忘之

하늘 내린 큰 재앙이 / 天降大割

설상가상 엄혹하여 / 雪霜震薄

위태로운 목숨을 / 危喘凜然

의지할 곳 없을 적에 / 窮無所託

지난날 살던 집을 돌아다보니 / 乃睠舊廬

근본으로 돌아간단 의리가 있어 / 義存反本

엉금엉금 힘없이 기어 들어와 / 扶服來投

위축된 마음으로 숨어 지냈네 / 畏約竄遁

공은 내가 애처로워 / 公惟愍惻

전보다도 잘해주어 / 視遇加前

궁핍함을 돌봐주길 / 恤窮賑乏

한집안 같이 했네 / 如一家然

호시탐탐 노려보는 / 彼眈眈者

저들 화심 여전하고 / 禍心未忘

남몰래 정탐하여 / 側聽潛伺

속속들이 알기에 / 其耳甚長

사람들은 연루될까 두려워하였건만 / 人畏株累

공은야 태연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니 / 公則坦坦

억지로 한 일이랴 / 夫豈强爲

진심에서 나온 게지 / 亮由悃款

세도 다시 새로워지매 / 世道更新

억울함이 신원되어 / 覆盆回光

이내 몸이 집으로 돌아올 적에 / 我以家行

공은 마침 병석에 누워 계시어 / 公適臥床

얼굴 뵙지 못하고 떠나오자니 / 不面而別

목멘 듯이 마음이 답답했는데 / 中心如噎

그 누가 알았으랴 이번에 와서 / 誰謂此來

공의 방에 들어가 곡하게 될 줄 / 入哭其室

생각하니 공을 다시 뵙는 듯하여 / 俯仰如見

쏟아지는 눈물 콧물 하염없는데 / 涕泗懸泉

문을 나서 사방을 휘둘러 보니 / 出門四顧

봄 경치가 눈앞 가득 펼쳐져 있네 / 春物盈前

산에는 꽃나무요 / 山有榮木

물에는 잔물결 / 水有文漪

지난날 공을 따라 / 維昔從公

아이들을 데리고 / 幷其諸兒

나무그늘 아래에서 맑은 바람 쏘이며 / 濯淸蔭樾

물고기도 잡아 보고 술잔도 기울였네 / 以漁以觴

허나 지금 어이 다시 그 즐거움 얻으리요 / 今寧復得

옛 자취를 더듬자니 아득할 뿐이로세 / 撫跡茫茫

생각하면 공은 평생 / 念公平生

받은 복이 정말 후해 / 受祉良厚

아내와 해로하고 / 嘉耦偕老

자손들이 많은 데다 / 子姓多有

자손이 과거 급제 영광을 안기었고 / 榮以科甲

고을 수령 부임하여 그 녹으로 봉양하니 / 養以郡邑

사람들이 바라는 것 / 人所願欲

한 몸에 갖추었네 / 亦旣具集

다만 공은 자신이 과거에 낙방하여 / 顧厄公車

후배에게 밀려남을 오랫동안 탄식더니 / 久嗟積薪

사마시에 입격할 제 / 洎陞周庠

칠순 나이 넘었기에 / 已踰七旬

임금께서 이름을 친히 써 내리시어 / 御筆題名

능 참봉에 특별히 제수하여 주시니 / 特除寢郞

오랜 설움 풀어 주신 / 伸於積詘

은총이 각별했네 / 恩出非常

그 일은 기록하여 후손에게 전할 만 / 事可載傳

사람들이 또다시 복이 많다 이르니 / 人更歸福

무슨 유감 있으리요 / 公其何憾

부족함이 없는 것을 / 蓋無不足

공처럼 훌륭하신 원로를 잃고 나서 / 失此耆舊

온 마을이 똑같이 슬픔에 젖었지만 / 悲均里社

덕의에 감사함은 / 感念德義

누가 나만 하겠는가 / 孰如吾者

장삿날로 잡은 날이 / 宅兆之卜

마침 우리 선친 기일 / 値我先忌

여기 남아 하관을 지켜보지 못하리니 / 不留視窆

마음속에 품은 한이 어이 끝이 있으리요 / 含恨何旣

이 봄 술 한 잔 따라 / 爲此春酒

공에게 올리지만 / 酹公一杯

덕을 어이 갚으리요 / 曷云報德

이내 슬픔 풀어낼 뿐 / 聊寫我哀

아, 슬픕니다 / 嗚呼哀哉

부디 흠향하소서 / 尙饗 < 한국 고전 번역원 자료 인용>

 

[주C-001]김 참봉에게 올리는 제문 : 위 작품 〈서숙(庶叔) 진사(進士) 수응(壽應) 에게 올리는 제문〉과 같은 해에 쓴 것이다. 김성대(金聲大)는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김찬(金讚)의 아들로 경기 영평(永平)에 살았으며, 작자보다 29년 연상이다. 그의 나이 72세 때인 1693년(숙종19)에 진사시에 3등으로 입격하여 숙종이 어필로 그의 성명을 써서 내리며 특별히 참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1695년(숙종21)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주D-001]사영시(思潁詩)에 비길 만해 :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영주 지사(潁州知事)로 부임하여 그곳의 순박한 백성과 자연을 좋아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고 그곳을 떠나게 된 뒤로 영주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써서 10여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곧 김수항의 경우 또한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容齋續筆 卷16 思潁詩》

[주D-002]기미년 : 작자의 나이 29세 때인 1679년(숙종5)을 말한다.

[주D-003]풍경 소리 울리는 집 : 원문의 ‘풍패(風佩)’는 패옥이 바람에 흔들린다는 뜻과 처마에 매단 풍경이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을 따랐으나 분명치 않다.

   

농암집 제4권 : 金參奉 聲大 挽

김 참봉(金參奉) 성대(聲大) 에 대한 만사

 

돈후한 자품과 뜻 너무도 진솔하여 / 厖資厚意極眞淳

지금 같은 세상에 옛사람을 보았는데 / 今世吾猶見古人

하늘이며 흰 구름만 어울려 지내기에 / 天與白雲供久臥

깊은 산골 앞뒤 막힌 유자로만 알았었네 / 錯疑窮谷滯儒巾

 

두 번째

과장(科場)에서 칠십 노인 노익장을 과시하니 / 文場老試據鞍雄

이백 명 제생들이 확삭옹을 보았다네 / 二百人看矍鑠翁

얼마나 많은 자들 시골 낡은 서책 속에 / 何限兎園殘冊裏

책벌레로 살다가 백발 되어 죽었던고 / 白頭乾死蠹書蟲

 

세 번째

어필 내려 선왕 능침 참봉을 제수하여 / 御筆新除漢寢郎

푸른 적삼 오사모(烏紗帽)에 영광이 겹치었네 / 綠衫烏帽疊恩光

가을 밭 익은 곡식 단이슬을 받았으니 / 秋田禾黍還甘澤

일찍 자란 봄싹이 부러울 게 없었다오 / 不向春苗羨早長

 

네 번째

한 해가 지나도록 정원 아니 거닐더니 / 鳩杖經年懶涉園

마을 방아 노랫소리 갑자기 끊기었네 / 舂歌一日不聞村

풍류 모두 사라진 쓸쓸한 마을에서 / 蕭條里社風流盡

사제사(蜡祭祀) 좨주 어른 어느 누굴 추대할꼬 / 蜡飮誰推祭酒尊

 

다섯 번째

칼끝이요 창 머리 살얼음판 여섯 해를 / 劍首矛頭六載餘

우리 어른 의지하여 가까스로 살아왔네 / 偸生得近丈人居

지균이며 분택은 오히려 평범한 일 / 指囷分宅猶常事

드높은 그 의리는 광류거를 논할 만 / 高義堪論廣柳車

 

여섯 번째

팽택이라 남촌 사람 세속 밖의 벗이 되어 / 彭澤南村世外期

그 얼마나 밭두둑을 넘나들며 지냈던고 / 度阡越陌幾多時

작은 수레 다니던 길 이젠 잡초 우거졌고 / 如今草沒巾車路

검은 소 놀려두고 다시 타지 않는다네 / 閒却烏牛不復騎

 

일곱 번째

늦봄에 날린 꽃이 동음 마을 가득한데 / 春晩飛花滿洞陰

동풍이 꽃잎 불어 휘장 안에 들어오네 / 東風吹入繐帷深

한 잔 술을 평소처럼 권해볼 수 있을까 / 一杯可似平生屬

울먹이며 술병 잡고 권주가를 부르네 / 淚落提壺勸酒吟

 

여덟 번째

한번 죽은 사람이 살아난 일 못 봤으니 / 未見新封起九原

양산이라 귀로에 가슴이 아프다네 / 楊山歸路獨傷魂

빈손으로 내 무덤 지나가지 말라는 / 他時定不車空過

지난날 교공의 농담이 생각나네 / 尙記橋公舊戱言

 

[주C-001]김 참봉(金參奉)에 대한 만사 : 작자 45세 때인 1695년(숙종21) 3월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김성대(金聲大)는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김찬(金讚)의 아들로 경기 영평(永平)에 살았으며, 작자보다 29년 연상이다. 그의 나이 72세 때인 1693년(숙종19)에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숙종이 어필로 그의 성명을 써서 내리며 특별히 참봉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작자가 29세 때인 1679년(숙종5) 8월에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영평 백운산(白雲山) 기슭 응암(鷹巖)에 은거하기 위하여 집을 지을 당시, 나라에서 벌을 받은 죄인의 가족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받았다. 그런데 그곳에 살던 김성대는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고 여러모로 도와주었으므로 평소에 그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農巖集 卷29 祭金參奉文》

[주D-001]확삭옹(矍鑠翁) : 눈빛이 반짝거리고 정신력이 강한 노인이란 뜻으로, 본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키는데, 김성대를 그에 견주어 한 말이다.

[주D-002]마을 …… 끊기었네 : 마을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방아를 찧지 않는 풍속이 있어서 한 말로, 김성대가 세상을 떠난 것을 뜻한다.

[주D-003]사제사(蜡祭祀) : 한 해의 농사가 무사히 끝난 것을 팔방의 신에게 감사드리는 뜻에서 음력 12월에 들판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주D-004]칼끝이요 …… 해 : 작자의 아버지 김수항이 노론의 영수로 기사환국 때 조정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6년 동안 정적(政敵)의 감시 아래 위험한 나날을 보냈다는 뜻이다.

[주D-005]지균(指囷)이며 …… 일 : 지균은, 중국 삼국 시대 오(吳)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을 찾아가 식량을 도와달라고 청하자, 쌀 3000곡(斛)씩 저장되어 있는 두 개의 곳간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며 가져가라고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54 吳書 周瑜傳》 분택(分宅)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 후읍(郈邑)의 성자(成子)가 그의 절친한 벗인 위(衛)나라 우재(右宰) 곡신(穀臣)이 난리에 죽자, 곡신의 처자를 데려가서는 자기 집 한쪽을 나눠주고 곁에서 살게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孔叢子 卷中》

[주D-006]드높은 …… 만 : 광류거(廣柳車)는 덮개가 있는 짐수레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과거에 여러 번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항우(項羽)의 장수 계포(季布)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숨겨주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복양(濮陽)의 주씨(周氏)는 계포를 숨겨주고 있었는데 결국 발각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 사슬을 채우고 갈포 옷을 입혀 노예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광류거에 실어 협객(俠客)인 노(魯)의 주가(朱家)에게 값을 받고 파는 형식으로 넘겨주어 결국 사면을 받게 만들었다. 《史記 卷100 季布列傳》 곧 김성대가 벗인 김수항이 곤경을 당했을 때 식량과 주거지를 아낌없이 제공하였고 김수항이 나라의 처벌을 받아 죽은 뒤에도 평소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작자를 도와줬다는 뜻이다.

[주D-007]팽택(彭澤)이라 …… 되어 : 팽택은 오늘날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호구현(湖口縣) 동쪽에 있는 곳의 지명으로,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현령을 지냈던 곳이다. 곧 도잠이 현령을 그만두고 고향인 시상현(柴桑縣)으로 돌아와 살다가 남촌에 순박한 사람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으로 이사하여 마을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수시로 왕래하며 살았다는 데서 인용한 것으로, 작자가 평소에 김성대와 이와 같은 관계를 가졌다는 뜻이다.

[주D-008]양산(陽山) : 경기도 양주(楊州)의 다른 이름이다.

[주D-009]빈손으로 …… 생각나네 : 교공(橋公)은 후한(後漢) 때 태위(太尉) 교현(橋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성대를 그에게 빗댄 것이다. 교현이 그의 벗 조조(曹操)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그대가 혹시 내 무덤 앞을 지나갈 때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내 무덤에 차려놓지 않으면 그대가 탄 수레가 세 걸음을 굴러가기 전에 배가 아플 것인데, 그렇더라도 원망은 하지 마시오.” 하였는데, 나중에 조조가 교현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그의 무덤을 찾아보고 지어 올린 제문에, 그 말을 되뇌이며 “그 말이 비록 어쩌다가 농담으로 한 것이라지만 지극히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1 魏書 武帝紀注》 김성대도 살았을 당시 교현이 조조에게 했던 농담을 작자에게 하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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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金昌協, 1651~1708)

 

본관 안동. 자 중화(仲和).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 문간(文簡). 과천(果川) 출생.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1669년(현종 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 ·헌납(獻納) ·대사간(大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는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문학과 유학(儒學)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氣說)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농암집》, 저서에《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편서에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작품으로 글씨에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 《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표(金崇謙表)》 《김명원신도비(金命元神道碑)》의 전액(篆額) 등이 있다.

 

============== 일부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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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음사

촌로공 김성대 증 자헌대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

 

 

 

 

 

 

김성대 전(金聲大 傳)  후손 김순진 지음

 

김성대는 경기도 영평(지금의 포천)의 모동(지금 연곡의 옛 이름)이란 조그마한 산골에서 광해군 14년(1622년)에 태어났습니다. 모동이란 띠풀이 많은 동네를 뜻합니다.

 

성대가 다섯 살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그의 작은 할아버지께서 모동 뒤편에 있는 만가대라는 동네 옆을 흐르는 큰 개울의 퇴우대라 하는 깊은 물에서 낚시를 하여 메기를 여러 마리 잡아 큰 동이에 넣어 두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매운탕을 끓여 성대의 할아버지와 술 한 잔을 나눌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성대는 그 메기가 둔 동이를 기울여 메기를 잡아 조그마한 싸리 종뎅이에 넣어 냇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메기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자 작은 할아버지는 메기를 찾아 뒷곁이며 온 집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음에 걸려 보다 못한 어린 성대는 작은 할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무엇을 찾으세요. 작은 할아버지?"

 

 

"으응, 어젯밤에 퇴우대에 가서 밤새 낚시로 메기를 잡아 물동에 넣어두었는데 메기가 없어졌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구나?"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할아버지! 저어 제가 냇가에다 놓아 주었어요."

성대는 작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로 말하였습니다.

 

"아니 뭐라고? 네 이 녀석, 작은 할애비가 몇 시간이나 고생하며 잡은 고기를 왜 놓아 주었느냐?"

작은 할아버지는 화를 내며 다그쳤습니다.

 

어린 성대는 침착하게 말하였습니다.

"작은 할아버지! 우리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계시지요?"

"그래!"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성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누그러지며 답하였습니다.

 

성대는 말을 이었습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잡으신 물고기는 수염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물고기 중에서 할아버지가 틀림없어요. 그러니 그 물고기들을 작은 할아버지께서 끓여 잡수시면 그 물고기의 손자들이 할아버지가 죽었다며 슬피 울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랑방에 계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놓아 주었어요."

 

다섯 살의 성대는 반문하듯 또렷이 말하였습니다.

"잘했구나, 성대야!"

 

그런 성대에게 작은 할아버지는 속으로 흐뭇해하며 칭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대의 나이 열다섯인 인조 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랑캐들은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아녀자들을 희롱하는 등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성대는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백운산 계곡의 소나무 숲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20리가 넘는 험준한 산길과 냇물을 건너 날마다 쌀과 부식거리를 날라다 가족을 공양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네 청년들을 모아 참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창을 만들거나 지게 작대기에 낫을 매어 들고 파수를 섰던 것입니다.

 

 

오랑캐가 물러가자 동네 어른들은 이제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성대가 동네 사람들을 지켜냈다며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대의 효심은 정말 알아주어야 한다구. 그 어린것이 날마다 20리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식량을 날라다 부모님을 공양하였으니 얼마나 대견하냐구?"

 

사람들은 모두들 내 일인 양 기뻐하며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성대의 머릿속에는 늘 부모님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 고염나무에서 고염이 몇 개 떼구르르 굴러도

"우리 아버지께서 딱딱한 것을 좋아하시는데 아버지 드려야지." 하며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옵니다.

 

잘 익은 복숭아 한 개를 얻으면

"우리 어머니께서 좋아 하실 텐데."라고 하면서 먹고 싶은 마음을 참고 집으로 가져와

어머님을 공양하였습니다.

 

그는 찬치에 가던, 이웃집에 마실을 가던 그의 손에는 늘 부모님께 드릴 떡과 과일, 과줄이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가 중년의 나이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겨울밤, 그의 늙은 아버지인 승지 김찬은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얘, 애비야! 요즘은 왜 그리 산짐승 고기가 먹고 싶으냐?"

성대는 아버지 말씀을 듣자마자 관솔 횃불을 만들어 들고 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 옛 고려장터가 있던 옹장골로 올라갔습니다.

 

성대는 머슴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 공양하는 일을 누구에게 시켜 대신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성대는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거슬러 올라가 너구리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너구리굴로 들어갔습니다. 비좁은 굴로 들어가자 너구리는 횃불을 보고 놀라 마구 으르렁 거렸습니다. 성대가 작대기로 찌르자 너구리는 반항하며 덤벼들다 성대의 옆으로 도망가려 하였습니다.

 

"요놈, 어디로 도망가려구!"

성대는 혼잣말로 외치며 온몸으로 너구리를 막아 잡았습니다. 성대는 너구리를 잡느라 손등이 할퀴는 등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아침상에 너구리 국을 끓여 아버지께 공양하였던 것입니다.

 

 

성대는 너구리에게 할퀸 자리가 조금은 아프기도 하였지만 아버지께서 잡숫는 모습을 보니 마음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성대는 저녁이면 꼭 물 한 그릇을 어버이께서 주무시는 머리맡에 떠 놓고 이부자리를 펴 드리며 문안을 여쭙고, 아침이 되어서도 문안을 여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성대는 늘 예의를 갖추어 의복과 관대를 단정히 하였습니다.

 

"남아는 늘 그 모습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하며 그의 자식들과 동네 젊은이들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늘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집에 들어올 때는 부모 형제를 생각하고, 밖에 나가서는 윗사람을 생각하라" 고 가르치며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이웃과 함께 있을 때에는 늘 모범이 되고 행실이 바르니 노비와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서로 의견 충돌이 있으면 성대에게 와서 심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하루는 이웃의 두 농사꾼인 영달이와 명구가 찾아와, 한 사람은 자기네 볏섬를 훔쳐갔다고 하고, 한 사람은 아니라 하며 심판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두 농부는 매우 상기되어 자칫하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대는 주안상을 보라 이르고 두 사람을 마주앉게 한 뒤 술을 한 잔씩 따라 주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네네 집은 서로 위 아랫집 아닌가?"

"예!"

두 사람은 억지로 대답하였습니다.

" 두 집에는 모두 늙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가?"

"예, 그러문입죠."

자기네 볏섬이 없어졌다던 영달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한 밤중에 자네네 집에 불이 났다면 누가 가장 먼저 달려와 ‘불이야"를 외치고 불을 꺼주며 늙은 어버이를 구출해 줄 텐가?"

 

성대는 입가에 위엄을 보이며 비장한 듯 물었습니다.

"그야 물론 명구 이 사람입죠."

 

영달이는 물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명구를 가리키며 대답하였습니다.

"내 자네 명구에게 묻겠네? 자네네 집은 좁지 않은가?

 

 

만약 자네의 어머니 환갑잔치를 하거나 딸을 여읜다면 그 손님은 어디에서 묶고 가시게 할 텐가?"

"그야 물론 영달이 이 사람 네 집입죠."

 

성대는 그제 서야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허허허, 그것 보게나. 자네 둘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야. 내가 넉넉지 못한 살림이지만 벼 한 섬을 내어 줄 터이니 서로 반씩 나누어 가게나. 영달이 자네는 한 섬이 없어졌지만 반섬은 명구에게 집 좀 잘 돌보아 달라고 선심 쓴 것으로 하고, 명구 자네는 누명을 써 마음이 언짢으니 마음 풀라고 주는 걸세."

 

성대는 두 사람의 의리를 다시 이어주려고 자신의 볏섬을 나누어 주면서 까지 이웃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펼쳤던 것입니다.

 

숙종 15년인 기사년 때의 일입니다.

 

조정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서로를 헐뜯으며 당파 싸움이 심하였습니다. 이를 기사사화라 하는데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김수항은 참화를 당하여 죽고 그의 가족들은 귀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성대는 그의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었습니다. 비록 뜻이 달라 나라의 벌로 귀향을 가게 된 사람들이지만 성대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냥 모른 체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대는 역사를 시켜서 비어 있는 헌집을 고치고 그들을 안주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식과 부식거리를 무려 6년이나 나누어 주면서 의리를 지켰으니 그 정성에 김수항의 가족들은 감복하고 감화하였습니다.

 

기사사화가 일어나기 전 김수항은 성대의 이웃 사랑하는 의리에 감동하여

"모동의 근처인 개울의 동쪽은 그대가 살고 서쪽은 우리가 살면서 자손만대 의리를 지켜가세." 라고 산을 나누어 살자는 분산시를 지어 의리를 표시하였고,

그의 가족은 후일 매바위 (이동면 장암2리) 근처에 살았습니다.

 

이에 성대는 "바위 위 큰 소나무 그늘아래 우수에 깊은 사람 달을 안고 옷 그림자 어름에 비치네.

어찌하여 구 십 먹은 노인이 연사에서 놀고 여러 어진이의 죽음을 죽림은 몰라 하노라.

다행히 시 짓는 늙은이가 있어 좋은 뜻이 많구나. 장차 아름다운 경치에 처음 들어가길 원하나 시 읊고 노래함이 족하지 않아 한탄이 오래인데 서산 길이 물에 잠김을 깨닭지 못하였네."

 

 

라고 받으며 세월의 무상함과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작아짐을 노래하면서 서로 의좋게 살자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효종 2년(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 김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성대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병환에 드신 아버지께 극진히 병간호를 하였습니다.

 

탕제를 끓여 올림에 있어서 절대로 남에게 대신 끓여 올리는 법이 없이 언제나 약탕기를 들고 다녔으며 몇 시간이고 약탕기에 은근한 숯불로 불을 지피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성대는 아버지께서 보신 용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며

"아버지의 똥이 이렇듯 쓰니 얼마나 괴로우실까?" 라고 말할 뿐 구린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대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쇠약할 대로 쇠약해 지셨습니다. 아버지는 차마 말씀을 이을 수도 없었습니다. 성대의 가슴이 메이는 듯 하였습니다.

 

성대는 손가락을 베어 아버지의 입에 그 피를 넣어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달콤한 물이 입으로 들어오자 기운을 차리시고 다시 눈을 뜨며 말하였습니다.

 

"이 무슨 물이기에 이리도 단 것이냐?"

"아버지! 단옥수수대를 짠 물이옵니다."

성대는 자신의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무명으로 감아 움켜쥐고 고통을 참으며 아버지를 걱정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대의 그런 효성으로 생명을 며칠이나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효종 15년(1674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성대는 몇 달이고 슬피 울어 그의 자식들과 형제들은 그만 우실 것을 청하였으나 마침내 듣지 않으시고 늙어 죽도록 젖 먹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듯,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하였으니 여러 누이와 아우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효성 된 바를 배우며 탄복하였습니다.

 

성대는 아들들이 벼슬을 하는 고을에서 비단이나 인삼 등 귀한 선물이 전해지면 그를 즉시 물리치면서

 

"내 어찌 네 고을의 뇌물을 받으며 기뻐하겠느냐? 뇌물은 곧 편견과 잘못된 정치로 이어 지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는 또 아들들을 꾸중하며 "이 비단 한필은 고을 백성이 몇날 며칠을 고생하고 짠 땀이니 그 실오리 한 올 한 가닥이 만백성의 근심 이니라"

 

 

하여 오히려 백성에게 상을 주고 곡식을 나누어 주며 사랑으로 다스리라 명하였습니다.

 

성대는 72세의 나이인 숙종19년(1693년)에 쌓은 공부를 시험하려 사마시라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였습니다.

이때 숙종 임금은 늙은이가 과거에 응시하러 온 것을 보고 말씀하였습니다. "저기 저 늙은이가 누구인고?"

 

"예, 전하! 경기도 포천에서 온 늙은이 옵니다."

"나이가 칠십은 족히 된 것 같은데 무엇을 하려고 이제야 과거에 응시하였단 말인가?"

 

"예, 전하! 평생 학문을 하였으나, 자신이 어느 경지인지 몰라 자신을 시험하러 왔다 하옵니다."

 

숙종 임금은 늙은이의 마음을 아시고 친히 호를 "촌로"라 지어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벼슬을 내리시어 "제릉 참봉"을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대는

"황공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며 감사를 표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1695년에 생을 마쳤습니다.

성대의 효성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듣고 크게 기뻐하던 숙종은 성대의 죽음을 슬퍼하며 호조 참판을 내리고 사람을 보내 장례를 관장하였습니다.

 

 

이후 호조 참판에서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되었는데 포천과 영평 등 인근의 유림과 벼슬아치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저 포천군 창수면의 옥병 서원에 여러 선비들과 함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읍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모동의 동산 옆에 연곡사라는 사당을 지어 촌로공 김성대 선생과 반성제 김성발 선생, 김성대의 동생 동인 김성옥 선생, 중암 김평묵 선생등 4위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셔 왔으나 일본의 침략으로 소실되고, 지금은 포천군 이동면 연곡4리 동산 옆에 동음사라는 사당을 재건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촌로공 김성대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이웃 사랑과 부모에 효도하는 지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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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족보 세적 (대사헌 호 촌로공 휘 성대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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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대사헌 촌로공 김성대 할아버지 영정

자랑스런 촌로공의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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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로공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이 필요하시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동음사(촌로공파) : http://blog.daum.net/yescheers/5840530

 

촌로공 김성대 묘갈명(묘비명)은 아래 주소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촌로공 묘갈명 : http://blog.daum.net/yescheers/7540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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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新안동) 묘소 사진

 

안동김씨()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안동’과 고려 태사() 선평()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고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구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만 2645가구에 42만 5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신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5068가구에 4만 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 서윤공 김번(金璠) 묘

(남양주 덕소리 석실소재 증이조판서 행평양부서윤 김공 번 之 묘)

김번의 묘는 조선8대 명당자리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대명당으로 그 후손들 중에서 왕비3, 정승15(영의정만8), 대제학6, 판서35, 청백리 청음 <st1:personname w:st="on">김상헌</st1:personname>선생, 기타 문과·무과에 등극한 사람이 무려300여명이나 되고 그 유명한 안동 김씨 세도가를 이뤘다.

문정공 청음 김상헌(金尙憲) 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소재

유명조선 문정공 청음 김선생 상헌 之 묘

 영의정 퇴우당 김수흥(문곡선생 형님) 묘

남양주시 이패동 산12-5번지 돌누께마을 뒷산 (철탑옆)  

영의정 퇴우당 김수흥(문곡선생 형님)  之 묘 

영의정 문곡 김수항 之 묘

남양주시 이패동 산11번지 (돌누께마을 철탑옆)

유명조선 영의정 문곡선생 김공 수항 之 묘

영의정 몽와 김창집(문곡선생 큰아들) 之 묘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소재

유명조선국 영의정 몽와김공 창집 之 묘

유명조선국 영의정 몽와김공 창집 之 묘

장락원정(掌樂院正) 김이장(金履長) 之 묘

증영의정 김이순 之 묘

영안부원군 풍고 김조순(몽와 김창집의 현손) 之 묘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산56-27

유명조선국 영안부원군 증영의정 시충문 풍고 김공 조순 之 묘

증영의정 시충문 풍고 김공 조순 之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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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分山) 이후 비화(祕話)

  ** 祕話 :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한 이야기

 

안동김씨((新안동) 영의정 문곡 김수항 선생님과 촌로공 증 대사헌 김성대 공은 산(山)을 서로 나누어 가진(分山) 이후 두분의 자제는 친형제 이상의 정을 나누었고 그 후손들 또한 그 인연으로 맺어져 서로를 위해 주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우의정을 지내신 김달순 선생이 탄핵을 받을 당시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김처암 공께서 차마 엄하게 탄핵하지 못하여 3년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즉 정조 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너그러운 인품으로 죄인들을 관대하게 처했다는 죄목으로 순천에 유배되었다.

(죄목이 상을 받아야 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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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부는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삼사(三司)라고 불리는곳이다.

대사헌 1명과 종3품 집의 1명, 정4품 장령 2명, 정5품 지평 2명, 그리고 정6품 감찰 24명 등 총 30명의 관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중인 계급인 집행 아전들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권력자들을 벌벌 떨게 만든 핵심 구성원이었다. 사헌부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불법이나 월권 사실이 발견되면 거침없이 탄핵했다. 이들은 원칙에 관한 한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결코 물러서지도 않았다. 심지어 국왕조차 탄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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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순 (金達淳, 1760~180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以), 호는 일청(一靑). 양겸(養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범행(範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이현(履鉉)이며, 어머니는 송재화(宋載和)의 딸이다.

(달순의 5대조는 영의정 문곡 김수항)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0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전 호조판서 이서구(李書九)가 죄를 쓰고 물러감에 따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한 뒤 그 해 특지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정조실록』 을 바치고 『선조보감(先祖寶鑑)』 의 편찬을 청하였다.

 

1805년(순조 5)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확립되자 우의정에 올라 벽파(僻派)였던 그는 박치원(朴致遠) 등을 추증(追贈)하라고 아뢰었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아 탄핵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에 이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뒤에 다시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김처암(金處巖, 1755.영조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중려(仲礪), 호는 진헌(眞軒)으로 고조부는 증 대사헌 촌로공 성대(聲大), 증조부는 제주목사 죽헌(竹軒) 석보(錫保), 조부는 상성(相星)이고, 아버지는 진사 양직(養直)이며, 양직의 동생 양심(養心)은 대사간과 승정원 우승지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동부승지 신의립(辛義立)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응제시(應製試)에서 선발된 생원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806년(순조 6)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는 시파를 공격하는 김달순(金達淳)을 엄하게 탄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천에 유배되었다. 1809년에 풀려나 벼슬이 사헌부 집의에 이르렀다.

 

편서(編書)로 김은부(金殷傅)이하 안산김씨들의 묘문·행장 및 사적을 모아 엮은 《안산김씨가승 安山金氏家乘》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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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조선시대 붕당의 출현 요약

 

동인 : 김효원지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다수

         신진세력들이 참여,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영남학파

서인 : 심의겸을 옹호, 처음엔 그 세가 약했다가 이황과 학문적

         대립의 위치에 있었던 이이의 가담으로 그 세가 점차

         커짐 (율곡과 성혼의 기호학파)

 

북인 : 남명학파 주류. 급진파. 실리적 중립외교지지.

남인 : 퇴계학파 주류. 온건파. 대의명분 중시.

 

노론 : 이이학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성리학 고집)

소론 : 성혼학파.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

         (기존 성리학에 양명학, 노장사상등을 융통성있게 수용)

 

벽파 : 노론중심.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 처분은 당연하다는 입장

시파 : 남인중심, 사도세자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죽음은 지나친

         처사라는 입장 (대부분 남인, 노론, 소론의 일부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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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산김씨 포천 직장공파자손화수회
글쓴이 : 희망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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