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오늘은 덕소 석실 선영 이웃인 율석리 휴암공파 묘역을 답사하였다. 같은 서윤공 할아버지 후손으로 15대조 휘 생해 둘째 아들이신 휘 원효 선조님과 그 아들이신 휴암공 휘 상준 선조님의 묘역을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대충 위치는 알고 있었고 석실 입구 도로에서 율석리 쪽으로 70m 정도 가다가 마을 전에서 산으로 들어갔는데 잘못이었다. 산속을 헤매기 한참 휴암공 묘역이 나타났다. 바로 마을과 이웃하여 있는 것을 공연히 산속을 헤맸다.
율석리 앞 도로로 석실 마을 앞 도로에서 가까운 곳이다. 도로 우측에 표석으로 휴암공파 묘역임을 알리고 있다.
안동김씨 휴암공파 묘역 안내 표석
휘 원효 선조님의 묘역으로 15대조 휘 생해의 둘째 아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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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효(金元孝, 1536-1612)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희주(希周)이며 구휘(舊諱)는 달효(達孝)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김영수(金永銖)이고, 조부(祖父)는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贈職(증직)된 김번(金璠)이고, 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을 역임하고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김생해(金生海)이며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이씨(完山李氏=전주이씨)는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따님이시다. 삼가현감을 지낸 김대효의 동생이며, 돈녕부도정을 지낸 김극효의 형이다 계유년(157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돈녕부 참봉(敦寧府 參奉)에 제수 되었고, 그후 사축서 별제(司畜署 別提), 선공감 참봉(繕工監 參奉)이 되었다.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여 상기(喪期)를 마치 뒤에 익위사 시직(翊衛司 侍直)에 임명(任命)되었으며 그후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를 거처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제수받았으나 곧 체직(遞職=체임)되어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사직서령(社稷署令)과 평시서령(坪市署令)을 역임하였고, 군기시 첨정(軍器寺 僉正)을 거쳐 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으로 승진한후 드디어 군기시의 장(長)인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었다. 1남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김상준(金尙寯)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큰 딸은 허제필(許霽弼)에게 시집가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요, 작은 딸은 김강재(金强哉)에게 시집갔는데 일찍 죽었다. 신안동김씨 서윤공파의 대표적인 선조중 한분이다.
- 平難原從功臣敎書(평난원종공신교서) 宣祖己丑(선조 기축년:1589년)
除兇討逆臣子之至衷, 賀功酬勞帝王之大柄, 無細大而畢錄, 豈貴賤而有殊, 顧予䏚躬, 叨守鴻業, 雖勵精圖治恒戰兢而自持, 而遣大投艱奈事機之難察, 何圖梟獍之惡, 迺出搢紳之間, 幸賴宗社之靈, 已正誅討之義, 玆銘彛鼎, 以褒忠勤, 惟爾臣僚, 罔有內外, 上自士大夫下至庶賤, 或設機而鉤探, 或仗義而跟捕, 凡有協贊之力, 悉錄原從之功, 爰稽舊章, 庸示身典. --(번역)간흉(奸兇)을 제거(除去)하고 역적(逆賊)을 토멸(討滅)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성(精誠)이요, 공훈(功勳)을 치하(致賀)하고 노고(勞苦)에 보답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큰 권한(權限)이다.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기록하니, 어찌 귀(貴)하고 천(賤)하다하여 다름이 있겠느냐? 덕(德)이 없는 내 몸을 돌아볼 때, 외람되이 큰 기업(基業)을 지켜, 비록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마음을 가져 왔는데, 견대투간(遣大投艱)하니 어찌나 사기(事機)를 살피기 어려웠던지, 어찌 효경(梟獍)과 같은 악인(惡人)이 이에 진신(搢紳) 사이에서 나올 줄을 헤아렸겠는가? 다행하게도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이미 주토(誅討)의 의(義)를 바르게 하여, 이에 이정(彛鼎)에 새겨서, 충근(忠勤)함을 포장(襃章)하니, 너희 신료(臣僚)는 내외(內外)가 없으며, 위로는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인(庶人)·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더러는 올가미를 만들어 구탐(鉤探)하고, 더러는 의거(義擧)하여 쫓아가서 잡기도 하여, 모두 협찬(協贊)에 힘쓴 것이 있으니, 모두 다 원종(原從)의 공(功)을 기록하여 이에 옛날의 법조문(法條文)을 참고로 하여 새로운 典禮를 보이는 것이다. --(註)이는 나라에서 군기시정(軍器寺正) 김원효(金元孝)에게 내린 교서(敎書)이다. 평난공신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이 상고(上告:윗사람에게 알림)하여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고 고변(告變:반역(叛逆)을 고발(告發)함)함으로써 이들과 관련된 동인도 아울러 척결하였는데, 대부분 서인이 녹훈을 받게 되었다. 정여립은 주살(誅殺)되고 박충간(朴忠侃)등 22명이 공신(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기타 유공자(有功者)도 모두 표창을 받았다.
휴암공 휘 상준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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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金尙寯, 1561년~163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수(汝秀), 호는 휴암(休庵), 본관은 (신)안동이다. 해주목사, 죽주부사, 형조참판 등을지냈다. 아버지는 군기시정 김원효(金元孝)이고,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전주이씨)로 태종의 서자 근령군(謹寧君)의 현손 충의위 이승열(李承說)의 딸이다. 우의정 선원김상용의 종제(從弟)이며, 장단부사김상관, 좌의정 청음김상헌, 경주부윤김상복의 종형(從兄)이다.
[편집] 생애
明宗(명종)16년(1561년 5월 11일생)에 태어나 어려서는 父祖(부조)의 가르침을 받아 글 읽기를 즐기고 儉約(검약)하며 精進(정진)하였다.
22세 약관의 나이에 향시 초시(初試)와 발해시(發解試)에 제2등(第二等)으로 선발되어 천거되었으며 그해(1582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585년 모친상을 당했을때 선상(善喪)으로 상(喪)을 잘 치렀다고 칭찬을 받기도하였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더욱 힘써 책을 읽었는데, 아침부터 깊은 밤중(丙夜)에 이르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함께 공부하던 여러 종제(從弟)들이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들도 또한 능히 책을 보지 않고서도 글을 외웠다 한다.
159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괴원(槐院:承文院: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에 선임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25)에 체찰사 심수경(沈守慶)이 호서지방(湖西地方)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건의토왜(建議討倭:倭賊을討伐)할 때에 공을 벽소(辟召)하여 종사(從事)하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막료(幕僚)의 군중(軍中) 계획들이 공(김상준)에게서 많이 나왔으므로 심수경공이 그를 심히 중하게 여겼다.
1593년(선조26년)에는 행재소(行在所:임금이 궁을떠나 나들이하거나 전시 변란등의 사유로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 나아가서 승정원 주서(承政院 主書)에 제수됐고, 곧 예문관 검열을 거쳐 대교로 승진했다. 1594년 예문관봉교에 승임(陞任)되었고, 자리를 옮겨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좌랑으로 옮겨갔다. 조정에서 삼로(三路)의 어사(御使)를 파견할때, 강직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추천하여 골라 보냈는데, 공도 더불어 선임되어 영동(嶺東)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 죄악을 저지른 관리를 염탐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그후 영광군수, 군자감정(君子監正)을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에 옮겼다가 또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으며, 호남 지방의 조발사(調發使)에 충원되어, 명나라의 수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1596년(선조29년) 9월 영광군수 재직시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만나 왜란극복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때에는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 강항(姜沆)과 함께 전라도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군량비확보에도 힘썼다.
1599년 공주목사가 되어 공주군에 산성을 수축하였고,1602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신(大臣)이 또 공을 천거하여 사도 조도사(四道調度使)에 임명되었다. 관동(關東)과 영남(嶺南) 및 호남(湖南) 호서(湖西) 지방에 출입하면서 험준(險峻)한 수천리의 험로(險路)를 거쳐 속량(粟糧)을 수만석이나 얻었으므로, 군량이 충족하여 백성이 고생되지 않았다.
1604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죽주부사(竹州府使)에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1608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어 명나라에 파견될 천추사(千秋使)로 선발되어 명나라 북경에 입조(入朝)하고 귀국하였으며, 돌아와서 승정원 우승지, 좌승지를 지냈다.
명나라 만력제(萬曆帝,1563년~1620년 明의 제13대 황제) 신종(神宗)이 태감(太監) 염등(冉登)을 보내어 책봉하는 글을 내릴 때에 공이 예방승지를 맡아서 신종의 책봉서를 주선하는데 궐전(闕典)이 없었으므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하여 승정원도승지로 기용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부총관(副總管)을 겸하였으며 그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형조참판(刑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同知春秋館事義禁府事)가 되었다
160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논의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아 광해군의 미움을 받고 쫓겨나, 그후 11년 동안이나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해 삭출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627년 아산에 이배되었다가 1633년에 사면을 받고 1635년에 풀려나왔다. 길주(吉州)에 귀양 가 있을 때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러 선유(善誘)하였기 때문에 신발이 항상 첨(簷)들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뒤에 공의 부음(1635년)을 듣고 모두 다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 한다.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즐겨 읽었고, 손수 ≪강목≫ 20권의 목(目)을 초(抄)해서 ≪강감요략 綱鑑要略≫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요점을 담으면서도 자세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이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아래는 휘 원효 묘소이고 위는 휴암공 휘 상준묘소이다.
위는 휘 수일 묘소(아래는 그 아들 盛最)로 따로 찍은 사진이 등록이 안 된다.
휘 壽一 선조님은 휴암공 휘 상준의 손자이시고 부친은 휘 광욱[光煜(생부는 光煒)]이시다. 세보를 적으면 字台老 仁祖癸亥六月二十九日生 蔭敦寧都正 己巳五月十日卒 贈吏曹參判 ○配贈貞敬夫人 延安李氏 壬戌生 戊申九月七日卒 父參判 玄洲昭漢 祖左議政 月沙廷龜曽祖縣令贈領議政?外祖贊成李尚毅 本驪州 ○墓休庵公兆右辰坐合窆 表男盛最識自銘孫婿趙正緒書
휘 盛最 선조님은 휴암공의 증 종손으로 부친은 壽一이시다. 묘소는 위 사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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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최(金盛最)에 대하여
1645년(인조 23) 7월 5일∼1713년(숙종 39) 4월 25일.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최량(最良)이고, 호는 일로당(佚老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본적은 경기도 양주(楊州)이며,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는 김상준(金尙寯)이고, 조부는 김광욱(金光煜)이다. 부친 김수일(金壽一)과 모친 이소한(李昭漢)의 딸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정익(鄭榏)의 딸 해주정씨(海州鄭氏)이다.
1666년(현종 7) 식년시 진사 3등 17위로 합격하였다. 1675년(숙종 1)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1711년(숙종 37)에 이르기까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단양현감(丹陽縣監)·호조정랑(戶曹正郞)·삭녕군수(朔寧郡守)·풍덕부사(豊德府使)·충주목사(忠州牧使)·조사위장(曹司衛將) 등을 역임하였다.만년에 한양에 별채를 짓고 ‘일로(佚老)’라 편액하여 걸고는 정원에 화초를 가꾸면서 동생과 조카들을 모아 시를 읊으며 지냈다. 향년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시좌(金時佐)이다.
휘 勉行 선조님 묘소로 앞에서 찍은 사진은 등록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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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부(敬夫).
증조부는 김수일(金壽一 金壽翼으로 되어 있어 필자가 바로 잡음)이고, 조부는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김성후(金盛後)이며, 아버지는 진산군수(珍山郡守)였던 김시민(金時敏), 생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된 김시서(金時敍)이다. 외조부는 황만(黃?)이고, 전처는 윤세항(尹世恒)의 딸이고, 후처는 안윤규(安允揆)의 딸이다. 형인 김현행(金顯行)과 더불어 고양(高陽) 덕양산(德陽山)에서 기거했었다.
부수(副率)로서 1755년(영조 31) 을해정시문과(乙亥庭試文科) 병과(丙科) 2등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아들 김이정(金履正)은 1765년(영조 41)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신묘정시문과(辛卯庭試文科) 병과(丙科) 4등으로 급제하여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