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안동김씨는 여러 파가 있지만, 그 중에서 김상헌 계열(청음공파)는 충절과 문학, 그리고 도학에서 가장 두드러졌다.1) 김상헌 계열은 원래 문학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서울지역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문학적 소양이 중시되었다. 김상헌은 문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는 당대 학계에서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 김상헌 계열은 점차 문학과 아울러 도학에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리안으로 이어지는 학풍은 주자학에서 정점에 서 있었다. 김상헌 계열은 『주자대전차의』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특히 김창협은 인물성 논쟁의 중심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교육에서도 이들은 석실서원을 통해 강학활동을 하였고, 자신들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이 글은 김상헌 계열의 철학과 교육을 살펴보고, 그들의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철학적인 논문들은 주로 인물성동이 논쟁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연구는 나름대로 조선의 논쟁사를 밝혀주는데 의미를 갖지만, 논쟁을 소개하는 것에만 치우쳐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들의 학문적 의의를 밝혀주지는 못하고 있다. 지나치게 당파적인 입장에서 서술함으로써 이들이 가지는 교육적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당파적 입장은 이념과 현실을 연결하는 손쉬운 연결고리이지만, 이는 학문 나름의 길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김상헌 계열이 가지는 한계도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상헌 계열은 당시의 정치와 학문에서 주류였다. 이들에게는 현실을 이끌고 갈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2. 본론 1) 김상헌 계열의 가계 金尙憲(1570-1652)은 金克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외조부 鄭惟吉(1515-1588)의 집에서 자라나 백부인 大孝에게 입양되었다. 그가 주로 생활한 곳은 지금의 서울 북악산 아래인 청운동이다. 이곳은 그의 삼대조 金璠이 살던 곳으로, 그의 형인 金尙容이 크게 넓혔다. 원래 김상헌의 조상들은 안동 豐山에 살았는데, 김번이 서울로 옮기면서 이들은 안동 김씨보다는 壯洞 김씨로 불리게 된다. 김상헌은 尹根壽(1537-1616)에게 글을 배웠다. 윤근수는 성리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도학자로서보다는 당대의 문장가로 문명을 떨치었다. 김상헌 역시 윤근수의 영향을 받아 도학보다는 문학적인 면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가 교유했던 사람들도 모두 문장가들이다. 그는 象村 申欽(1523-1597), 月沙 李廷龜(1564-1635), 西坰 柳根(1549-1627) 등에게서 문장을 익히고, 鶴谷 洪瑞鳳(1572-1645), 東岳 李安訥(1571-1637), 竹陰 趙希逸(1575-1638), 谿谷 張維(1587-1638) 등과 문장을 수련하였다. 김상헌은 이들과 교유하면서 서울지역의 문화적 분위기를 익혀 나갔다. 이들은 모두 문화 예술 방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헌은 특히 서예, 그림2), 印章3) 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 점은 그의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런데 김상헌은 병자호란중에 척화파의 거두로 이름이 나고, 그로 인하여 심양에 붙들려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온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石室로 은퇴한다. 석실은 원래 그의 선조 김번의 묘가 있던 곳으로, 그는 여기에 몇간의 집을 짓고 거처한다. 김상헌 계열이 북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것은 이 때부터이다. 김상헌은 주로 이곳에 살면서 당시의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宋時烈(1607-1689) 朴世采(1631-1695) 등이 그의 집에 드나들었던 것도 이 시기이다. 김상헌은 소생이 없어 金尙寬의 아들인 金光燦(1597-1668)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김광찬의 부인은 바로 金悌南(1562-1613)의 손녀이다. 여기서 김상헌 계열은 훈척 세력과 연결을 갖는다. 그런데 김광찬의 부인 연안 김씨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들은 외가에서 길러지고, 김광찬의 맏아들인 金壽增(1624-1701)만이 김상헌의 슬하에서 길러진다. 김수증은 김상헌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이름을 날린 김상헌의 다른 동생과는 달리 문화 예술 방면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남인과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동생들이 귀양가는 것을 보자, 춘천 부근의 谷雲에 은거한다. 특히 己巳換局 이후에는 아예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조카인 김창흡에게로 이어진다.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가 바로 김수증의 손녀였지만, 김수증은 외척으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金壽興(1626-1690)과 金壽恒(1629-1689)은 모두 외가에서 길러졌다가 김상헌의 훈도를 받고 자란다. 그리고 김수흥은 金光爀의 대를 잇는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일찍부터 관계로 진출한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송시열에게 가르침을 받고, 송시열과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한다. 이들은 노론의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여, 남인 및 소론과의 당쟁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그러나 송시열이 정치적 운명을 마감함에 따라 이들도 정치적인 패퇴기에 접어든다. 그들은 각각 加平 땅에 超然臺와 永平 땅에 風珮洞을 마련하고 은퇴할 생각을 보이지만, 다시 자신들의 당파가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서울의 장동에서 생활한다. 그 중에서 김수항은 여섯 명의 뛰어난 자식들을 길러낸다. 그의 자식교육은 주자학 교육을 위주로 하면서도, 각각의 개성을 살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문장과 그림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자식들을 당대의 문화 예술가로 만든다. 金昌協(1651-1708)은 24세때 甲寅禮訟으로 퇴거하는 송시열에게 며칠동안 가르침을 받고, 송시열로부터 장차 師長이 되리라는 ‘橘頌’의 칭송을 받았다.4) 이후 송시열은 그를 인조반정의 공신인 李貴 趙涑등에 비겨 선비의 기개를 떨칠 인물로 기대하였다.5) 그는 송시열로부터 『주자대전차의』를 완수할 것을 부탁받을 정도로 주자학의 조예를 인정받았다. 또한 김창협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명성을 날려, 麗韓十家의 하나로 인정될 정도였다. 그는 종래의 문학론에 대하여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후대에는 그의 학단이 별도로 성립하게 된다. 金昌翕(1653-1722)이나 金昌業(1658-17210), 金昌緝(1662-1713), 金昌立(1666-1683) 등은 모두 김창협의 문학론을 이어받고 있다. 김창흡도 송시열에게 제자의 직을 청했으나, 방랑벽으로 인해 산천을 떠돌아다녔다. 그가 서울에 살 때 모였던 李秉淵(1675-1735), 鄭歚(1676-1759) 등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조선 후기 문화 예술계를 주도하였다.6) 김창집은 여전히 정치계에 남았으나 김창협이나 김창흡은 기사환국을 맞이하여, 그의 아버지의 유시를 따라 더 이상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모두 북한강 유역의 미호나 곡운 등지에 머물면서 후진을 양성하며 주자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智와 知覺의 관계에 대한 논쟁’, ‘人物性同異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은 그의 후학들에게 이어져 결국에는 호학과 낙학의 지역적인 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2) 김상헌 계열과 당쟁 김상헌의 존주론과 배청존명론의 핵심은 『小學』 공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척화파의 거장으로 김상헌이 손꼽혔던 이유는, 주자학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실천력 때문이었다. 김상헌이 볼 때 만주족에게 굴복하여 강화하는 것은 사람이 오랑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만주족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희가 금나라와의 강화를 반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또 주자학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된 이유, 즉 도덕성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이 고려될 때 김상헌과 김상헌 자손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다름아닌 주자학이었다는 점이 좀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김상헌의 주자학적 이념은 그대로 자손들에게 계승된다. 그런데 이들이 김상헌에게서 배운 것은 『소학』에 지나지 않았고, 그 후에는 과거를 위한 문장공부를 주로 하였다.7) 이들이 주자학의 이론적인 공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송시열을 통해서이고, 그것도 송시열이 귀양을 간 기간에 국한된다. 그 뒤로 그들은 정치적인 일에 휘말려 주자학의 이론공부는 등한히 하였다. 김수흥과 김수항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청나라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청나라와의 국제 관계보다 국내 문제가 좀 더 중요하였다. 尹拯(1629-1714)을 둘러싼 소론과의 문제가 바로 이들이 당면한 문제이다. 그런데 김수흥이나 김수항은 송시열에게 배웠던 관계로 송시열의 입장을 반영한다.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인 尹宣擧(1610-1669)의 비문에서 윤선거가 절개를 잃었음을 탓하면서부터 노론과 소론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윤선거가 尹鑴(1617-1680)와의 교제를 끊지 않자 송시열은 이들을 공격하였다. 윤휴는 송시열이 보기에 이단이었다. 윤휴가 복제 논쟁을 통하여 이미 송시열과 다른 입장을 취한 데다, 주희와 다른 경전 해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윤휴를 옹호하려는 윤증에 대해서도 송시열은 똑같은 무리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당시 송시열의 이러한 비판에 동조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김수항의 송시열 옹호는 송시열에게 큰 힘이 되었다. “공이 나(송시열 자신)의 재주는 약한데 적이 강함을 안타깝게 여겨, 때로 구해 주려는 말을 하니, 시배들이 그를 더욱 더 좋지 않게 여겼다.”8) 김수항이 보기에 송시열과 윤증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그런데도 윤증은 스승을 저버리고 윤휴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사제 관계를 부자 관계에 견주면서 학문적 사승에 연계된 당파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 했던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볼 때, 스승을 저버리는 행위는 바로 가족과 자신의 혈연 관계를 파기하려는 행동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송시열에 대한 김수항의 행동은 주자학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김상헌 계열은 김창협과 김창흡 대에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우선 대외적인 변화란 오삼계의 난과 관련된 것이다. 오삼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북벌론자들은 일단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것이 실패로 끝나자 청의 현실적인 존재를 인정해야 했다. 특히 김상헌의자손들은 바로 이 시점에서 자신들의 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 이 점은 특히 김창협의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김창협은 오삼계의 난이 일어나자, 청나라가 망하리라고 단정하였다. 청나라는 일시적인 틈을 타서 천하를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임금이 진실로 정사를 닦고 백성의 힘을 길러서 근본을 확고히 한다면, 형세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뒤에 군대를 일으켜 북벌을 도모한다면 청나라가 망하는 형세가 더욱 확연할 것이라고 하였다.9) 그러나 오삼계의 난이 진압되자 김창협의 청에 대한 인식은 바뀐다. 김창협은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에 참여하면서,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청나라의 문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이 야만족의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최고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중국 대륙의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천하는 다시 오랑캐가 된지 오래 되었다. 우리 나라는 동쪽 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나 의관 예복을 옛 제도대로 홀로 고치지 않으면서, 마침내 엄연한 소중화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옛날의 중국을 보건대 요순이 삼천년을 다스린 곳이고, 공맹정주가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그런데도 흔히 생각하기를 (청나라 만주족이 지배하게 되어서 중국은 오랑캐의) 우유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모인 곳이어서 다시 살펴볼만한 문화 유산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연경에서 온 문학과 사학의 서적 같은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 속에는 최근의 사람들이 序體·引體·題體·評體가 왕왕 식견이 정밀하고 말이 확실하며 문장이 깊고 넓어서, 우리 동방의 학자나 대가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여 공부하는 학생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하물며 산림에서 연구하는 선비에 있어서랴.”10) 이는 김상헌이나 송시열과는 달리 더 이상 중국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고의 변화를 뜻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자학적인 사고의 폐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자학적인 이념에 따른 통치가 위협받는 것이 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따라서 이들은 더욱 더 배타적으로 주자학적인 이념을 강조한다. 김상헌 계열이 겪었던 대내적 변화란 그들 계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己巳換局11)의 발생과 관련된다. 송시열과 김수흥 김수항의 비타협적이고 극단적인 자기 주장은 자신들의 죽음을 불러왔다. 건강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피를 부르는 당쟁을 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인해 김상헌의 증손자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창협을 비롯한 김씨 형제들은 정계에서 물러나서 북한강 주위에 은거한다. 김창협과 김창흡은 영평의 백운산에 은거하였다. 김창흡은 특히 청계산 설악산 등지를 다니면서 불교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12) 은거는 이미 김상헌 이래로 이 계열의 전형적인 행동 방식이었다. 즉 김상헌은 石室로, 김수증은 춘천의 谷雲으로, 김수흥은 가평으로, 김수항은 영평의 백운산으로 은거하고자 했었다.13) 그러나 이들의 은거는 갑인 예송 이후 일시적인 정치적 실패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되면 그들은 곧 서울로 돌아갔다. 이에 비해 김창협이나 김창흡의 경우는 아예 정치적인 지위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유학마저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여전히 유학 안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직접적으로 관료로서의 정치적인 역할을 하는 대신에 주자학의 이론적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노론의 당색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갑술환국(1694) 이후에 김창협과 김창흡 형제들은 중앙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처사로서 있으면서 소론을 공격하는데 열중하였다. 崔錫鼎이 남인을 등용하자 이에 대하여 반박하고 절교한 것이라든지,14) 李德壽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스승인 박세당을 비판한 것은 이들의 당색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15) 송시열이 윤휴를 이단으로 비판하였듯이, 김창협 형제들은 박세당이 양명학적인 경향을 가졌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김창협이 볼 때 박세당의 『사변록』이 주자의 해석에 반기를 든 것이고, 또 박세당이 당파적으로는 노론을 위협하는 소론 계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변록』에서 주자와 다른 해석을 했다는 것이 그가 양명학자라고 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박세당이 경에 대한 해석을 한 것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하나의 책이 된 것 같아, 메모지에 그치지는 않은 것 같다.16) 설사 그가 주희와 다른 점이 문장 해석이나 훈고 사이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육왕처럼 도학과는 별도의 주장를 세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후학들이 모두 그 풍조를 좋아하여 대체로 주자를 경시하고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즐겨하니 그 해가 자연히 적지 않다. 하물며 이러한 씨앗이 끊이지 않고 뻗어나간다면 어찌 육왕과 같은 무리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알겠는가”17) 김창협은 박세당을 양명학과 연계시키고 있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주자학이 지니는 사변적인 성격을 비판하고 실천 위주의 유학이라는 입장에서 경전을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윤휴의 경전 해석과 같은 이단적인 것으로 지목되었다. 따라서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몬 것 같이 김창협도 박세당을 변파하였다.18) 김상헌 계열은 당쟁에서 주자학을 고수하였다. 주자학은 본체와 현상, 이념과 현실의 일치를 강조하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사고를 이단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주자학은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갈 수 밖에 없다. 결국 김상헌 계열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당파인 노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놓았다. 따라서 노론에 대항하는 남인과 소론은 또 다른 주자학적인 해석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비정통 즉 이단으로 비판된다. 이는 결국 주자학의 경직화가 불러온 결과이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정통 주자학을 고수했기 때문에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론은 승리했고, 바로 경직화된 주자학을 주장했기 때문에 김상헌 계열은 노론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된다. 3) 김상헌 계열과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 성립 송시열은 자신의 주자학적인 신념을 이론적으로 정착시키고, 아울러 주자학을 비판하는 윤휴 등을 배격하기 위하여 『주자대전』에 주석을 하려고 했다.19) 이 때가 갑인 예송(1674)에서 패하고 長鬐로 유배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1차 『주자대전차이』이다.20) “근래 유학의 재액이 극심하여, 『주자대전』의 글이 먼저는 윤휴에 의해 더럽혀진 바가 되었으나, 세상 사람이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따르는 자가 있었다. 대개 사람들이 주자의 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좋아할 줄 모르고, 좋아할 줄 모르기 때문에 괴이한 말에 현혹된다.”21) 송시열은 이 작업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고급 관료였던 김수항에게 힘을 요청한다. 그는 이 작업의 의미를 김상헌 나아가 李珥에게까지 확장한다. 송시열에 따르면 김상헌은 늙어서 80세 이후에도 주희가 편찬한 주돈이의 글(『태극도설』, 『통서』)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송시열은 주희의 정통을 이은 이이의 비문을 지어 달라고 김상헌에게 요청하려 했었다.22) 송시열은 김수항에게 이런 사실을 알림으로써, 이 작업이 김상헌 계열과 밀접히 연관된 것임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이 작업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김수항 역시 이에 동조한다.23) 아울러 그의 형인 김수증과 김수흥도 이 작업에 참여한다. 특히 김수흥은 이를 임금에게 올리어 『주자대전』을 주석하라는 왕명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24) 그리고 송시열은 이 작업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협도 참여시킨다. 김창협은 이미 송시열로부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자신의 1차 작업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하여 수정하지만, 이 작업이 끝나기 전에 김수항과 자신이 죽을 것을 짐작하고 그 일을 김창협에게 당부한다. “일찍이 김수항과 더불어 『주자대전차의』를 고치자고 상의했는데 오늘날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이 일은 권상하에게 부탁했으니 모름지기 함께 상의해서 완성해 주기 바란다는 뜻을 김창협에게 전하라. 이것은 참으로 뜻을 계승하고 일을 이어받는 방법이다.”25) 송시열의 부탁을 받은 김창협은 『주자대전차의』를 완성하는 데 힘을 보탠다. 김창협은 1차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1686년 숙종이 『주자대전차의』를 간행할 것을 명한 뒤에 참여한다. 그는 권상하 이희조등과 공동토의를 통하여 1715년에 교정본 『주자대전차의』를 간행한다. 그 뒤에 별도로 자신의 문목만을 모아 책을 만든다.26) 이것이 바로 『朱子大全箚疑問目』이다. 그리고 이것을 보강한 것이 김매순의 『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송시열이 『주자대전』에 대한 완벽한 주석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안동 김씨 가문에 크게 힘입었고, 결국은 그들에 의하여 이 작업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김상헌 계열의 주자학 김상헌은 주자학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왜냐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학문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소학』만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외근을 나갈 적에 항상 『소학』 한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고27), 그의 자식들에게도 『소학』 공부를 시켰다고 하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소학은 당시의 모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계몽서 정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소학은 일상 행위 규범 속에서 주자학적인 이념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주체성을 기르고자 하는 책이다. 그는 ‘경’을 강조하여 몸가짐의 바름과 올바른 말의 사용에 힘썼다. 송시열은 『소학』에 철저했던 김상헌의 면모야말로 척화론의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선생이 몸소 천하의 기준을 담당하여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그 뿌리를 살펴보면 주희의 『소학』이니, 주희가 논한 ‘진정한 영웅은 반드시 전전 긍긍하기를 깊은 못에 다가간 듯 살얼음을 밟는 듯하였다’는 말이 이에서 더욱 증명된다.”28) 김수항은 김상헌으로부터 『소학』에 나오는 ‘九容’과 ‘四勿’의 가르침을 받고서, 堂에다 ‘九四堂’이란 편액을 걸고 아침저녁으로 반성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김수항의요청에 의해서 <구사당기>를 쓰면서 이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푼다. “지금 이 둘(구용과 사물)은 합하여 하나가 되니, 밖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마음을 다스려, 안과 밖의 수양이 이루어지면 천리가 날로 밝아지고 인욕이 날로 사라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현의 경지로 들어선다.”29) 이는 단순한 가르침에 불과한 것 같지만, 김상헌의 자식들은 이를 자신들의 주체성 확립 방법으로 삼은 것이다. 김수항 자신도 한학교수로서 『소학』을 강의했다.30) 김상헌은 『소학』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예기』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주석을 가하여 책을 썼다. 그것이 『讀禮隨鈔跋』이다. 그는 또한 김장생의 『疑禮問解』에 序를 쓴다. 그는 예야말로 사대부 자신의 행동에서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문부터 엄격히 예를 시행하도록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임진 병자호란 이후 당시 사대부 가문의 일반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주자학의 이론적인 정밀한 연구 이전에 기초적인 질서부터 이룩하겠다는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주자학적 실천의 면모는 이후 그의 가문에 한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론적인 주자학 연구는 다음 세대의 과제로 넘어간다. 김창협과 김창흡은 주자학의 이론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당시 주자학연구는 묵수적인 태도롤 주자학을 연구하여 새로운 문제제기가 없는 상황이었다. 폭넓은 독서를 통한 주자학연구를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주희 이후 의리가 크게 밝아 연구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쉽게 남의 눈을 찌른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주희 뒤에 배우는 자는 장차 졸라매는 것(約)만 있지, 넓게 하는 것(博)은 없는 것인가? 나의 공부가 없으면 나를 볼 수 없다는 또한 누가 말한 것인가? 형(김창협)은 매번 나와 이 말을 하면서, 세상 유자들의 고루함을 애통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31) 김창협은 특히 본원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홀로 생각해 보건데 예부터 성현들이 학문 공부에 대해 논하면서, 본원을 함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 뒤에 도리는 머무를 곳을 가지게 되며 치지와 역행의 일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다만 이 공부가 없었기에 비록 학문에 종사한다고 말해도 듣고 보아 얻은 것이 한 두가지의 머릿속으로만 아는 것에만 그치고, 또한 그저 귀로 들어왔다 입으로 흘러 나가는데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32) 이는 수양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일찍이 생각해보니, 보통사람의 마음은 사욕이 주가 된다. 그러므로 사물을 아직 접하지 않아도 마음은 늘 스스로 어둡고 흔들려서, 비고 고요한 때가 거의 없다. 오직 성인은 그렇지 않다. 바야흐로 사물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이 마음은 진실로 고요하여 일찍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귀신이라도 또한 그 사이를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사태가 이르고 사물이 옴에 미쳐 이치로써 순응하여 조금의 잘못됨도 없고 조금의 막히고 누가 됨도 없어서 그 본체의 비고 고요한 것이 또한 일찍이 본래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성인이 중인과 다른 까닭과 중인이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그 나뉨이 바로 여기에 있다.”33) 주자학의 공부방법론은 성인과 보통사람사이의 단계를 설정하고, 그 단계를 어떻게 점차적으로 밟아 나갈 것인가를 주장한다. 성인에 도달하는 접근 방법으로 개념적 명료성을 주장한다. 리와 기, 미발과 이발, 성과 정등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다. “세상에서 리기는 둘이라고 말하는 자는 처음부터 리의 체를 분명히 보지 못한 것이다. 다만 선배 유학자들이 기는 형체가 있지만 리는 형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기밖에 진실로 어떤 것이 있어 공중에 매달려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말로는 형체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안 것이 실제로 형체가 있는 사물과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종래의 귀로 들은 것이 습관이 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익숙해져, 리가 리된 까닭을 이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참다운 모습에서 마음을 기울여 묵묵히 탐구하여 진실로 ‘형체가 없지만 운동성이 있고 기에 즉하면서도 기가 아닌 신묘함’을 안 적이 없다. 대저 이것은 의리의 정밀한 곳이니, 모름지기 제목으로 삼아 생각해야 하고, 1-20년 체인하는 공부를 쌓아 얻어야지, 결코 한 때의 남의 견해를 답습하거나 보고 들은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34) 여기서 ‘형체가 없지만 운동성이 있고, 기에 즉하면서도 기가 아닌 신묘함’란 리를 가리킨다. 김창협은 리를 ‘운동성이 없는 것’(無爲)으로 보는 율곡학파의 기본 입장에서 벗어나 리를 ‘운동성이 있는 것’(有爲)으로 파악한다. 김창협은 이이가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켜 중절 부중절로 나누고, 도심과 인심을 기의 청탁으로 구분하는 것을 비판한다.35)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경우나, 아버지를 죽이고자 할 때,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구하거나 원수로 삼는다. 이러한 상황은 천리가 모두 진심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서, 그만 둘 수 없는 곳이다. 이이가 이것을 저절로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기가 발동하여 리가 타는 것이라는 원칙에 국한되어, 맑은 기가 발동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리의 본 모습이나 성선을 약화시키는 것이다.36) 김창협은 율곡학파의 종지인 기발리승(氣發理乘)을 부정하지 않지만, 사단이나 도심의 경우 기가 발동하지만 기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7) 따라서 그는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리의 주재성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사단이나 도심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리가 발현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점은 리의 직접적인 작용을 중시하는 점에서 이황과 같다. 38) 김창협이 리기론에서 리를 중요시하여 개념규정을 새롭게 하는 것은, 심성론에서 성(性)과 지(智)의 개념규정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그는 ‘智와 知覺의 관계 문제’, ‘人物性 同異 문제’ 등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가 한국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주희는 모순된 발언을 한다. 먼저 ‘지와 지각의 관계 문제’에 대해, 주희는 지각이 지의 작용이기도 하면서, 또한 지의 작용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각은 우선 원래 마음의 작용으로 대상과 관계하는 직접적인 감각적 인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시비를 분별하는 본성의 이성적인 작용과는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지각은 본성의 작용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각은 마음의 작용이기는 하지만 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의 현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지각은 지의 작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상반된 진술에 대하여 김창협과 김창흡,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전자의 견지에 선다.39) ‘인물성 동이 문제’에 대해서, 주희는 『중용장구』에서는 사람과 사람 이외존재의 본성은 같다고 하였다. 이 경우 본성의 동일성 내지 보편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다. 그러나 또 주희는 『맹자집주』에서는 사람과 사람 이외 존재의 본성이 다르다고 하였다. 사람과 사람 이외 존재가 같은 것은 보편적인 이치 때문이고, 본성은 각각의 존재가 성립된 이후에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에서, 김창협과 김창흡은 전자를 주장한다. 김창협은 처음에는 후자를 주장했지만, 나중에 박세당을 비판하면서, 전자를 주장한다. 인물성 동론이 김창협의 만년정론인 셈이다. 이러한 지와 지각의 분리, 인물성 동론등의 문제에 대해서 한원진을 비롯한 호론의 학자들이 김창협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호락논쟁이 시작되었다. 종래 호락논쟁은 권상하계열의 학자들 중 이간과 한원진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는 김창협과 한원진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대립이 곧 낙론과 호론의 인물성논쟁이다. 김창협은 지각에서 본성의 분리를 강조하고, 지각은 단순히 본성과 감정을 매개하는 역할을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지각의 역할을 축소하고, 본성에 대한 공부를 강조한다. 반면에 한원진은 지각과 본성의 분리가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각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의 역할을 강조하면 호남학이나 아니면 양명학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각의 기능이 마음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은 곧 본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본성(리)은 마음(기)속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낙론과 호론의 차이는 기의 문제에서 드러난다. 낙론에서는 마음의 기[心氣]를 중시함으로써, 본성에 대한 공부를 강조하고, 그리하여 본성이 같다고 하는 인물성 동론을 주장한다. 호론에서는 형체의 기[形氣]를 강조함으로써, 인물의 차이를 주장하고, 그리하여 본성이 다르다고 하는 인물성 이론을 주장한다.40) 인물성 동이 논쟁은 각각 주희의 말에 전거를 두고 있다. 주희가 이렇게 모순된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주희 자신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론적인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주희는 각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 주체성을 기르느냐 하는 수양론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실천적인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김창협과 김창흡은 이런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주자학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김창협과 김창흡은 지와 지각의 관계 문제나 인물성 동이 문제를 통해서, 감각적인 지각을 떠난 시비 판단을 분명히 하고, 인물성이 차이가 나는 기질을 극복하여 본성을 확립함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을 완성하려는 것에 이들의 의도와 초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자학적인 관심은 ‘보편성’이라는 것을 확보하려는 것에 있었다.41) 5) 김상헌 계열의 교육-석실서원 김상헌부터 김수흥까지의 교육은 가학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김상헌이 석실에서 많은 내방객을 받았지만, 체계적인 교육은 아니었다. 그 당시 석실을 방문하였던 학자들은 김육 김익희, 박세체, 송시열, 유계, 윤문거, 윤선거, 이경석, 이경여, 이식, 최명길등 당대 학자들이었다. 김상헌 사후 김상용과 김상헌을 모시는 묘우와 재실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동재와 서재도 함께 건립되었다. 석실서원은 효종 5(1654)년에 시작하여 효종 7(1656)년에 완성되었다. 그 뒤 현종 4년(1663) 사액서원이 되었다.42) 김창협과 김창흡, 김원행, 김리안등은 석실서원의 강학을 주도하였다. 원래 석실서원은 석실에 있었지만, 김창협 이후 미음으로 옮겨진다. 김창협은 태학에서 대사성을 지냈다. 이 때 태학생들은 대사성을 정치적인 지위로 여기고 있어서 그와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창협은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진지하게 강학의 정신을 설파하고 있다. “저는 당치도 않게 이 직무를 함부로 더럽히게 되었으나 사직하고 체직되지 못하고 스승의 자리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건대 지리멸렬하고 가볍고 천박하여 여러 선비들에게 모범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간곡한 뜻은 다만 매일같이 학궁에 있으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여러 학생과 더불어 서로 만나서 이야기거리가 있으면 서로 대화하고 의문이 있으면 서로 토론하며 잘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장려하고 잘못된 것을 들으면 반드시 훈계하여 아모쪼록 정과 뜻을 미쁘게 하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 자라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국가에서 사명을 맡긴 뜻에 걸맞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질병과 우환이 장애가 되어 몸소 온 것이 몇 번 되지 않아서 간혹 열흘에 한 번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학생들은 또한 저를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고 직접 만나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온종일 자리에 기대고 있어도 한 사람도 강론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여러 학생들이 읽는 책은 진실로 모두 성현이 남긴 책입니다. 비록 노래로 만들어 암송하더라도 뜻을 다하여 탐구하고 음미하여 의리의 정수를 끝까지 추구할 겨를이 없다면 글의 의미를 풀이하고 설명하는 사이에 어찌 한 두 가지 의심나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기꺼이 강구하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여기에 나온 사람조차도 비록 서로 일러주려 하나 누가 기꺼이 듣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원컨대 전철을 고치기 바랍니다. 진실로 제가 오는 날에 여러 학생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재실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각자 읽은 책을 들고 스스로 와서 만나기를 구하여 의심나는 곳을 따라 서로 강구하고 반복하기를 거리끼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한갓 스승과 학생간의 허례허식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성실한 마음으로 유익함을 구한다면 아마도 서로 오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며 혹 조금이나마 서로 성장하는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43) 스승과 제자사이의 허물없는 관계를 만들고자하는 강학의 정신이 석실서원을 이끌었던 것이다. 김창협이 주도하는 석실의 강학분위를 김창흡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가형(김창협)이 여러 학생들과 강론할 때, 비록 새로 온 학생이라도 그 마음이 선을 지향하면 반드시 뜻을 다하여 알려주고, 종일 피곤할 줄 몰랐다. 어떤 경우 친구가 찾아와도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이희조가 하루는 내방을 하였는데, 김창협은 옆의 원생과 경전을 논하였기 때문에, 인사말 외에는 다른 말이 없었다. 이희조는 쓸쓸하게 돌아갔다.”44) 그런데 김창협이나 김창흡의 강학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하였다. 서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활동이 아니라 개인적인 세미나 수준이었다45). 김원행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들의 활동이 한계가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옛 사람이 스승을 구하는 데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지금 사람은 이와 같은 적이 없다. 어떤 경우는 한 집안 안에서, 어떤 경우는 친인척의 집에서, 어떤 경우는 그의 명망이 소문나 서로 익숙한 곳에서, 스승을 구한다. 만약 독서하고 몸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루어서 존중하니, 다른 사람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고루한 곳이다.”46) 석실서원의 본격적인 위상정립은 김원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김원행은 「석실서원강규」(石室書院講規), 「석실서원학규」(石室書院學規), 「유석실서원강생」(諭石室書院講生)을 지을 정도로 석실서원의 틀을 만들었다. 김원행의 문인은 거의 전국에 걸쳐 있었다.47) 이들의 활동은 단순히 당파성의 확장이라기보다는 학문적 활동의 확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원행의 「유석실서원강생」에는 그의 교육관이 잘 드러나 있다. 김원행은 먼저 서원이 강학을 위한 곳임을 주장한다. “서원은 본래 강학을 위해 설립한 곳이다. 선비가 강학을 하지 않으면 사대부라고 일컬을 수 없다. 우리 고을에는 이 서원이 있어 실로 이 고을 사대부에게 큰 다행이지만, 강학의 일은 쓸쓸하여 이름이 아니 않으니 사대부의 수치이다. 이에 다행히도 유림의 의논으로 강학이 이루어지니 배우는 일에서 매우 성대한 거사이다.”48) 그런데 그는 서원에서 강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는 강학은 자신의 안[본성]에 근거한 철학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밖[외물]에 근거한 훈고학적인 이해나 외우는 것이 주가 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러나 선비가 강학에 열심히 하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원래 있는 바를 구하여 진실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있을 뿐이다. 만일 혹 그렇지 않다면 장구에만 오로지 하거나, 외우는 것만을 공부하여 그 속에서 얻는 바가 없고, 밖에서 아름다움을 구하니 유학의 도적이다. 무엇을 강학에서 취한 것인가?”49) 김원행은 강학이 도덕규범(리)를 실천해야 하고, 특히 그 리의 모범인 성인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 성인은 자신과 다른 존재가 아님을 맹자와 성간의 말을 인용한다. “맹자는 말하였다. ‘성인과 나는 같은 류이다.’ 안연이 말하였다.‘순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힘써 하는 사람은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성간(成간)은 말하였다. ‘저 사람은 장부이다. 나도 장부이다. 내가 어찌 저 사람을 두려워하랴! 저 사람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어찌 고의로 고담준론을 하여 사람을 유혹하고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인가?’”50) 김원행은 성인과 자신이 동류임을 인물성 동론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진실로 이 성은 같으니, 조금의 차이도 없음을 본 것이다. 아! 내 몸은 이미 성인과 같으니, 천하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하여, 어느 것이 이 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포기하는데 안주하여 돌이킬 줄 모르는구나!”51) 맹자는 도덕성 회복을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김원행은 본성으로 설명한다. 맹자는 마음의 기능인 사유에 초점을 두어,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반면에 김원행은 본성을 찾기 위해서는 강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복하는방법을 구한다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단서는 강학에 있다.”52) 강학은 실천과 상호작용한다. 강학을 통해 실천으로 연결되고, 실천은 강학을 통해 더욱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강학이 귀한 까닭은 역행 실천에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독서 궁리하여 그 앎을 열지 않는다면, 원래 그 선이 고유한 바를 알아서 역행의 근본으로 삼을 수 없다. 그리고 비록 알더라도 행하는데 힘쓰지 않으면 밝힌 바 또한 자기 것이 되지 않고, 그 본성을 회복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자사는 ‘尊德性而道問學’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역행은 존덕성을 말하는 것이고, 궁리는 도문학의 일을 말한다. 대저 성인이 되고자 하지만 덕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진실로 성인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덕성을 높이지만 묻고 배움으로 이끌지 않으면 그 효과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이 강학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53) 그런데 김원행이 강조한 역행과 궁리, 존덕성과 도문학의 상호작용은 주자학에서 공통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것은 서원이라고 하는 장소이다. 서원도 이황이래로 특별한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원행 당시의 서원은 이황의 서원과는 다른 측면을 가진다. 이황의 도산서원이 개인적인 수양을 통한 인격완성에 있다면, 김원행의 석실서원은 개인적인 공부보다는 집단적인 동료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자학에서 독서와 강학은 리를 궁구하는 방법이다. 이는 개인적인 공부라기 보다는 집단적인 공부라고 할 것이다.54) 한 집단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개체라고 하는 의식이 들어온다. 내면적인 자신의 정신을 경건하게 하는 방식은 타인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희의 문집을 읽고 해석하고 주석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지는 거경공부는 개인을 넘어서는 자리이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서 석실서원은 정치적 위상뿐만이 아니라 학문적 위상을 정립해 나갔다. 이 경우 경공부와 궁리공부는 개인의 주체적인 공부라는 측면보다는 집단적인 공부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적 유대감을 수반한다. 그 경우 본성을 함양한다는 것보다는 기본적으로 경과 궁리라는 공통된 예식이 강조가 되고, 따라서 같이 그런 경건한 의식에 참여했다는 공통된 기억이 중요하게 된다. 따라서 학파적 동질성이 내면에 침잠되게 된다. 이러한 공부론은 개인의 역할보다는 집단을 중시함으로써, 반성적 자기를 확립할 수 있는 여지를 없게 만든다. 3. 결론 김상헌 계열의 학문과 교육의 주된 대상은 주자학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주자학이외를 연구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과는 달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상헌 계열의 주자학연구는 기존의 주자학 연구는 공부론을 이상과 현실의 단계를 촘촘히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들로부터 논쟁이 시작된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들의 교육은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이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학문적 연구에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요인은 당파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지는 의의가 될 것이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인물성 동이론을 비롯한 논쟁들은 공부론에서 출발하여 이론적 정치함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정합적인 논리에만 매몰되어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정치적 대립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이들의 공부론도 개인보다는 학파적 동질성에 매몰되게 되었다. 이것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론체계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 때문에 주자학은 경화된 체계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화된 주자학도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고, 문학에 주도권을 넘겨준 것이 이들의 한계였던 것이다. 1) 『농암집』별집 권4 20a. 正祖嘗諭近臣曰, 文谷無忝闕祖, 而夢窩之忠節, 農淵之經術文章, 老圃澤之聯芳趾美, 古今罕有, 諸家不及. 2) 그림에 대한 김상헌의 관심은 매우 컸다. 특히 금강산을 그린 그림을 놓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의 돌 하나 물 한 줄기도 저 붓에 기탁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치 화가가 대상을 만나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르지 않고도 발로 밟게 함이 어찌 그리 풍부한가” (<<청음집>>, 권39, 題李學士子時遊楓岳錄, 3a) 이는 후대의 진경 산수화 출현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3) 『청음선생문집』 권38, 群玉所記에는 김상헌이 소유한 印章에 관한 설명이 있다. 4) 『농암전집』 권35 연보 5a 宋先生······貽書議政公, 기加稱獎曰, 幾乎作橘頌也. 盖橘頌有年歲雖小, 可師長兮之語故云. 5) 같은 책, 같은 곳 宋先生指先生, 而笑謂曰昔趙掌令涑李延平貴, 每相與憂時, 而又戱笑曰, 白嶽王氣尙未盡也. 國勢胡至於斯耶. 其後士風果復振矣. 今見此君必非汨沒者也. 無乃他日士類有復起之事乎. 6) 그는 30세 때 낙송루라는 정자를 짓고 詩社를 형성한다. 그 중에는 洪世態(1653-1725)와 같은 중인도 포함되어 있다. 7) 『退憂堂文集』 권9, 2b, 上尤齋. 『文谷集』 권27, 4a, 上尤齋. 8) 『송자대전』 권182 文谷金公墓誌銘 公矜余才弱敵强, 時有營救之言, 時輩之不悅於公, 於是尤甚. 9) 『농암집』 권25, 잡저, 審敵篇 26ab 10) 『농암집』, 권22, 贈黃敬之赴燕序, 22ab 今天下復爲左袵久矣. 我東僻在一隅, 獨不改衣冠禮樂之舊, 遂嚴然以小中華自居, 而視古赤縣神州, 堯舜三千之所治孔孟程朱之所敎之地與民. 槪以爲湩酪腥羶之聚而無復有文獻之可徵則過矣.······若其文史書籍自燕來者, 余見之多矣. 其中亦頗有近時人士所爲, 序引題評往往識精語確, 辭致淵博, 類非吾東方宿學老師所能及. 此不過場屋間學究秀才耳. 而猶如此, 況於山林講學之士乎. 11) 기사환국은 1689년 元子의 名號를 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이 중심이 되어 노론과 소론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한 사화이다. 2월 4일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고, 2월 12일에는 김수항과 김수흥이 각각 진도와 장기에 안치되었으며, 3월 18일에 이이와 성혼이 문묘에서 출향되고, 윤 3월 7일에는 이사명이 참형되었다. 다시 3월 28일에는 김수항이 진도에서 사사되고, 4월 22일에는 김수증의 손녀인 김숙의가 폐출되었으며, 5월 2일에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드디어 6월 8일에는 송시열이 사사되었다. 12) 김창흡은 김창집의 비판을 받고 다시 유학으로 돌아섰다. 13) 『文谷集』 권5, 시, 9b 伯氏旣棲遯壽春之谷雲, 而仲氏方營토裘於嘉陵江上. 余之小築在洞陰白雲山下. 14) 『삼연집』 권22 與崔相 15) 같은 책, 같은 곳 與李德壽. 16) 이것은 당시 “사변록이 간행되지 않은 개인의 메모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주희를 욕보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소론 측의 伸辨疏에 대한 반박이다. 17) 『농암집』 권16, 답박대숙, 2ab 18) 『사변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있자, 숙종이 권상유(권상하의 동생)에게 그것을 변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권상유가 이를 김창협에게 문의하였고, 김창협이 그 변파문을 고쳐 주었다. 권상유의 변파문은 보이지 않고 김창협의 변파문만 남아 있다. 19) 이 주석은 다른 한편으로 李滉의 『朱子書節要』, 鄭經世의 『朱文酌海』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당파적 경쟁심도 있다. 20) 송시열은 1678년에 『주자대전차의』와 『程書分類』를 완성하고 1년뒤인 1679년에 『朱子語類小分』을 완성한다. 21) 『송자대전』 권139, 朱子大全箚疑序 43b 比來斯文之厄極矣. 大全文字先爲黑水所汚衊, 而世人不以爲怪, 而反有信從者. 蓋世人不知故不好, 不好故皆爲異言所汨亂也. 22) 같은 책, 같은 곳 先生嘗以朱子所註周子書, 講論於八十歲之後, 則可謂好之篤而老而不衰者歟, 蓋栗谷先生之學, 專主於考亭, 而其沒後碑文諸意欲屬之文正, 則其所學所尙, 因亦可想矣. 23) 김수항은 『주자문집』뿐만 아니라, 『주자어류』도 요약하여 주석할 것을 권한다. 『문곡집』, 권27, 8ab, 上尤齋 24) 『송자대전』 권88 답권치도 32a 25) 『송자대전』 부록 권11 연보 25b 大全箚疑曾與文谷相議證訂矣, 事今至此已. 託在致道所須相與共成之意傳之和, 令此誠繼志述事之道也. 26) 김창협이 『주자대전차의』에 실리지 않은 글을 모아서 편찬한 것이 『주자대전차의문목』이다. (農巖錄其商量添削之說, 謂之問目, 送於遂庵, 其不見採入於箚疑中者, 別爲一書, 行於世. 『주자대전차의輯補』 諸家箚註書目) 그러나 또다른 주장은 『주자대전차의』를 간행할 때, 김창협이 자신의 연구 업적을 내놓지 않아, 권상하 등과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農巖所修書卷, 其家不欲幷刊, 藏而不出, 故黃江及宋景徽諸人, 頗不快, 遂以尤翁初本印行, 此豈農巖之意也. 『觀我齋集』 漫錄) 27) 『청음유집』 권9 國朝名臣言行錄 淸陰嘗言, 以巡按御史在端川時, 有禀定於朝廷者, 往往幾成數月, 旁無所帶書冊, 只得小學一本, 遂端坐而讀之, 幾三百餘篇. 28) 『송자대전』 권182, 문곡김공묘지명 老先生身任天下綱常, 名聞華夷, 第考其根基, 則文公小學也. 文公論眞正大英雄, 必以戰兢臨屨爲言者, 益驗焉. 29) 『송자대전』 권142 九思堂記 25b 今以此二者合二爲一, 外以治身, 內以治心, 內外交養, 無所間斷, 則天理日明人欲日消, 忽不自知其入於聖賢之域矣. 30) 『문곡집』, 文谷年譜, 上, 11a. 31) 『삼연집』 권32 2ab 32) 『농암집』 권13 41b. 33) ꡔ농암집ꡕ권19 9b. 竊嘗思之, 常人之心, 私欲爲主. 故雖其未與物接, 而方寸常自昏擾, 絶少虛靜時節. 惟聖人不然. 方其事物未至, 此心固寂然, 未嘗妄動. 雖鬼神, 亦有不得窺其際者矣. 及事至物來, 以理順應, 無少流失, 無少滯累. 則其本體之虛靜者, 又未嘗不自若也. 聖人之所以異於衆人, 衆人之所以不及聖人, 其分正在於此. 34) ꡔ농암집ꡕ, 권32 15ㄴ世言理氣二物者, 初未必灼見理體. 只見先儒說氣有形而理無形, 遂~認於氣外眞有一物, 懸空自運爾. 是則口中雖說無形, 而心裏所見, 實無以別於有形之物矣. 但以從來耳聞得慣, 口說得熟, 故便謂 理之所以爲理, 不過如此, 而不曾於實體處, 潛玩黙究, 眞見其無形有爲卽氣非氣之妙. 大抵此是義理至精微處. 要須做題目入思議, 積一二十年體認之功, 而得之, 決非一時承襲見聞之所能及也 35) ꡔ농암집ꡕ 속집 권하 70ㄴ-71ㄱ. 栗谷之說, 卽一人之心而分淸濁二岐, 以爲善惡之別也. 吾之說, 就衆人之禀而較淸濁分數, 以爲善惡之差也. 二說者相似而實不同也. 今且以中人言之. 其所禀之氣, 淸濁蓋易相半矣. 然所謂相半者, 不是淸在一邊, 濁在一邊. 乃所謂其不甚淸, 亦不甚濁耳. 不甚淸, 故所發不能皆善. 不甚濁, 故所發不能皆惡, 於是乎隨其所感之輕重與淸濁之分數.相爲勝負, 而善惡分焉. 所謂輕重者, 向吾只以天理一邊言之矣. 今更以外誘對說, 當益明備, 如所感者, 天理之重, 而濁氣分數, 不足以勝之, 則其發爲善情, 所感者外誘之重, 而淸氣分數, 不足以勝之, 則其發爲惡情. 此善惡之所由分也. 36)『농암집ꡕ 속집 권하 69ㄱㄴ. 自中人以下, 其氣固多濁少淸. 然見孺子入井未有不怵惕惻隱者, 此豈皆淸氣之發哉. 若曰安知此時不適値其氣之淸也. 則他日見此, 宜亦有不惻隱之時矣. 然而每見輒惻隱, 雖一日十見, 亦無不測隱. 是豈每與淸氣相邂逅哉. 盖天理之根於性者, 隨感輒發. 雖所乘之氣濁而不淸, 而亦佛爲其所掩耳. 然此且以常人言耳. 至於頑愚之甚, 平日所爲. 至無道者, 猝見人欲害其親, 則亦必勃然而怒, 思所以仇之. 彼其方寸之內, 濁氣充塞, 豈復有一分淸明之氣, 特以父子之愛, 於天性最重. 故到急切處, 不覺眞心發出, 於此可以見人性之善. 於此可以見天理之不容已. 此豈可曰淸氣之所爲哉. … 今若以善惡之情, 一歸之於氣之淸濁, 則恐無以見理之實體而性之爲善也. 37) ꡔ농암집ꡕ 속집 권하 65ㄴ. 所謂不干氣事者, 非謂四端無氣自動也. 言其說時, 不夾帶此氣耳. 38) 이러한 측면이 김창협을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에도 소속하지 않는 절충파로 분류하는 이유이다.(다카하시 도오루/조남호역, 『조선의 유학』, 소나무, 1999) 그러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김창협은 율곡학파 계열에 속한다. 39)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조남호, 김창협 학파의 양명학 비판, 『철학』 제39집. 40) 문석윤, 『조선후기 호락논변의 성립사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5. 41) 인물성 동론이 실학 특히 북학파와 연결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격물을 통해 과학적인 사고로 나갈 수 있는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격물론은 함양과 연결되지, 과학적인 사고로 연결되지 않는다. 42) 조준호, 조선후기 석실서원의 위상과 학풍, 『조선시대학보』11, 70쪽 참조. 43) 『농암집』권26 4b 僕以無似, 猥忝是職, 辭避不獲, 抗顔師席, 自惟蔑裂輕淺, 不足以矜式多士, 區區之志, 但欲日處學宮, 蚤夜與諸生相見, 有話相告, 有疑相討, 見善必獎, 聞過必戒, 庶使情志孚洽, 敎學相長, 以少稱國家任使之意, 而顧爲疾病憂患所錮, 不得數以身來處, 其或旬日一至, 則諸生又視爲過客, 無意親就, 終日倚席, 絶無一人聽講, 竊惟諸生所讀, 固皆聖賢幽棲, 雖拘於記誦帖括, 不睱悉意探玩, 以究極理義之精蘊, 卽其文義訓說之間, 豈無一二可疑者, 而亦不肯講問, 况進於此者, 雖欲相告語, 其誰肯聽之, 自今以後, 願改前轍, 苟僕來過之日, 諸生無論上下, 齋人各持所讀書, 自來求見, 隨疑相講, 不憚反復, 無徒以師生虛禮爲拘, 而一主於誠心求益, 則庶不至於莫往莫來而或不無一分相長之益矣. 44) 『삼연집 습유』 권31 21ab 家兄與諸生講論, 雖新學後生, 其心向善則必極意敎告. 終日不知疲. 或親友來訪而不交一語. 同甫一日來訪, 家兄邊院生論經, 故寒暄之外, 更無他語. 同甫悵然而返. 45) 대체로 8내지 9인이 모여 강학하는 수준이었다. 46) 『삼연집』 습유 권31 41b 古人之求師也. 或遍歷四方, 今人不曾如此. 或一家之內, 或連姻之家, 或其他聲聞相熟處, 若有讀書飭躬之人, 則便推而尊之, 更不知有他人. 此亦陋處. 47) 황해도의 任保․ 任侃, 평안도의 姜坰, 鮮于恪, 함경도의 朱季章, 경기도 개성의 趙有善․ 趙有憲, 전라도의 황윤석, 洪克之, 경상도의 周必南(주세붕의 후손), 姜澣, 鄭東述(정구의 후손)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김원행의 사후 언행록 편찬시 각 도별로 유사를 정해 작업을 진행하였다. 48) 미호집 권14 24b-25a 書院本爲講學而設, 士不講學, 不足謂之士矣. 夫吾鄕之之有是書院, 實吾鄕之士之大幸也. 而講學之事, 寥寥乎無聞則士之恥也. 乃者幸因儒林之議, 得見講學之事, 則甚盛擧也. 49) 같은 책, 같은 곳. 然士之所以汲汲於講學, 果欲以何爲耶. 將以求吾之所固有, 而誠有益於己而已. 苟或不然, 而惟章句之爲專, 誦說之爲工, 無所得於其中, 而求以觀美於其外, 則是乃儒之賊耳, 何取於講學耶. 50) 같은 책, 같은 곳. 孟子曰, 聖人與我同類者, 顔淵曰, 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成覵曰, 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彼爲此說者, 豈故爲是大談高論, 以誘人而爲善也. 51) 같은 책, 같은 곳. 誠有見乎此性之一同而無少差也. 嗚呼! 吾之身, 旣有與聖人同者, 則天下之可貴可重, 孰有大於此者? 而尙可以安於暴棄而莫之反乎. 52) 같은 책, 같은 곳. 求其所以復之, 則無他焉. 其端在於講學. 53) 같은 책, 같은 곳. 所貴乎講學者, 將不在於力行而以踐其實耶. 蓋非讀書窮理, 53) 같은 책, 같은 곳. 所貴乎講學者, 將不在於力行而以踐其實耶. 蓋非讀書窮理, 以開其識, 則固無以知其性之所固有, 以爲力行之本, 而雖知之而行之不力, 則所明又非己有, 而亦不足以復其性矣. 故子思之言曰, 尊德性而道問學, 蓋力行者, 尊德性之謂也. 窮理者, 道問學之事也. 夫欲做聖人而不尊德性, 固不能有所至, 而欲尊德性而不道夫問學, 亦無以成其功, 此君子所以貴於講學也. 54) 서원강학은 매달 16일에 개최되었고, 그 순서는 강서의 장소 배정, 임강 및 배강, 의목상달 및 토론, 백록동규(주희)와 이이의 학교모범읽기, 파강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강회의 규모는 한번에 10-20이 참석하였고, 파강후 강회록을 갖추어 원장에게 보내었다. |
출처 : 無俗軒
글쓴이 : 八玉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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