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마음일까?

추읍산 2015. 8. 23. 12:13
안내하는 글은 문곡[文谷 金壽恒. 1626-1690. 시호 : 文忠) 1)]께서 기사환국으로 진도로 유배되고 후명(後名 : 예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을 듣고부터 5일간 가족과의 나눈 대화입니다. 이를 셋째 아들 휘 창흡께서 기록하였는데 이를 가문에서 한글로 필사, 네려오던 것 중 하나로 현 안동 김씨 대종중 회장이신 김위현 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다가 최근 알아듣기 쉽게 편역하셨고「기사유교」라는 책으로 선보였습니다.


문곡께서는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소생 윤(昀)을 원자로 책봉함에 있어 반대한 서인 측이었습니다. 기사년(1689년)에 숙종의 어명으로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던 중 남인의 탄핵으로 진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3월 28일 사사되었습니다. 이때의 사건을 가리켜 기사환국 2) 또는 기사사화라고 하며 100여 명의 서인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 당하였습니다. 이로써 인현왕후 민씨는 폐위되어 사저로 쫓겨났고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문곡, 일묘사충(一廟四忠)의 기초를 쌓으시다.
 
문곡-몽와-죽취-취백헌은 문곡을 처음으로 대를 이은 장손 계통이십니다. 문곡께서는 청음( 휘 상헌)의 셋째 손자이시고 필자의 11대조이십니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문곡(휘 수항)께서, 경종 때 신임사화로 몽와(휘 창집), 죽취(휘 제 겸), 취백헌(필자의 8대조 휘 달행의 큰 형님으로 휘 성행)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화를 당하셨습니다. 피눈물이 흐르는 문중사로 후일 모두 복권되고 조선조 유일의 일묘사충이 되었습니다. 김위현님 께서는 문곡 후대의 유교도 함께 보관하고 계시는데 편역하시겠다는 소망이십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숙종의 환국정치는 피눈물을 수반해 그 바탕에는 장희빈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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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문곡(文谷 金壽恒. 1626-1690. 시호 : 文忠) 아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9587
 
2) 기사환국 ; 아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8266 
 
아랫 사진은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의 일묘사충 정려각

 

 

 

문곡 초상화로 출처는 문족문화대백과 사전입니다.

 

남양주시 이패동의 문곡 묘역

 

김위현교수의 편역 기사유교의 해제 편

 

 

김위현교수의 편역 기사유사 2

 

김위현교수의 편역 기사유사 3

 

김위현교수의 편역 기사유교 12

 

김위현교수의 편역 기사유교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