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생각해 봅시다

범초(範初) 절벽을 넘다

추읍산 2017. 10. 28. 07:16

『  본 글에서 이미지 출처 : 2,000년 발행 안길정의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上卷 표지와 앞 부분 두 곳 그리고 15~19쪽이고 끝부분 족보는 안동김씨 1982년판 임술보』

 

위 책「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에서 관련부분과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되살리며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 나는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부분적이긴 하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왔다. 되살리면 어느 때인가 [역사기록을 종합해 보면 1866년(고종 3년) 일 것으로 생각한다.]? 집권한 흥선 대원군(李昰應이 1820~1898 )이 春山 [諱 弘根 1788(정조 12)∼1842(헌종 8). 高祖 諱 炳㴤의 生父)] 할아버지의 묏자리(墓所)를 빼앗으려 하였다(왜? 그래야만 했는지 근원을 듣지 못했는데 단순히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조할아버지[병주(諱 炳㴤1827-1887, 자 範初 | 호 小山)]께서는 이른 새벽에 운현궁을 찾아 나서셨다. 아직 기침 전, 곧장 침실로 향했다. 물론 절차는 밟으셨단다.

 

뜸 흥선 대원군을 타고 앉았고 칼로 겨누니 담대하고 강인한 흥선대원군이 경각에 달렸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 범초야 살려 다우. 없던 일로 하겠다. 식은땀이 났으리라. 약속을 받은 고조할아버지 범초, 그리고 부복했다. 그 절의(節義)가 놀랍다. 무서운 놈이야! 무서운 놈 ~ 외쳤을 흥선 대원군은 어떻을까? 두 분, 천 길, 만 길 매달렸는데 한 가닥 구명줄을 타고 올라왔음은 서로의 理性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웠을 것이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리고 세도정치 타파라는 긍정적 이미지 속 묻혀갔다. 150년 이란 공간을 넘은 지금 이 놀랄만한 내용이 담긴 책자가 2,000년에 나왔다는데 이제야 알았고 차츰 알려질 것이다. 제가 지금까지 침묵했음은 파고를 감당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高祖[諱 병주(炳㴤)]께서는 고종 재위 내내 출사를 계속하셨는데 신임까지 더해 이는 고종실록을 비롯한 그때의 흔적으로 알 수 있다. 비중은 높아만 갔고 정이품에서 종일품까지 오른 할아버지는 1887년(고종 24) 卒 하셨는데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은 김병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범초(範初).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의 아들로 이조판서 김유근(金逌根)에게 입양되었다. 양아버지인 김유근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이다. 이에 따라 안동김씨 세도가의 핵심적인 인물의 하나로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51년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49년(철종 즉위년) 예문관검열, 1852년 홍문관수찬, 1853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 1856년 성균관대사성, 1857년 홍문관부제학, 1858년 규장각직제학, 1859년부터 1863년까지 예문관제학·대사헌·이조참판·도승지·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경상도관찰사·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863년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한 이후 안동김씨 일문의 위세가 꺾였으나, 그뒤에도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주요관직을 계속해서 맡았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생활사』 上卷

 

 

철종(哲宗, 1831~1863, 재위1849~1863) 때 라고 하였다. 삼정의 문란, 매관매직 부정할 수 없는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러나 글 속 부풀려진 느낌이 강하게 다가옴은 관련 후손이라서 일까? 영은 부원근 김문근, 하옥 김좌근(영의정), 유관 김흥근이(영의정) 그때의 안동김씨 세도 중심인물이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했다. 안동김씨의 위세는 여전했고 흥선 대원군은 왕실을 드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고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헐었다. 기세를 잡은 후 김씨들을 때려잡으려 했다는데 주체만 달라졌을 뿐 주요(主要) 정이품(판서급) 이상의 출사 면면을 살피건대 이어지고 더 중히 쓰였음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고종 때 급제자는 36인으로 역대 최고조에 이르렀다.

 

 

풍덕은 1823년(순조 23)에 개성에 병합되었다. 잘못된 년대 계산을 하고 있다.

맞지 않지만, 철종 때를 배경으로 하고 이어지는데 읽어보자. 풍수를 통해 발복을 바람은 시대와 사이를 뛰어넘었는가 보다. 그럴듯한 글인데 유택을 생전에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다. 철종 때에 세도로 유명한 정승급은 아래 세 분이고 金弘根[1788(정조 12)∼1842(헌종 8)]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김문근[諱 汶根 1801(순조 1)∼1863(철종 14)]은 묘역이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고 찬성공(諱 達行) 문중이 아니라서 작자의 의도와 관련 없어 보인다. 김좌근[諱 左根으로 諱 弘根의 從弟, 1797(정조 21)∼1869(고종 6)]은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소일 마을이 묘역이고 김흥근[(諱 興根으로 諱 弘根의 親弟, 1796년 ~ 1870년)]은 영평(포천) 일동면 기산리 소얏골이다.

 

김홍근(諱 弘根)과 형제지간임을 감안하더라도 풍덕이 개성에 병합된 1823년(순조 23)에는 네 분(汶根, 左根, 興根, 弘根) 모두 출사 전이고 그럴만한 위치도 아니다.

 

풍덕이 개성에 병합된 1823년(순조 23)은 영안 부원군(諱 祖淳)께서 순조 임금님를 보필하던 시기인데 올곧은 분이시고 또한, 핵심인 정이품 이상 문중 분 깨끗하였음은 조선왕조실록과 인명사전이 입증한다. 안동김씨 면면을 살피건대 忠孝와 학문으로 다져진 문풍은 숙종과 영,정조대를 거쳐오면서 우뚝했고 정이품 이상 분 많아 순조대에도 이어져 왔음인데 이전보다 많다고 할 수 없다.

 

김조순(諱 祖淳) 후대에 전개된 세도정치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 기반이 이전에 형성된 안동김씨 名望과 순조 임금님을 바로 보필한 忠心이 역설적인 기반으로 작용했다면 슬프다. 여기에다 유약하고 단명한 임금과 맛 물린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김조순이 후대까지 예측하여 바로 세우지 못했음은 아프지만, 그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한 달 후도 예측이 어렵거늘 후대까지 깨끗한 명예를 지킬 수 있습니까? 평가는 그 사람 일생이 기준입니다.

 

보기 : 아래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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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4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5   

 

풍덕 관아 자리에 김홍근(金弘根)의 묏자리가 들어섰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1829년(순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시고 출사하셨는데 풍덕이 개성에 병합된 1823년(순조 23)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때 정승으로서의 안동김씨 인물은 없다. 풍덕이 개성에 병합됨은 국가적 필요에 의해서 일 것이다. 풍덕의 역사를 살피건대 통폐합(統廢合)을 거듭하였음이 이를 입증한다.

 

풍덕(豊德)

『 소재지 : 개성직할시 개풍군

요약 경기도개풍지역의 옛 지명.

내용

본래 백제의 땅이었는데 뒤에 고구려 때 정주(貞州)가 되었고, 고려 현종 때개성현의 영현이 되었다. 문종 때개성부에 예속되고 1108년(예종 3)에는 승천부(昇天府)로 고쳐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 1310년(충선왕 2)에는 해풍군(海豊郡)으로 강등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군(郡)을 폐하고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예속시켰다. 5년 뒤 다시 군이 되고, 1442년(세종 24)에는 덕수현(德水縣)과 합쳐 풍덕군으로 하였다. 그 뒤 1650년(효종 1)에 부로 승격하였으나 1823년(순조 23)에 이를 폐하고 개성에 예속시켰다.

1866년(고종 3)에 다시 부로 복구되었으나 1895년에 풍덕군이 되어 개성부 관할에 들어갔다가 다음해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개성군에 편입되었고, 1931년개성부가 독립되자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과 풍덕군이 합쳐져 개풍군이 되어 대성면이 되었다.

개성 남쪽의 해안지방에 위치하여 고려시대에는 백마산(白馬山)에 성이 있었고 이곳에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정주나 승천부는 풍덕군의 치소(治所)와는 떨어져 있어 이곳의 치소가 자주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대안(對岸)에 강화도가 있어 개성과 한강을 방위하는 데 큰 몫을 한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7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 1823년 청 도광(道光) 3년

송도의 재정 문제에 관해 영의정 남공철이 아뢰다

차대하였다.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아뢰기를,

"저번에 개성 유수 김이재(金履載)의 장계로 인하여 경기 해안에 가까운 고을의 전결(田結) 1천 5백 결을 떼어 주자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추후 호조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에 묘당과 상의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당초에 전결을 떼어 주라고 한 것은 일시의 변통에서 나온 조치였으나 책임을 맡은 신하가 관례상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니, 지금 억지로 거행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송도의 피폐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달리 변통할 길이 없으니, 오직 고을을 떼어서 합쳐 주는 방도 밖에 없습니다. 풍덕부(豐德府)의 경계는 송도의 5리쯤에 가까이 있는데다가 지경이 들쭉날쭉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일찍이 태종조(太宗朝) 13년에 풍덕을 송도에 합병하였다가 뒤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으니, 이제 와서 수령을 혁파하고 개성부에 합치는 것은 근거가 있는 일이며, 분사(分司)의 경비는 으레 모두 본부에 비축된 군향곡(軍餉穀)에서 가져다가 썼는데 이번에 새로 떼어 줄 고을의 토지는 이미 분사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 정세(正稅)는 으레 군향에 보태고 대동미(大同米)도 그대로 비축해 놓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구히 조달할 수 있는 방도가 될 것이니, 풍덕부를 송도에 소속시키고, 수령을 없애고 지역을 합병하는 등의 일은 해당 조(曹)와 해당 도(道)에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이후(?) 관아는 없어졌고 빈터만 남았다고 추정한다. 김홍근(諱 弘根)은 1842년에 운명하시기 전에는 좌의정으로 중심에 있었다. 卒후 순원왕후의 배려 안에 묻힌 것은 아닐까? 공터로 방치된 관아터 풍수상 좋다고 하였다. 유관(諱 興根)에게 보낸 한글편지에서 보면 춘산(金弘根) 오빠 상여 떠날 때(1842년) 복받치는 슬픔 찡하였다. 춘산을 향한 순원왕후의 각별하신 사랑을 알 수 있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고조할아버지(휘 병주)께서 흥선 대원군과의 호기로운 한 판 승부는 1866년(고종 3, 풍덕이 복귀한 해) 일 확률이 높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1월 6일 신유 4번째 기사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풍덕을 고을로 회복시키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풍덕(豐德)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문의한 즉,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풍덕을 이부(移付)하는 것은 전적으로 송도(松都) 진영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근 50년이라는 오랜 기간 내려왔습니다. 해영(該營)의 사세(事勢)가 비록 복구했을 때에 비해서 어떠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군읍(郡邑)의 인혁(因革)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없애고 지금에 와서 다시 두는 것은 각각 그 시기에 따라 적합한 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고장이 능을 모신 중요한 곳이고 지형상으로 보아 중요함은 진실로 전하께서 하문하실 때에 한 말씀과 같습니다. 신은 다시 복구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봅니다. 삼가 성상의 재처만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의정(左議政) 김병학(金炳學)과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의 의견도 역시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고을을 복구하는 한 가지 문제는 다시 더 의논할 것이 없다. 제반 조처는 묘당(廟堂)에서 빨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여러 자료를 종합하고 추리하면 고조할아버지 범초(김병주)께서 흥선 대원군과 호기로운 한 판 승부를 벌린 것은 1866년(고종 3, 풍덕이 복귀된 해)이다. 춘산 할아버지 묘역은 처음 그 자리일 것이고 관아터 인지는 현장을 답사하고 유추(類推)하여야 할 것이나 북한지역이고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해 답답하다.

 

추기 2018, 12, 6일 묘역 위치 참고할 곳  : 아래 두 곳

https://blog.naver.com/madangca/30149202271  

출처 : (사진 찍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5849&cid=46618&categoryId=46618

 

그림 출처 : 아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5849&cid=46618&categoryId=46618  

 

1982년 안동 김씨 임술보

諱 弘根의 묏자리로 표시된 곳이 풍덕 관아 터인지? 행정개편 여러 번으로 개성군 대성면 구읍내라고 하였다. 지금은 북한 땅이고 정확한 이름과 위치를 알 수 없다. 언제 찾아뵙는 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