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諱 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
필자 주 : 본글은 發行日이 2016년 3월 31일로 되어있는 남한산성 안 현절사에서 배부될 책자에 나오는 重刊 顯節祠誌에 필자가 보낸 청음에 대한 원고 초안이다. 명받았음은 금년 초이고 바뿜속 틈을 내었는데 重刊이라는 이야기는 책 받을 즈음인 4월 20일경 알았고 10년 전 발행되었다는데 그 책을 본 바 없다. 새로 나온 책을 받아보니 반영된 흔적은 별로이고 분량도 적은데 이는 한정된 공간 속 5현 모두에 대한 글이 실려야 하고 보완 차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전체적인 흐름만은 같다. 현절사엔 병자호란에서 충성을 다한 오현(五顯 : 청음 휘 상헌,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 그리고 정온) 모셔졌고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이 책을 받음은 어제(4월 25일)로 원고를 최종 보낸 날자가 금년 2월 23일이고 이제 책이 나왔으므로 잠금을 풀어 공개하고자 한다. 2016, 4, 26 |
자(字) : 숙도(叔度),
호(號) :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 풍산노인(豊山老人) 등
시호(諡號) : 문정(文正)
부(父) : 대효[諱 大孝, 1531-1572. 자 희순(希舜). 삼가 현감]
생부(生父) : 극효[諱 克孝 1542-1618. 자 희민(希閔), 號 사미당(四味堂). 돈녕부 도정]
차례
1, 시대적인 배경
2, 시련을 넘어 빛으로
3, 조선의 자존심
4, 기약 없는 먼 여정
5, 등대지기
6,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의 증언
7, 맺는말
일러두기
글 속 번호는『글』과 속한 부분을 가리키고 본 글 끝 부분에 인용(출처) 또는 참고한 곳에다 표기하였다.
신라 말 고창(지금의 안동) 성주(城主)였으며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의 후예(15世)로 이어 온 지 7백여 년 동방의 빛 찬란하니 청음이다. 이에 필자는 그 정신 속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물론 두고두고 가리키는바 무엇인가? 오직 진실만을 담고자 온힘을 다하고자 한다. 이에 자료를 수집하고 그리고자 함에 먼저 일대기가 주를 이룸은 그 속에서 청음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청음 연보와 묘지명의 글을 참고 또는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오늘날 선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그러나 한쪽에선 대책 없는 원칙주의자라는 것이다. 차이를 떠나서 그 가리킴은 이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밑바탕으로 자리 잡았고 두고두고 가리킴으로 자리할 것이다.
1, 시대적인 배경
탄생
1570년(선조 3) 6월 3일 자시(子時 23시-1시)에 외가인 한양성(漢陽城)의 남쪽에 있는 정 씨(鄭惟吉로 1515-1588. 청음의 외조부로 본관 동래) 댁에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
선비(先妣)) 정부인(鄭夫人)이 공을 회임(1569년 7월)한지 열두 달 만 이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2
조선
태어나고 성장하고 출사 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은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격변의 시기다. 조선은 훈구파[勳舊派 조선 전기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찬위(簒位)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가 퇴조하고 사림파[士林派 조선 중기인 16세기로 성종(1457-1494) 이후로 사화기(士禍期)에 재야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로 불리는 신정치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기득권층의 반발 속 퇴계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 1570년(선조 3)]을 따르는 영남학파(동인)와 율곡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를 따르는 기호학파(서인)가 등장하고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3
학파 간에 논쟁은 끼리끼리의 집단을 형성하였고 붕당정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과 이어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1637년 1월)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로 말미암은 황폐화를 가져왔는데 깨닫지 못하고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동북아(중국) 정세
아직 세계를 알기에는 안개 속 이었을 것이고 중국을 통한 그리스도교(가톨릭)의 서양도 희미했을 것이다. 그저 대륙에는 중국이 있고 바다 건너에는 일본이 있다 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기다.
이웃이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중원(中原)을 차지하는 자가 주인으로 되었고 그곳에는 절대적인 비중(比重)의 한족(漢族)이 자리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어 왔는데 때로는 변방에게 내어주는 수모를 겪었으니 원(元 1271~1368), 청(淸 1616~1912)이 그 예이다.
조선(朝鮮 1392-1910)과 비슷한 시기에 개국한 명(明 1368년-1644년)은 한족(漢族)으로 변방인 몽고족이 세운 원(元)을 물리치고 중국의 지배자로 자리한지 250여 년이 흘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근간으로 하는 두 나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으로 묶여 있었다. 찬란한 개국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쇠약하여지는가? 명(明) 또한, 피할 수 없음이나 빨리 온 느낌이다. 이는 누적되어온 내부적 요인과 갈등으로 말미암은 민심이반에서 천재지변까지 더하여 점차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조선에서의 임진왜란 참전으로 가속화되고 있었다.
여진족과의 관계
회고하건대 고려조 이후 끊임없는 외침에는 여진족이 크게 자리하였는데 회유와 정벌을 거듭하였다. 그들은 수렵 어로 민족으로 고려 때 윤관 장군의 분전(奮戰) 그리고 조선의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을 개척하고 압록강, 두만강까지 경계를 이루었고 귀순하는 무리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져 필요한 물건을 받고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미개한 떠돌이 존재인데 이는 중국의 분열정책으로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였음은 역사적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그들은 중국의 동쪽 지역과 압록강 이북인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에서 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인지한 족장 누르하치(1559-1626)는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그를 구심점으로 여타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1616년(조선의 광해군 8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여 중원(中原)을 넘보게 되었다.
명(明)은 조선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주지하다시피 성리학(性理學)을 근본으로 하는 두 나라이고 명이 조선에서 상국(上國)으로 있었음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선(朝鮮)이란 국호도 명(明)의 가리킴을 따랐으며 임금의 즉위에는 추인(追認)을 붕어(崩御) 후에는 시호를 받았다. 모든 중요 문서에는 명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고 매년 또는 필요에 따라 사신을 받고 보냈는데 이는 그 결속이 깊고 사랑이란 끈으로 매여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에 명의 참전으로 확인되고 있다.
2, 시련을 넘어 빛으로
성장
『어린 시절인 3세 때(1572년으로 선조 5) 큰아버지 삼가공 김대효(三嘉公 金大孝, 1531-1572)가 후사 없이 졸(卒)하자 할머니 이씨(李氏)가 삼가공의 후사(後嗣)로 삼아 서윤공 김번[庶尹公 金璠 1479-1544. 자 문서(文瑞)]의 종통을 이었고 1573년 할머니를 따라서 생부(生父)이신 도정공(都正公) 김극효의 임소(任所)인 양구(楊口)로 갔다. 9세 때인 1578년(선조 11) 아버지(生父)에게 처음으로 글을 배웠고 11세 때 할머니를 따라 생부의 임지(任地)인, 음죽(陰竹)을 갔고 1582년(선조 15. 선생 13세) 귀가했는데 여름에 천연두에 걸려 아주 위태로웠다가 다음 해에 비로소 나았다. 1583년 할머니를 따라 도정공의 임소인 대흥(大興)으로 갔다.
1584년(선조 17, 선생 15세) 귀가하고 여름에 관례(冠禮)를 올렸다. 16세에 장가들었는데 배(配)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이의로(李義老)의 따님이다. 같은 해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하(門下)로 들어갔고 1587년(선생 18세) 생부를 따라 풍덕(豊德)으로 갔으며 1588년(선생 19세) 둘째 형(金尙寬)인 장단공(長湍公)과 더불어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등을 유람하였으며 1589년(선조 22, 선생 20세) 아들 종경(宗慶)이 출생했다. 』4
올곧음과 엄격함은 천성으로 『 아버지(생부로 克孝) 조차 친구들과 놀다 돌아오는 기척을 느끼면 손을 저어『우리 집 어사또 오신다. 5 』라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임진왜란과 피란 그리고 슬픔
1590년(선조 23년, 선생 21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91년 할머니 이 부인이 졸(卒) 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아 양주(楊州)에서 어버이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란하고 겨울에는 강화(江華)로 가서 바닷길로 서산(瑞山)으로 갔다. 이때 아들 종경(宗慶)이 4세로 요절하는 슬픔을 겪었고, 1593년 가을에 할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1594년(선조 27, 선생 25세 ) 생부를 따라 임소인 자산(慈山)으로 갔다. 6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때 출사표(出仕表)
참고 : 청음 연보
때 | 선조 | 나이 | 직 책 과 행 적 |
1596 | 29 | 27 |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
1597 | 30 | 28 | 서울에서 함종현(咸從縣)에서 승문원의 비서(秘書)를 감수(監守) 정유재란(丁酉再亂) 발발 |
1598 | 31 | 29 | 저작(著作). 왜란이 종결되었다. |
1599 | 32 | 30 | 어머니 이 부인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다. |
1600 | 33 | 31 | 박사(博士).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예조좌랑으로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 겸임. 이조 좌랑.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어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
1601 | 34 | 32 | 이조.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경연 서독관(經筵侍讀官)과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동료와 사전춘추(四傳春秋)를 교정하고 승서(陞敍 벼슬을 올림)되었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가을에 제주 안무어사(安撫御史). 남사록((南槎錄)이 있다. |
1602 | 35 | 33 | 봄에 복명(復命). 예조정랑.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소학(小學)을 수백 번 읽다. 중씨(仲氏, 둘째 형 상관)와 풍악(楓嶽), 도안산(道安山)의 일출(日出)을 유람. 향시(鄕試)의 고관(考官)에 차임 되어 갔다가 이어 홍원(洪原)의 천도(穿島)와 북청(北靑)의 시중대(侍中臺)와 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유람 |
1603 | 36 | 34 | 감사와 다투다 파직되어 돌아오다. |
1605 | 38 | 36 | 멀고 험한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으로 온힘 다해 수행함 |
1606 | 39 | 37 | 일에 연좌되어 파직당하고 귀경 |
1607 | 40 | 38 |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형(尙寬)의 아들 광찬(光燦)을 후사로 삼다. |
1608 | 41 | 39 | 2월 1일 선조(宣祖)가 승하하였다. |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제주 안무 어사(安撫御史)
길운절은 1601년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소덕유(蘇德兪 : 정여립의 척분)를 찾아가 모반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소덕유의 처에게 알려지자 그 자신이 먼저 관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이에 제주목사 조경(趙儆)이 소덕유 등을 체포하여 서울로 보내 처형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병사 안위(安衛)와 전 수사 김억추(金億秋) 등이 연루되어 심문을 받기도 하였고,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주민을 선무하기 위해 김상헌을 안무 어사(按撫御史)로 1601년(선조 34 선생 32세) 파견하여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고 민심을 수습하라는 사명을 띠고 제주도로 갔다. 길운절은 먼저 고변하였으므로 용서를 받았지만,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하였음을 원망하다가 체포되어 참형에 처하여졌다. 7
『 묘당에서는, 위협에 못 이겨 따른 무리들은 모두 불안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고, 또 여러 차례 적임자가 아닌 수령을 겪은 탓에 백성들이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진달 할 길이 없는 것을 깊이 염려하였다. 이에 어사를 파견하여 가서 덕음(德音)을 선포하고 겸하여 섬 안의 폐막을 두루 물어보게 하기를 청하였으며, 이어 대내(大內)의 향(香)을 내려 한라산(漢拏山)에 제사 지내도록 명하였다. 선생께서는 이 명을 받들고 가서 편리한 점과 나쁜 점을 물어보았으며, 군액(軍額)을 보충하고, 방수(防戍)를 편하게 하고, 진상물을 경감하고, 유생들을 권과(勸課)하는 등의 일에 대해 조목별로 계문(啓聞)하여 변통한 바가 많았다. 그때의 기록으로 남사록(南槎錄)이 있다.
1607년(선조 40, 선생 38세) 형 상관(諱 尙寬)의 둘째 아들 광찬(光燦 1597-1668)을 후사로 이었다. 8 』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 때 출사표(出仕表)
참고 : 청음 연보
때 | 광해군 | 나이 | 직 책 과 행 적 |
1608 | 원년 | 39 |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겨울에 문과 중시(文科重試)에서 급제하여 사도시정(司䆃寺正)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
1609 | 1 | 40 |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칙사(勅使) 웅화가 나오자 원접사를 따라가 의주(義州)에서 영송(迎送). 홍문관 교리로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겸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과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임 |
1610 | 2 | 41 | 종부시정(宗簿寺正).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겸보덕(兼輔德).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
1611 | 3 | 42 |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으로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겸임. 정인홍(鄭仁弘)이 선정[先正 : 회재(晦齋)와 퇴계(退溪)]을 무함하여 헐뜯은 죄를 논척하다 면직되고 광주목사(廣州牧使) |
1612 | 4 | 43 | 호군(護軍). 연안 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 |
1613 | 5 | 44 | 김제남(金悌男)이 무고(誣告)로 일어난 옥사로 죽으니 그와 인척(아들 광찬이 김제남의 손녀사위)인 관계로 연좌 파직됨.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다. |
1615 | 7 | 46 | 호군. 광해군이 소생모(所生母)의 존호(尊號)를 중국에서 인준해 준 데 대해 사은사(謝恩使)가 가지고 갈 사황태자전(謝皇太子箋文)을 써 내용중 “어머니가 귀하게 된 것이 자식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생각하니,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안다는 말을 잘못 범하였구나.〔念母貴之由子 竊干觀過之聽〕” 하였는데, 시의(時議)를 거슬러 삭관(削官)되었다. |
1616 | 8 | 47 |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를 곡하였다. 제문과 만시가 있다. |
1617 | 9 | 48 | 폐모 정책을 반대하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지어 필운(弼雲) 이 상공(李相公은 李恒福으로 1556-1618)을 전송하였다. |
1618 | 10 | 49 | 본 생부(극효)의 상(喪). 독례수초(讀禮隨鈔) 저술. 안동에서 우거(寓居) |
1619 | 11 | 50 | 상을 마치고 심상(心喪)을 입었다. |
1620 | 12 | 51 | 안동(安東)에 있는 삼태사묘(三太師廟 안동을 본관으로 하고 그 시조인 金宣平 張吉, 權幸을 모신 곳)의 향헌의(享獻儀)에 대하여 논하다. |
1621 | 13 | 52 | 안동에서 봄에 양주(楊州)의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중씨(仲氏)인 장단공(長湍公으로 尙寬)을 곡하였다. 11월에 본생모의 상을 당하였다. |
1622 | 14 | 53 | 어머니 이 부인(李夫人)이 졸(卒) 하였다. |
1623 | 15 | 54 | 3월에 인조대왕께서 반정(反正)하였다. |
길이 아닌 곳은 걷지를 않는다
1611년(광해군 3, 선생 42세) 오현[五賢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에 대해 정인홍이 차자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을 폄훼(貶毁)하였는데 진계하여 동료를 이끌고 논척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큰 논란거리 중 하나로 당부(當否)를 떠나 아래 안내한다.
『 - “신들이 삼가 우찬성(右贊成) 정인홍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고(故) 징사(徵士) 조식(曺植)의 병통을 논한 일과 고 징사 성운(成運)을 단지 ‘청은(淸隱)’이라고만 칭하면서, 두 사람에 대해 중도(中道)로써 허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내면서 무훼(誣毁)하였다느니 우롱하였다느니 하는 말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며, 다른 일들을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못하는 말이 없이 헐뜯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선정신 이언적(李彦迪)까지 언급하며 그를 마치 원수를 보듯이 하였습니다.
아, 정인홍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편벽되고 막힌 것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죽을 때가 다 된 날에 이르러서도 이에 이런 말을 하였으니, 어찌 노망이 들어 어두운 탓이 아니겠습니까. 정인홍은 그가 스승으로 섬긴 사람과 존숭하는 사람을 추존하여 후세에 드러나게 하려고 하면서, 실로 스승을 존숭하는 도가 지나치게 아름다움만 칭송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 탓에 도리어 후세의 기롱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9 』
상(광해군)의 뜻을 거슬러 면직되고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으나 더한 하늘의 뜻을 따랐음은 전개된 바와 같다. 『윤리와 기강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 《야인담록(野人談錄)》을 저술하여 뜻을 나타냈다. 10 』
1617년(광해군 9, 선생 48세) 모후(母后,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를 반대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대의(大義)를 진달(陳達)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었는데, 글을 보내어서 천리(天理)의 정당함을 서술하였다. 안동으로 내려가 1621년까지 우거(寓居)하였다 11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때 출사표(出仕表)
참고 : 청음 연보
때 | 인조 | 나이 | 직 책 과 행 적 |
1623 | 1 | 54 |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사를 논하고 폐주(광해군)와 그 가족에게 예우할 것을 이야기 함 |
1624 | 2 | 55 | 이괄(李适)의 반란. 이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 여덟 가지 조짐에 대해서 논하였다.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삼가공(三嘉公은 부친으로 大孝)의 묘소 개장. 예조 참의. 이조 참의 |
1625 | 3 | 56 | 대사간. 이조참의로 상소를 올려 시폐(時弊)에 대해 논하였다가 체차. 우부승지. 승정원 도승지에 특별히 제수되어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과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과 상서원 정(尙瑞院正)을 겸임. 계사(啓辭)를 올려, 재변을 만났으니 공구수성(恐懼修省)하라고 청함.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 네 가지 조목에 대해 진달 하였는데 내용 중 내족부인의 간여를 막도록 청함.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석실로 가심 |
1626 | 4 | 57 | 성절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8월에 서해를 건넜다. 모문룡의 무함으로부터 정문(呈文)을 올려 진달하다. 조천록(朝天錄)이 있고, 등주에서 딱따기 치는 소리를 짓다 |
1627 | 5 | 58 | 중국에 머물러 있었고 3월에 정묘호란을 들었고 근원을 칠것을 청함. 모문룡이 거짓으로 상주한 실상을 밝혔다. 귀국중 대사간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 5월에 복명. 후금의 사신을 거절하여 후환을 끊을 것을 청함. 도승지로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회복시키지 말기를 청하였다. 이인거(李仁居)의 옥사로 부제학(副提學)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차자를 올려, 공구수성(恐懼修省)하기를 청함. 세자 우부빈객. 대사간. 동지춘추관사 |
1628 | 6 | 59 | 1월에 유효립(柳孝立)이 모역(謀逆)을 대사간으로서 국문(鞫問)함. 예로써 신하들을 부리기를 청함. 도승지.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도승지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 형조 판서. 의정부 우참찬. 도승지 |
1629 | 7 | 60 | 홍문관 제학과 동지성균관사 겸임. 서반직(西班職)에 서용. 동지중추부사. 병으로 내의를 파견 받음. 윤 4월에 요무(要務)를 강구하고, 폐정(弊政)을 혁신하고, 민력을 늦추어 주고, 군병(軍兵)을 기르기를 청함. 우참찬과 홍문관 제학 겸임. 금(金) 차관(差官)을 만나 보는 예를 논함. 대사헌 |
1630 | 8 | 61 | 매복(枚卜)에 들어가다. 예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 겸임. 망궐례(望闕禮)를 우선 정지하기를 청하였는데, 윤허를 받아 시행되었다. |
1631 | 9 | 62 |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영정(影幀)을 봉심(奉審). 대사헌에 제수되어 경연(經筵)과 세자 빈객(世子賓客) 겸임. 도승지 |
1632 | 10 | 63 | 추숭(追崇)을 반대. 형조 판서. 대사헌. 추숭 문제로 주도하는 이귀를 논핵하다 견책받아 석실에 있었다. 가묘 건립. 인목왕후의 상. |
1633 | 11 | 64 | 12월에 대사헌, 여섯 조목을 논함 ⑴사욕(私慾)을 조절하여 성상의 몸을 보양하라는 것이고, ⑵ 실덕(實德)에 힘써서 하늘의 경계를 삼가라는 것이고, ⑶ 언로를 넓혀서 보고 들음을 넓히라는 것이고, ⑷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사사로이 통하는 길을 막으라는 것이고, ⑸ 조목은 번용(煩冗)을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펴 주라는 것이고, ⑹ 장수를 잘 선발해서 변방의 방비를 단단히 하라는 것이었다. 사임하여 면직되고서 석실로 돌아갔다. |
1634 | 12 | 65 | 영의정 윤방(尹昉)이 차자를 올려 자신과 대체할 것을 천거하다 |
1635 | 13 | 66 | 청평산(淸平山)을 유람하고 청평록(淸平錄)이 있다. 대사헌으로 비변사 제조를 겸임. 군병을 양성하고 장수 선발할 것을 청함. 인열왕후 상빈(上賓) |
1636 | 14 | 67 | 공조 판서로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과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와 세자조우빈객을 겸임. 예조 판서. 정헌대부(正憲大夫), 서로(西路)에 진(鎭) 설치를 논함, 대사헌. 이조 판서. 숭정대부(崇政大夫), 예조 판서. 사직으로 석실(石室)에서 12월에 병자호란 발발, 남한산성 합류. 척화(斥和)를 강력하게 주장함. 왕세자의 인질 됨을 배척. 예조 판서. 상께서 “장차 무엇을 믿겠는가? 하니, “천도(天道)는 믿어도 됩니다 하니 상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황(城隍廟)과 백제 시조묘(百濟始祖廟)에 기도 |
1637 | 15 | 68 | 항복국서를 찢고 통곡, 엿새 동안 금식, 목을 매 죽을 뻔하였다. 척화(斥和)한 신하로서 잡혀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정월 그믐 정축하성과 삼전도의 치욕. 따라가지 않고 2월 1일에 백씨(伯氏)인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선생께서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함을 접함. 2월 7일에 안동의 풍산(豊山)으로 다시 학가산(鶴駕山) 아래로 호를 서간노인(西磵老人). 숭록대부. 가을에 우의정 최명길이 선생의 이름을 매복(枚卜)에서 삭제하였다. |
1638 | 16 | 69 | 김념조(金念祖)의 편지에 회답, 풍악문답(豊岳問答) 짓다. 밤에 홀로 걷다(夜起獨行)짓다. 4월에 선원(仙源) 선생의 궤연에 곡하였다. 가을에 장령(掌令) 유석(柳碩) 등이 선생에 대해 논계하면서 극변(極邊)에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였다. 10월에 지평 이도장 등이 중도부처(中途付處)하기를 청하였다. 10월에 이도장 등이 발론(發論)하면서 중도부처(中途付處)하기를 청함. 21일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1월에 이계 등이 멀리 유배 보내기를 청하였다. 3일에 삭탈관작(削奪官爵)하라고 명하였다. |
1639 | 17 | 70 | 10월에 여러 족인(族人)들과 5대조 이상의 여러 묘에 전(奠)을 올렸다. 직첩(職牒)을 돌려받았으며, 잇달아 서용(敍用)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소하여 오랑캐(청)가 중국(명)을 침입하는 것을 돕지 말기를 청하다. |
1640 | 18 | 71 | 11월 조지(朝旨)를 받고서 장차 청의 심양으로 가기 위해 하직하고 출발. 12월 9일에 경성(京城)을 지나갔다. 상께서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어찰(御札)과 초구(貂裘)를 하사하니, 상소를 올려 사례하였다. 18일에 용만(龍灣)에. 26일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심문에 굴하지 않음. |
1641 | 19 | 72 | 1월 심양의 북관에 구류. 설교집(雪窖集)이 있다. 11월에 부인 이씨(李氏)가 안동에서 졸(卒). 12월에 위독해지자, 의주(義州)로 나가 있게 하였다. |
1642 | 20 | 73 | 1월 2일에 의주에 도착, 이 부인(李夫人)의 부음을 접함. 곡한 후 예의를 갖춤. 세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
1643 | 21 | 74 | 1월에 심양으로 다시 끌려갔고 북관에 구금. 최명길과 만남. 4월에 질관으로 청황제에게 사배를 거절(최명길 동행). 설교후집(雪窖後集)이 있다 |
1644 | 22 | 75 | 설교별집(雪窖別集) 있다. 4월에 명(明)이 멸망. 글을 지어 슬퍼함 |
1645 | 23 | 76 | 2월에 귀국 서교(西郊)에서 상소, 답 없어 3월 어느 날에 석실로 나갔다. 상께서 정원에 엄한 비답을 내렸다. 이에 상소를 올려 진정하였다. 4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卒)하여 빈궁(殯宮)에 임하고 곧바로 돌아갔다. |
1646 | 24 | 77 | 3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에 제수. 영경연사(領經筵事)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와 세자부(世子傅)를 겸임. 상소를 32번이나 올리자 상께서 비로소 체차를 허락함. 석실에서 영돈녕부사 |
1647 | 25 | 78 | 6월과 12월에 상소하여 사임을 청함 |
1648 | 26 | 79 | 10월에 병이 나 내의(內醫)가 내방. 사직서 도제조(社稷署都提調)를 겸임하여 사직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
1649 | 27 | 80 |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빈천(賓天)하셨다. |
인조반정(1623년 인조 1, 선생 54세) 후 그해 겨울에 공신 김류에게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따듯하게 대할 것을 권고했다. 광해군 때 권력을 업은 이종(姨從) 유희분을 상종하지 않았으며 인조 때 낙인찍혀 사형당한 그를 문상했다. 공과 사를 분력하고 억강부약(강한 자는 억누르고 약한 자는 부추겨 도와준다)하는 조선 선비의 가치 지향성을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다. 12
『 1624년 여덟 가지 조짐에 대해서 논하였다
그 차자에 대략 이르기를,
“성학(聖學)이 다시 퇴보하는 조짐이 있고,
공도(公道)가 다시 폐해지는 조짐이 있고,
언로가 다시 막히는 조짐이 있고,
요행을 노리는 길이 다시 열리는 조짐이 있고,
탐활(貪猾)한 자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조짐이 있고,
잡인이 내통하는 조짐이 있고,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하게 되는 조짐이 있고,
여알(女謁)이 행해지려는 조짐이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자, 대사간으로서 차자를 올려 ‘여덟 조짐[八漸]’에 대하여 논한 것이 수천 마디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고 절실하였다. 대사헌으로서, 추숭(追崇)이 예에 어긋난다고 논하여, 엄한 교지를 받고 바로 시골로 돌아갔는데, 오래지 않아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에 제수되었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또 물러나 돌아갔다. 13 』
청서파(淸西派)의 으뜸으로 되다
새 세상을 열어가겠다고 다짐한 공신 세력이다. 그들이 내걸은 명분은 광해군의 폐륜이 가장 컸고 깨끗한 세상을 열어가자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불행이다.
1624년(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반란(反亂)이 일어났고 수습되었으나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14
『 조정의 의논은 오로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해 시비는 돌보지 않아서 벼슬길이 자못 분잡 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고상한 품격으로 각별한 논의를 주장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상소(上疏)하여, 대신(大臣)을 진심으로 대하여 성실과 거짓의 간격이 없게 하며, 언관(言官)을 중하게 대우하고 직언(直言)하는 선비를 좌절시키지 말며,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며, 사기(事機)를 잃지 말며, 붕당(朋黨)을 미워하지 말며, 말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말며, 숭고(崇高)함을 믿지 말며, 소외(疏外)되고 비천한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간청(懇請)하였으며, 또 재변(災變)을 만났을 때에 임금의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진달(陳達) 하니, 임금이 ‘붕당(朋黨)’이라는 글자 아래에다 엄한 교지(敎旨)를 내렸다. 이윽고 특별히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는데, 일을 논의한 것이 더욱 절실하였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겨져서는,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벼슬에서 물러나서 석실(石室)에 돌아왔다. 15 』
반정공신들이 시대적인 정신을 외면한 채 권력을 앞세워 점차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즉, 하사 받은 부(富)가 부족한가? 사치는 끝을 모르고 말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 했으니 땅과 노비를 늘리고 호화주택을 짓는 등 군림하러 들었던 것이다.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했으며 남달리 주관이 뚜렷했다.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였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선 것이 거의 오십 년이 되었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다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말이 쓰이지 않으면 번번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악인을 보면 장차 자기 몸을 더럽힐까 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였고 어렵게 여겼다. 김류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숙도(김상헌의 자)를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등이 땀에 젖는다." 하였다. 16
1625년(인조 3, 선생 56세)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네 가지 조목[천변(天變)을 두려워하고, 언로를 넓히고,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고, 혼인을 삼가라.]대해 진달 하였는데, 내용 중 내족(內族) 부인의 간여를 막아주도록 진언하였다. 17
『 김상헌이 대사헌 직책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장약관 박시량이라는 관리가 조회때 진흙이 신발에 묻을까봐 큰 덧신을 신은 것이 법에 저촉되었다. 또 부유한 역관 장현이라는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국법에 금하고 있는 부연(附椽)을 달아 위법행위를 하였다.
김상헌이 두 사람을 처벌하려 하는데 박시량의 처가 남편의 선생인 고관 오윤겸에게 구명운동을 하니 오윤겸이 말하기를 『내 아들이 범법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고 하며 거절하였다. 김상헌과 오윤겸은 절친한 사이였지만 공사구별이 상호 추상 같았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처벌받았다.
어떤 공자가 둥근기둥을 사용하여 정자를 지었다가 곧 기둥을 깎아 네모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둥근기둥은 궁궐에만 쓰게 되어 있었는데 월권 하려다가 김상헌의 칼날 같은 공직수행 자세에 겁을 먹은 것이다. 18 』
외교가로서의 청음
1626년(인조 4, 선생 57세) 성절사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8월에 서해를 건넜다. 그때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를 불법 점령한 모문룡(毛文龍)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무함하므로 외교적 어려움에 처했는데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모문룡이란? : 1621년 3월 심양과 요양이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자 패잔병을 이끌고 1621년 7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상륙하고 허락(광해군 때)을 받았으나 그들은 철산, 용천, 의주 등을 돌아다니면서 명의 패잔병과 난민을 수습하면서 실지(失地)회복을 외치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는 정묘호란을 불러오는 한 원인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공 58세) 3월에 중국에 있으면서 본국에서 정묘호란의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오랑캐의 근원을 쳐 화근을 잘라버리기를 청하였는데 내용이 심금을 울리므로 조선에 신하가 있다고 하였다. 외교가로의 빛나는 공적 사라진 명의 뒤안길에서 빛난다.
중국에 머무시는 동안 등주(登州)를 찾았는데 지은 시가 있어 그때의 중국의 모습을 담고 있다.
딱따기를 치는 소리를 듣다(聞擊柝)
딱딱대다 다시 치는 딱따기 소리 / 擊柝復擊柝밤새도록 그치지를 않고 울리네 / 夜長不得息어떤 이가 날 추운데 옷이 없으며 / 何人寒無衣어떤 군졸 배고픈데 밥을 못 먹나 / 何卒飢不食모든 이들 각자 방에 편히 쉬는데 / 萬家各安室홀로 성 위 향해 가서 머무르누나 / 獨向城上宿어찌 그가 나와 친한 사람이리오 / 豈是親與愛역시 또한 서로 아는 이도 아니네 / 亦非相知識같은 동포 생각는 맘 저절로 일어 / 自然同胞義내 가슴속 측은하단 생각이 드네 / 使我心肝惻
중국 사람들이 이 시를 보고는 말하기를, “참으로 군자다운 말이다.” 하였다.
19 』
정묘호란(丁卯胡亂)
『 광해군의 북인 정권은 시세에 따라 향배를 달리하며 관망하는 실리외교를 폈지만,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새로 수립된 신정부는 북인 정권과는 본질적인 차별성을 보였다. 순정 주자학도로 자처하던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과 퇴계 이황계의 남인이 연합한 연립정권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공」 (再造之功·조선을 도와준 공)을 들어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고, 북방 오랑캐로 격하하던 여진에 대한 배금 정책의 기치를 선명히 하였다.
후금으로서는 명의 우방 조선을 선제공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626년 화친을 표방하던 태조가 죽자 그 아들 태종은 주전론으로 선회하고 1627년(인조 5년) 정월 3만 명의 군사로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 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급보에 접한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고 화(和) 전(戰) 양론이 비등하였는데, 배후의 위협을 느낀 후금이 평산 이남으로 더는 진출하지 않고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내용은,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和約)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 이었다. 이로서 후금군은 철병하였다.
이른바 정묘호란이다. 후금으로서는 우선 조선의 기를 눌러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있어 배후의 안전을 기하고 전쟁 수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물량을 조달하기 위한 조처였다. 정묘호란 후 후금은 명을 정벌하는 과정에 병선과 군량을 조선에서 징발하고 가도(假島) 토벌을 목적으로 자주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기에 후금에 대한 조선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20 』
3, 조선의 자존심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지금의 잣대로 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체질화된 성리학과 역사의 흐름은 북방 오랑캐로 각인된 여진족과 형제의 의리로 말미암은 굴종(屈從)은 가당치 않은 굴욕이므로 승패를 떠나 일전을 불사한다는 주장이 사림 사회의 흐름이자 국론(國論)이었다. 본거지 만주 일대는 고구려의 말발굽 소리 들리던 곳이고 광활한 우리의 옛터전이다. 시대를 거쳐 오면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우리의 속민(屬民)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고려조 이하 국경을 시끄럽게 했으며 윤관 장군의 분전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의 개척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였으며 투항하는 무리는 복속시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명의「재조 지공」 (再造之功·조선을 도와준 공)을 들어 북방 오랑캐로 격하하던 여진에 대한 배금 정책의 기치를 선명히 하였다
거대한 한족(漢族)이 세운 중원의 명(明)이 변방인 만주의 여진족에게 접수당할 줄이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꾸어 명이 청을 토벌하였다면 어찌 전개되었을까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청의 침입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갑론을박만 할 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청음은 이전부터 군병을 기르고 국방 강화를 여러 차례 개진한 바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서로(西路)에 진(鎭)을 설치해서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자고 주장하였다. 21
병자호란(丙子胡亂)
『 정묘호란(1627년) 이후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 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 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22 』
『 1636년(인조 14, 선생 67세) 12월 1일 12만 대군(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漢軍) 2만)을 동원한 청으로부터 침입당하는 병자호란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야만시되던 청군은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 1594~ 1646 시호: 충민(忠愍)]이 지키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피해 서울로 침입하였다. 그들은 10일도 안 되어 한성(서울)에 육박하고 조선은 유린되었다.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했다. 당시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해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인도해 강화도로 피하도록 했다. 심기원(沈器遠)을 상중에서 불러내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호조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았다. 23 』
인조와 세자,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군에 의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서울로부터 뒤따라오니 그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穎達)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총융사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했다. 또, 수원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副將)으로 삼고 상중에 있던 이확(李廓)을 불러 중군을 삼았으며, 어영대장 이서(李曙)는 북성(北城)을,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 모집 격문을 발하고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였다. 24
67세의 청음께선 석실(石室 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소재)에 계셨는데 조정을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찾아 합류했다. 25
근왕병
청군은 한성(漢城 현 서울)과 인조(仁祖)만을 노린 전격전을 펼쳤기 때문에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병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 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왕병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처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근왕병은 상당하였으나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 격파 당함으로써,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26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는 병력임에도 대비하지 않은 아픔이라고 하겠다.
고립무원의 47일
이때 성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어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식량에 불과했다. 청군의 선봉은 12월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고 대신 담태(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태종은 다음 해(1637년) 1월 1일에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 도착했고 20만의 군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굽어보며 조선군의 동태를 살폈다. 포위를 당한 성안의 조선군은 12월 18일 어영부사(御營副使) 원두표(元斗杓)가 성안의 장사를 모집, 성을 빠져나가 순찰 중인 적군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해 또 적군 30명을 죽였으며, 다음날 어영대장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이끌고 서성을 나가 적군 10명을 또 죽여 성안에 사기를 올렸다. 그러나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 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27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 속, 한계에 이르렀다. 근왕병은 청군에게 각개 격파 당했고 명의 구원병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이고 실체
『 정묘호란 이후 주전론(主戰論)이 국론이었지만 위급한 상황 앞에서 주화론(主和論)이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는 김상헌, 정온, 이경여 등이고 후자는 최명길을 위시하여 이경직, 김류 등이다. 양쪽을 대표하는 김상헌과 최명길, 청음께선 절개를 지킨 조선의 자존심이었고 지천 최명길은 현실과 실리를 중시한 민족지도자다. 이는 국론분열이 아닌 정신이고 실체로 상호보완을 통해 조선의 정체성을 알렸으며 상승작용은 청으로 하여금 다시 인식하도록 하게 하였다.
청음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척화와 항전을 주장했다. 『 “오늘의 계책은 반드시 먼저 싸워 본 뒤에 화친을 해야 합니다. 만약 한갓 비굴한 말로 강화해 주기만을 요청한다면, 강화 역시 이룰 가망이 없습니다. 28 』 그러나 대세는 항복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인조의 물음에 “천도(天道)를 믿어야 합니다.” 라고 청음은 대답했다.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9
『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50여 일 된 1637년 정월 23일 강화도가 함락되어 원손과 세자빈 강씨, 두 왕자와 역대 왕들의 옥새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성내에 전해지고 기다리던 의병과 명군의 원조가 기대할 바 못된다고 인식한 조선 정부에서는 주화론이 척화론을 압도하고 인조의 지지를 얻은 주화론자들이 청나라와 강화 교섭을 시작하였다.
김상헌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시점에 시작되었다. 그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척화론자의 구심점이 되었다. 30 』
『 대신(大臣) 이하의 사람들은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보내어 오랑캐의 군사가 물러가도록 요구하려고 하였으므로, 청음께서 간절히 꾸짖기를, “어찌 신하로서 저군[儲君, 세자(世子)]을 적에게 보내는 의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하는 기색이 준엄(峻嚴)하였기 때문에 대신(大臣)들이 나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에 궐문(闕門)에 나아가서 대죄(待罪)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가지 않을 수 있었다.
1637년(인조 15년) 정월 16일에 묘당(廟堂, 議政府)에서 바야흐로 항복하는 글[某文字]을 초안한 항복문서를 보고 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통곡(痛哭)하고 그 초안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은 어찌하여 차마 이러한 글을 짓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또 입대(入對)하기를 청하였는데, 분노한 기운이 가슴까지 가득 차서 눈물과 콧물이 마구 턱으로 흘렀다. 한참 있다가 아뢰기를, “금일의 의논은 양립(兩立)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소신(小臣)을 죽여주소서.” 31 』
청음과 지천(최명길), 두 분은 나라 사랑하는 방법만 틀리지 충신이다.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썼고 이를 본 김상헌은 찢었다. 이를 최명길은 다시 주워 수습하였다. 여기서 열지자도 충신, 섭지자도 충신[烈之者 忠臣, 攝之者 忠臣]이라는 그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포위가 더욱 급박해지자, 임금이 성황사(城隍祠)와 백제(百濟) 시조묘(始祖廟)에 기도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궁(窮)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므로, 질병(疾病)의 고통이 참담(慘憺)하면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ㆍ‘어머니’를 부릅니다. 주상(主上)께서는 친히 개원사(開元寺)에 나아가서 원종(元宗, 仁祖의 生父)의 진좌(眞座)에 기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32
죽음을 결행키로 하다
스스로 목을 매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발견되었고 죽음을 각오한 금식 6 일재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묘당에서 척화신으로 참판 정온(鄭蘊)과 대사간 윤황(尹煌) 등 11인을 추려 내고는, 선생을 우두머리로 삼아 장차 오랑캐의 군영에 보내려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밥을 먹지 않은지 6일 이었다. 이에 몸이 피폐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 만약 내가 먹지 않고 먼저 죽는다면 사람들이 적진에 가는 것을 피하려 한 행동이라 말할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억지로 밥을 먹으면서 명을 기다렸다. 그러던 차에 대간이 많은 사람을 보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극력 간쟁하였다. 이에 드디어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 두 사람만 보냈다. 33
삼학사(洪翼漢, 吳達濟ㆍ尹集)가 속죄양이 되었지만, 근원에는 청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임금의 욕됨이 극한에 이르렀는데 신하의 죽음이 어찌 더딘가 」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하더니 바로 지금이 그때인가 하노라 」
「임금을 모시고 투항하는 건 내 진실로 부끄럽네 」
「한칼로 인(仁)을 얻으리니 죽음은 집에 돌아가는 듯 여겨지네」34
당시 그가 지은 이 시에서 청음의 결연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치욕적인 상황에 따라가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조선의 자존심이다.
삼전도의 치욕
그달(1637년 정월) 그믐, 인조는 성을 나왔고 항복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왕조 역사에서 처음 겪는 가장 큰 굴욕으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한 인조 임금, 국초 이래 가장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척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67세의 청음의 마음은 참담 자체일 것이다.
조선은 치욕적인 군신관계의 설정과 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고 당시 청은 볼모로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끝까지 항전하는 삼학사(三 學士)인 윤집(尹集(1606-1637 시호: 忠貞), 오달제(吳達濟 1609~1637 시호: 忠烈), 홍익한(洪翼漢(1586~1637 시호: 충정(忠正)과 수많은 우리 백성을 끌고 갔다. 삼학사는 청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항거 죽음으로서 충성을 다했다.
안동으로 내려가다
1637년 정월 그믐 굴욕적인 정축 하성 때 통곡하고 따라가지 않았고 2월 1일에 큰 형님인 선원(仙源) 김상용 선생께서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동의 풍산으로 내려가 옛터인 청원루에 머물렀고 조용한 곳을 찾아 근처 학가산(鶴駕山) 아래 서미동(西薇洞)에서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목석헌((木石軒)이란 편액을 달아놓고 울분을 달래며 지냈는데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청원루 와는 오간 듯한데 1640년에 청원루에 머물었음은 손자이신 문곡(諱 壽恒)의 기사 유교를 통하여 알 수 있다.
4, 기약 없는 먼 여정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639년, 이번에는 청은 명나라를 칠 군사를 요구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상헌은 반대 상소를 올려 이 때문에 청의 노여움을 사 청의 심양(瀋陽)으로 70세의 노구인 몸을 이끌고 압송(押送)되어 갑니다. 1640년 11월 안동의 풍산을 출발 12월 9일 도성(서울)을 지나갔다.
돌아올 기약 없는 긴 여정으로 이때에 지으셨을 아래 글에서 청음의 나라사랑을 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상(인조)께서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어찰(御札)과 초구(貂裘)를 하사하니, 상소를 올려 사례하였습니다. 어찰을 내려 위로하기를,
“경이 선조(先朝)의 구신으로서 나를 따라 함께한 지가 역시 여러 해가 되었다. 의리상으로는 비록 군신 사이이나 정으로 보면 부자와 같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 물러나 떠나갈 적에도 오히려 몹시 서운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가 생겨나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참으로 못난 내가 현명하지 못한 소치이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서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껄끄러운 점이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경은 모름지기 잘 대답하여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바란다.”
이에 선생께서는 대답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형편없이 못난 탓에 종시토록 성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만번 죽어도 모자랍니다.”
하고, 또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말한 것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는데, 몸은 먼 길을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국문(國門) 앞을 지나가면서도 대궐 안에 들어가 하직 인사를 할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이 경경하여 흠모하는 마음만 한갓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저의 하찮은 충성심을 살펴 주셨습니다. 내사(內使)가 임하여 오매 성상의 말씀이 측달하고, 진귀한 갖옷을 하사받으매 따사로운 기운은 봄이 돌아온 듯합니다. 이에 마치 섬돌 위에 올라가서 다시금 용안을 우러러 뵙는 것만 같은 바, 비록 죽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사는 해가 될 것입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르고 대궐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정이 쏠려 감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상소를 보고 상께서 경연 석상에서 하교하기를,
“김상헌의 상소를 보니 그가 직접 쓴 것인 듯한데, 이는 바로 영결하는 뜻이라서 차마 읽을 수가 없다.” 하고는 이어 몇 줄기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비통해하였다. 상께서 대신에게 묻기를, “경들은 김상헌을 만나 보았는가? 그의 뜻이 어떠하던가?”
하니,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조금도 꺾이는 뜻이 없었는바, 저들에게 가서 말하는 즈음에 노여움을 촉발시킬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에 친구들이 모두 그 점을 가지고 경계시켰습니다.” 하자, 상께서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더란 말인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행동거지가 한가로워서 평소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용만(龍灣)에 도착하자, 청의 사신이 묻기를, “국왕(國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올 때에, 당신은 홀로 청나라를 섬길 수가 없다고 말하고 하성(下城)을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내가 늙고 병들어서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근년에 나라에서 주는 관직과 작위(爵位)를 어찌하여 받지 아니하였는가? 군사를 도와달라고 하였을 때에 어찌하여 저지하고 만류하였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의 지조(志操)를 지켰고, 나는 나의 군주(君主)에게 고(告)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것을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청의 사신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한집안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다른 나라라고 말하는가?”라고 하므로, 선생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는 각기 나누어진 땅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다른 나라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이 광경을 구경한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칭찬하고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은 마침내 선생을 북쪽으로 끌고 가 12월 26일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35 』
1641년(인조 19, 선생 72세) 1월 8일 청나라의 한(汗, 임금)이 또 심문하므로 선생이 전과 같이 대답하셨는데, 드디어 구속(拘束)하여 옥(獄 북관)에 가두었다. 겨울철(12월)에 선생의 질병이 심해지자, 청나라 한이 의주(義州)로 내보내게 하였다. 36
『 떠날 때 세자궁(질관) 앞에서 세자가 내려주신 술을 보고 감격하며 시를 짓기를,
요하에서 해 넘기며 고국을 그리워할 때 / 經歲遼河故國思
일심으로 세자궁 가까운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더니 / 一心猶幸近靑闈
내일 아침 나 홀로 요하를 건너 돌아가니 / 明朝獨渡遼河去
세자궁 돌아보며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 回首靑闈涙滿衣
하였다. 떠날 때 세자에게 작별인사를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5인이 세자의 관 앞을 걸어 지나가다가 문을 향하여 땅에 엎드려 우니, 세자가 문에 나와서 바라보고 궁관을 시켜 약을 주게 하였다. 37 』
『 1642년(선생 73세) 1월 2일에 의주에 도착하여 이 부인(李夫人)의 부음(11월에 안동에 있다가 졸하였다)을 듣고 슬픔 속 예의를 갖추었다. 세자에게 편지로서 안부하였으며 항상 생일에는 비통한 심정이 배는 더 간절하였으므로 집안사람들이 술잔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생일날 의주의 수령이 술과 안주를 보내왔다. 이에 선생께서는 감회를 읊은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 산의 송백 속에 무덤 잠겨 있거니와 / 故山松栢鎖幽宮
지난날에 즐겁던 일 꿈속으로 들어오네 / 疇昔歡娛入夢中
오늘에는 한잔 술을 어느 누가 올리려나 / 今日一杯誰爲進
흰머리로 천리 밖서 눈물 줄줄 흘리누나 / 白頭千里泣無窮
1643년(인조 21 선생 74세) 1월에 의주에서 심양으로 끌려가셨는데 이는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잠상(潛商)한 일이 발각되어 오랑캐들이 체포해 봉황성(鳳凰城)에 가두었는데 이계가 조정의 기밀을 오랑캐들에게 고하면서 선생에게까지 파급되게 하고서 자신은 모면할 생각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계를 잡아다가 처형하였다. 호차(胡差 예전에, 중국 청나라에서 오던 사절)가 서울에 도착해서는 이계가 말한 내용을 가지고 조정을 힐문하였으며, 청나라로 돌아가다가 의주에 이르러 다시 선생을 북쪽으로 끌고 간 것이다. 39 』
최명길을 만나다
『심양의 동관에서 용호로부터 심문[적신(賊臣) 이계(李烓)가 잠상(潛商) 한 일]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북관에 구금되었는데 이때 최명길도 잡혀와 구금되어 벽 하나 사이로 만났다. 지천(최명길)은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명(明)에 알리고 명나라에 협조하였다. 이를 알게 된 청은 1643년 (인조 21년)에 최명길마저 심양으로 압송하였다.
최명길이 시를 지어 경권(經權)의 뜻에 대해 말하기를, “끓는 물과 언 얼음이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이 모두 옷일세.〔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그 운에 차운하여 시를 짓기를
성패는 다 하늘 운에 달려 있거니 / 成敗關天運
의에 맞는 것인가만 보아야 하리 / 須看義與歸
제아무리 아침 저녁 바뀐다 해도 / 雖然反夙暮
어찌 옷을 뒤바꾸어 입어서 되랴 / 詎可倒裳衣
권도 쓰면 현인도 혹 잘못될 거고 / 權或賢猶誤
정도 쓰면 뭇사람들 못 어기리라 / 經應衆莫違
이치 밝은 선비에게 말해 주나니 / 寄言明理士
급한 때도 저울질을 신중히 하소 / 造次愼衡機 40 』
두 분의 화해
『 최명길은 김상헌이 명예를 위하는 자라 판단하고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강화론이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풀고 시를 지으며 우정을 나눴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 / 從尋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 / 頓釋百年疑
김상헌의 시를 받은 최명길이 답시를 주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네 / 吾道如環信所隨
머나먼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41 』
이경여(李敬輿)가 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내기를,
두 어른 경ㆍ권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 二老經權各爲公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 擎天大節濟時功
이제야 원만히 함께 돌아간 곳 / 如今爛熳同歸地
모두가 남관의 백발 늙은이일세 / 俱是南館白首翁 42
심양옥의 조선인들
김상헌(金尙憲), 조한영(曺漢英), 신득연(申得淵), 채이항(蔡以恒), 박황(朴潢), 이경여(李敬輿), 최명길(崔鳴吉), 등이 잡혀와 있었다. 43
배사를 거절하다
여름에 풀려서 질관(質館, 인질인 세자가 머물던 관소)으로 보내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수종(隨從)하게 하고 한(汗은 崇德帝로 청의 제 2대 황제)에게 배사(拜謝)하게 하니, 최명길이 선생을 팔꿈치로 건드려 함께 배사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기꺼이 따르지 않자 오랑캐가 억지로 시켰는데, 끝내 땅에 드러누워 버렸고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다. 44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
모두 6년 동안 있으면서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청인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45
명(明) 나라가 멸망하다
쇠약해진 국력은 멸망 직전(병자호란 이후)에는 이자성(李自成 1605-1645)의 난(亂 1644년) 앞에 무릎을 끌을 지경으로 새로이 발호하는 여진족에게 접수당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거듭되는 실정에다 천재지변까지 더해 17세기 초반 각처에서 농민군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세력화한 이자성의 군대가 1644년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그때까지 청에 맞서 잘 버티던 명(明)의 무장 오삼계(吳三桂)가 청군을 맞이하여 산해관(山海關 6000㎞ 넘는 중국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천하요새로 중원대륙인 ‘관내’와, 오랑캐의 땅 ‘관외’를 가르는 변방 거점에 있다)으로 들어감에 따라 청군은 북경에 무혈입성하고 명의 잔여 세력들이 남경에서 남명(南明)을 세우고 저항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공격 앞에 무너졌다. 이로서 명은 멸망하였다.
이자성과 오삼계가 중국의 지각을 흔들어 천하를 바꾸어 놓았으니 어찌 중국(明)의 통한(痛恨)이 아니랴! 이때 청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시(詩)로써 이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그 일부를 안내한다
『 사신 되어 조회 가서 지난날에 빈객 되매 / 奉節朝周昔作賓
바다 같은 황제 은혜 배신에게 미치었네 / 皇恩如海到陪臣
하늘과 땅 뒤엎어진 오늘날을 만나서는 / 天翻地覆逢今日
죽지 않아 부끄럽게 의를 등진 사람 됐네 / 未死羞爲負義人
이어
수심 속에 한밤중에 닭이 우는 소리 듣자 / 愁聽荒鷄半夜聲
요하 강물 풍랑 일어 한이 아니 가라앉네 / 遼河風浪恨難平
서생 필력 쓸모없어 부끄러운 맘 드나니 / 書生筆力慚無用
어느 누가 천도에서 놀란 구묘 위로하랴 / 誰慰天都九廟驚 46 』
5, 등대지기
1645년(인조 23, 선생 76세)에 청이 소현 세자(昭顯世子) 일행과 돌려보내시니 수행(隨行)하여 돌아왔다. 일행이 서교(西郊)에 이르자 선생이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였으나, 임금이 회보(回報) 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석실(石室)로 나왔다. 47
이때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끝부분 「 7,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의 증언 」 편에 별기(別記)한다.
4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卒)하자, 선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문상하고 바로 물러났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하여 상소장을 32번이나 올리니, 비로소 체임(遞任)되어 바로 돌아왔다. 48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때 출사표(出仕表)
참고 : 청음 연보
때 | 효종 | 나이 | 직 책 과 행 적 |
1649 | 원년 | 80 |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등극. 대신과 헌부가 진계하여 머물러 있게 하기를 청함. 8월에 좌의정,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라고 명받았다. 받들어 〈인조대왕행장(仁祖大王行狀)〉을 윤색하여 올렸다. 공구수성(恐懼修省)하는 도리를 진달. 8월에 좌의정. 상소로 극력 사임하고 또 11차례나 정고하니, 체차하고 영돈녕부사. 9월과 10월에 사직을 원했으나 불가함. 11월에 장수가 될 만한 인재들을 천거하게 해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김집(金集)을 머물러 있게 하기를 청하였다. 12월에 말미를 받아 소분(掃墳)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상께서 인견하고는 위로하며 유시하였다. |
1650 | 1 | 81 | 1월에 상소를 올려 권계(勸戒)하는 뜻을 진달 하였다. 은퇴 시킬 것을 진언. 녹봉과 말을 지급받음, 사직을 거듭하여 요청 |
1651 | 2 | 82 | 5월에 인조대왕의 대상(大祥)에 참석.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는 방도에 대해 진달 하였다. 또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석실로 돌아왔다. |
1652 | 3 | 83 | 유소(遺疏)를 올렸다. 6월에 병세가 위독해졌다. 상께서 어의(御醫)를 보내다. 25일 을축일-2경(更)-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였다. 8월 18일 정사에 석실의 선영 안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산등성이에 예장(禮葬)하였다. |
1656 | 7 | |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완공되었다. 12월 14일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여 선원(仙源) 선생과 나란히 향사(享祀)하였다. |
1649년(인조 27, 선생 80세) 5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빈천(賓天)하고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등극하였다.
상(효종)이 즉위하여 큰일을 해보려고 다시 불러 정승을 삼았는데 거듭되는 사직을 말씀드리니 1651년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셨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진달(陳達)하였는데, 그 대략에, “바야흐로 지금 정사(政事)의 호령(號令)이 공의(公議)를 거듭 저버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편안하기 어려운 상황과 두려워할 만한 형세는 비유하자면 살얼음 위를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큰 뜻을 분발(奮發)하여 조종(祖宗)의 부탁한 중책을 저버리지 마소서.”라고 하고, 인하여 은퇴하기를 애원하여 마지아니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것을 윤허(允許)하였다.
조정(朝廷)의 관료(官僚)와 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모두 힘써 머물기를 청하였지만 선생의 뜻은 이미 결정되어 돌이킬 수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사대(賜對)하고 예우(禮遇)를 우대하여 보냈다(연보에는 1651년 최종 허락 받음). 선생이 경계(警戒)의 말을 진달 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그 대요(大要)는 군신(群臣)과 백성(百姓)에게 죄를 얻는 일이 없도록 할 것과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남의 착한 일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대행왕(大行王)의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에는 모두 궁중에 들어가서 문상하였고, 상소를 올려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방도를 진술(陳述)하였다. 49 』
임종을 앞두고 검소한 묘역과 제례를 당부
『 1652년(효종3 선생 83세) 6월에 병세가 위독해졌다. 상께서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였다. 25일 을축일-2경(更)-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셨다. 유서(遺書)가 있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유계(遺戒)를 손수 써 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글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 거기에 이르기를,
“묘 앞에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작은 묘표(墓標)만 세우고서 관향(貫鄕)과 성명만 기록하라. 상제(喪祭)와 길제(吉祭)는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해 아름답게만 하느라 예제(禮制)를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당을 옛 제도대로 회복하지 못하여 유감스럽기 그지없으니, 집안의 물력(物力)이 다시 지을 만하게 되기를 기다려서 먼저 사당을 세우되, 한결같이 옛 제도대로 하여 나의 뜻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초상 때 관(棺)은 크고 높게 하지 말며, 옷가지와 이불은 몸이나 겨우 두를 정도로 하며 매장하는 데 쓰는 여러 도구는 검소한 제도를 따라서 하기를 힘써서, 나의 평소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영침(靈寢)에는 붓과 벼루 및 평상시에 읽던 책 몇 질을 놓아두라.”
하였다. 이 이외에도 역시 훈계한 몇 조목이 더 있다. 선생께서는 또 심관(瀋館)에 억류되어 있을 적에 일찍이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는 이어 묘지명을 지어 놓았는데, 그 묘지명에 이르기를,
지성은 금석에다 맹세하였고 / 至誠矢諸金石
대의는 일월에다 매달았다네 /大義懸乎日月
하늘과 땅이 굽어 살피시거니 / 天地監臨
귀신에게 질정할 수가 있다네 / 鬼神可質
옛 도에 합하기를 바랐건마는 / 蘄以合乎古
오늘날에 도리어 어긋났구나 / 而反盭於今
아아 백대 세월 흐른 뒤에는 / 嗟百世之後
사람들이 나의 마음 알아 주리라 / 人知我心
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그 묘지는 쓰지 말라고 명하였으므로, 단지 이 명(銘)만 묘석에 새겼다.
유소(遺疏)를 올렸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 병을 앓아누워 있으면서 유소를 짓고는 자제들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올린 것이다.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자질을 가진 몸으로 요행히 여러 대의 조정에서 은혜를 입어 지위가 숭반(崇班)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티끌만 한 보답도 하지 못하고 한갓 죄만 쌓아 왔습니다. 병자년(1636, 인조14)과 정축년(1637)의 난리 이후로는 벼슬할 생각을 끊었으며, 중간에 다시 화를 당하여 온갖 어려움을 두루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도 선왕께서 초야에 있던 신을 부르시어 삼공(三公)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신은 은혜로운 명에 감격하여 마지못해 한번 나아갔으나, 허물만을 쌓은 여생이라 힘을 쏟아 진력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고향 땅으로 물러나 지내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상을 만남에 이르러서는 남다른 은총을 과분하게 받았습니다. 이에 구구한 저의 마음속으로는 단지 사류(士類)를 현양하고 강유(綱維)를 진작시켜 새로운 교화를 펴는 데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뜻을 조금도 펴 보지 못하고 성상의 은덕을 저버린 채 낭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질병과 근심 걱정으로 인해 점점 더 고질병이 되었으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목숨이 거의 다하게 되었는바, 다시금 천안(天顔)을 뵙는다는 것은 이생에서는 이제 끝나 버렸습니다. 이에 멀리 대궐을 우러러보면서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는 결초보은하겠다는 충심만 더할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처음 왕위를 물려받던 때에 품었던 뜻을 더욱더 가다듬으시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버리지 마시어, 선한 사람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 실제적인 덕을 잘 닦아 왕업을 넓히소서. 그리하여 우리 동방이 억만 년토록 무궁할 아름다움의 기반을 크게 닦으신다면 신은 비록 죽어 구천에 가 있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기운이 없어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정원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하늘이 사람을 남겨 두지 않고 내게서 원로를 앗아갔으니, 매우 슬프고 슬프다. 이 유소를 보니 말이 아주 간절하고 훈계가 매우 지극하다. 나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 더욱 독실하니 몹시 탄복스럽다. 그러니 가슴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근신에게 하유한다.” 50 』
기사일에 상께서 승지 이척연(李惕然)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상께서 소복(素服) 차림으로 거애(擧哀)하고자 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대신이 상의 뜻을 제대로 따라 주지 못하여 일이 마침내 거행되지 못하였다.
모갑(某甲)에 상께서 교리 심지한(沈之漢)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왕세자 역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부증(賻贈)하였다. 8월 18일 정사에 석실의 선영 안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산등성이에 예장(禮葬)하였다.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경성(京城)에 있는 옛집에 모여서 망곡(望哭)하고 또 물품을 부의하였다. 장사를 지냄에 미쳐서는 먼 곳에 사는 선비들로서 일찍이 문하에 나오지 못했던 자들도 많이 와서 곡을 하고 글을 지어 제사한 다음 돌아갔다. 51 』
사신은 논한다. 옛 사람이 “문천상(文天祥)이 송(宋)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 고 했는데,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52
운명(殞命) 이후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6월 25일에 동교(東郊)의 석실(石室) 재사(齋舍)에서 돌아가셨는데 현 안동김씨 서윤공 종가댁이 그 터전일 것이다. 석실의 선영에 모셔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주에 세워진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 등에 제향 되었고 효종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6,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의 증언
현 안동김씨 대종중 회장이신 김위현 님은 2015년 3월 기사유교(己巳遺敎 2015 藝文春秋館)라는 책을 편역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청음(김상헌)의 관한 글을 옮기고자 한다.
청음의 셋째 손자이신 문곡[1629(인조 7)-1689(숙종 15). 자 구지(久之). 호 문곡(文谷). 시호 문충(文忠)]은 숙종 때 영의정을 역임하시고 최측근에서 지켜본 분입니다.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숙종[조선 제19대 임금(1661-1720, 재위 1674-1720)], 이때는 붕당정치로 말미암은 서인과 남인간의 첨예한 대립이 노정(路程) 되어 있었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 또는 己巳士禍)은 1689년 장희빈의 소생 윤(昀)의 원자 정호(元子正號 원자는 세자로 그리고 다음 대의 국왕으로 옮아간다.)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은 대립하였는데 남인의 주장(찬성)이 성립되어 서인은 몰락하게 된 사건을 가리킨다.
문곡은 진도로 유배되고 그해 3월 28일 사사(賜死)하라는 숙종의 어명으로 4월 9일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때 100여 명의 서인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 당하였다. 이에 따라 정권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쫓겨났고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서로 죽음을 부르는 당쟁 이는 대의 민주주의(代議 民主主義)와 삼권분립(三權分立)이 없는 왕조국가(王朝國家)인 조선(朝鮮)에서 붕당정치가 낳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기사유교는 1689년 문곡(金壽恒)의 셋째 아들인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시호 : 文康)이 기록한 것으로 아버지의 후명[後名 예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을 전후하여 침식을 같이 하면서 운명(殞命) 하기까지 지켜본 5일간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문곡은 청음(김상헌)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다. 이는 청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주의 깊게 읽어 보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발췌(拔萃)하고자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각주를 ( ) 안에 옮기는 등 그리고 소제목을 넣었다. 편역 하신 김위현 님께 거듭 감사함을 표한다.
내용 중 청음 관련만 옮깁니다
「 또 물으시기를 “증조부(청음 김상헌) 詩文을 문집에 싣지 않고 일찍이 집록(輯錄)해 두었던 것을 장차 어찌하올까요?”
대답하시기를 이 일은 별도로 한 편을 만들어서 집에 두려 하였으나 미처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문자는 거의 다 수습하였으니 너희들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집은 할아버지(청음)께서 산정하셨고 그 가운데 편지는 훗날 써넣은 것이다. - p 27 」
「?어릴 때 집에 계실 적에 어른들로부터 칭찬하고 기대하시는 말씀들이 있었으면 자세히 듣고자 합니다.?
대답하시기를 “내 어렸을 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실력이 없었으니 어찌 칭찬하고 장래를 기대하는 말씀이 있었으리. 내 다섯 살(1633)에 어머니(연안 김씨)를 여의고 외조모(초계 정씨)를 따라 원주(原州)에 가서 살았는데 외조모마저 돌아가시자 의탁할 곳이 없어서 아버지(同知公 金光燦)를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청음(淸陰) 諱 尙憲)]를 안동에서 만나 뵈었다. 이때 내 나이 열두 살(1640년)이었다(옮긴이 주 : 청음은 정축 하성 후(1637) 처음 풍산의 소산마을 안 청원루에 머물렀다. 조용한 곳에 있고 싶어 후 학가산 골자기인 서미동으로 들어갔지만 두 곳을 오가신 듯 하다. 청음의 심양 압송은 1640년 11월 안동의 풍산(소산마을의 청원루 있는 곳)을 출발하였다고 청음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서 할아버지(청음)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마침 머리를 빗고 계셨는데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남김없이 하나하나 주워 모으시면서 나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체, 털, 살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오직 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버리지 아니함이 곧 효도이니라. 어린아이들은 이 뜻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 p 29 」
「 간혹 고풍(古風 한시의 한 체. 古詩) 몇 구절이나 혹은 소부체(小賦體) 모양의 글을 지어 보여드리면 할아버지(청음)께서 곧 제목에 꼭 알맞은 언어를 제자리에 썼다고 칭찬하셨다. 일찍이 고전장부(古戰場賦)를 보시고 ‘기산풍혜취림 약유인혜삽삽(其山風兮吹林 若有人兮颯颯 산바람이 수풀에 부니 사람이 있다면 시원할 것 같구나)’ 이 한 구절에 비점(批點 시나 문장 등의 요소(要所), 묘행(妙行)에 치는 점)을 찍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비록 옛사람들의 시풍(詩風)이기는 하나 고전장(古戰場)이라는 시제에는 꼭 맞는 맛이 있다.’라고 하셨다. p 29
도정종고조부(都正從高祖父 청음의 生父로 金克孝) 님께서 일찍이 여러 아이들 중에서 누가 재주와 품격이 나은가를 물으시니 할아버지(청음)께서 대답하시기를 ‘모든 아이들이 특이한 재주는 없으나 모(某)의 글은 시제(詩題)에 집중하는 묘미가 풍기게 가장 잘 적용하니 과거를 보면 다른 아이들보다 꼭 먼저 합격할 것입니다.’고 하셨다.”p 29 」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평생 다른 사람과 사귀면서 서로 의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조정에 나가셔서는 논의만 하는 사안이라도 엄격히 정신을 집중하셨고 평소에는 묵묵히 계시면서 언행을 조심하셨다. 매번 집안 젊은이들이 모여 서로 담론을 하며 즐기는데도 병을 핑개 삼아 함께하지 않으셨다. 다만 상촌[象邨 우의정 신흠(申欽 1566-1628)]과는 그렇지 않으셨다. p 34
청음을 맞이하다
1645년 할아버지께서 심양[瀋陽 지금 요령성의 성도(省都). 입관(入關) 전의 청나라의 수도였다.]에서 돌아오실 때 내가 파주에서 맞이하였는데 그때 내 나이 17살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훤칠하게 자랐다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무릎 앞에 앉으라 하시었는데 손님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땅에 앉으니 점점 자리가 좁아져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니 할아버지께서 붙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악수(握手)하고 떠날 때 기뻐하시는 기색이 역력하셨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어제 밤에 창흡(昌翕)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다. p 34-35
「 나평강(羅平康 나만갑의 손자로 부친 나성두는 장인)의 답변에서 이것은 내가 무자년(1648 인조 26)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때 들은 설화(說話)이다. 당시에 들은 것을 즉시 적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하교(下敎) 하신 것을 기록한 것인데 다만 그 대지(大旨 대강의 뜻. 대의(大意))만 남아있다. 얼마 후에 다시 문장을 수정하고 윤문(潤文) 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창협에게 붓을 들라하고 내 구두로 수정하고 윤문하여 별지에 쓰게 하였다.
할아버지(청음)께서는 집안사람들을 보시고 관직에서 물러나서 이미 지나간 일의 잘못을 말씀한데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데도 잘못이 아니라 하겠는가?’ 하시고 문득 역정을 내시면서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말을 뭐하러 하는가?’ 하셨다. p 41-42 」
4월 8일(사약받기 하루 전)
「 창협(문곡의 둘째 아들로 金昌協 1651-1708 시호 : 文簡)이 묻기를
증조할아버지(청음)의 언행사적(言行事蹟)은 표(表), 지(誌), 연보(年譜) 등의 문자에 자세히 실려 있으나 그 자품(資稟)이나 기상(氣像)은 오히려 명백히 형용된 곳이 없으니 듣기를 원합니다.
대답하시기를
할아버지의 자품(資稟)은 천명간증(淸明簡重 마음이 맑고 밝아 흐림이 없고 번잡한 것을 싫어함.) 하셨고 기상은 종용안화(從容安和 유유자적하며 온순하고 인자함) 하셨으며 손님과 친구를 접대함에는 응대(應對)가 매우 간단하여 절대로 군말이나 번잡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뜻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또 돌려 말씀을 하셔서 화기애애하게 하셨으며 자신은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서로의 대화가 어느 정도 끝나면 상대하셨다. 평생 언론(言論)이 엄정(嚴正)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범할 수가 없었다. 즐겁지 않으면 눈에 엄한 시각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집에 계실 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심에는 자상하고 인자하고 후덕하셔서 일찍이 매우 화를 내시거나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자제(子弟)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을 하시고 꾸짖으셨다. 꾸짖을 때에는 의기(意氣)가 매우 엄하셨다. 우리 형제와 자매가 한 곳에 모여 간혹 조금 방종하게 서로 어울려 웃으면 꼭 불러다 꾸짖으시기를 ‘남녀 간에는 비록 동기(同氣)라 하더라도 절대 이같이 해서는 안 된다. 자손들이 부족함을 보고 배워 두루 삼가지 않으면 마음의 병이 될 것이다.
매일매일 일처리에 작은 것 하나하나도 조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소루(疏漏)하게 하지 않아야 자질구레한 번거로움에 병들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성품은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의상은 모두 간결한 법식을 따르셨다. 그러나 거처는 매우 산뜻하고 정결하게 하시었다. 성품은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의상은 모두 간결한 법식을 따르셨다. 그러나 거처는 매우 산뜻하고 정결하게 하시었다.
구포(鷗浦) 나공[羅公 : 우거 하시는 곳(옮긴이 주 : 년대가 확실하지 않다. 나만갑이 청에 압송된 기록이 없음으로 아마도 다음의 p 49-51의 임해옥을 가리는 듯 하다.문곡의 처조부로 나만갑[1952년(선조 25)-1642년(인조 20)]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위리안치되셨을 때 찾아뵈었는데 )이 겨우 한 칸 정도의 작은 집이었는데도 매우 깨끗이 청소하여 텅 빈 집에 티끌 하나 없었다.’고 하셨다. p 47-48 」
맑은 물이 흐른다.
「 식성(食性)도 매우 청결하시어 젓갈과 식초 같은 식품은 절대 입에 대지 않으셨다. 증조할아버지[옮긴이 주 : 교정하여 생부이신 극효(克孝) 일 것이다. 청음 세 살 때 백부 대효(大孝) 앞으로 입후 하였고 그때 부친은 별세하였다.]께서 할아버지(청음)의 이런 식성을 아시고 식사 때가 되면 할아버지 옆에 계시면서 젓갈과 식초는 상에서 내리라고 명을 내리실 때도 있었고 다른 행사에서도 꼭 살피어서 할아버지의 뜻에 맞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청음)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내 자품(資稟)은 본래 온화한 기풍(氣風)이 조금 있었다. 고 하셨다. 기문(記文 기록문)에는 엄격하고 매우 삼가는 성품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어서 매번 이것이 병이 되었는데도 이 성격을 뜯어고칠 수 없었다고 하였다. p 48 」
「 임해옥(臨海獄 언제인가? 잠시 바닷가에 유거(위리안치?) 하신듯하다.)에서 나오신 후에 지제교(知製敎 왕에게 교서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직책)로써 토역공신회제문(討逆功臣會祭文 1592년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공신의 제문인 듯하다)을 지어 올리셨다가 몇 번이나 화를 당하시었다. 그 글을 너희들은 보았느냐 아니냐? 하고 물으시기에 대답드리기를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 이하 생략(옮긴이 주 : 청음께선 글을 지어 올림에 글자 어구(語句)에서 몇 번에 걸친 곤욕을 치르셨다. (p 49-51) 」창협에게 답변한 것임
「 할아버지(청음)게서 정축년(1637년 인조 15 삼전도 치욕이 있던 해) 후 안동 풍산 구가(豊産舊家(지금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청원루 등 일부가 남아있다)에 사셨는데(옮긴이 주 : 1640년 문곡(김수항)은 그곳에 가 계셨고 할아버지와 함께 하였다. 청음께선 서미동과 청원루를 오고 가신 듯하다) 지금도 그 집이 남아있다. 그때 우리 형제[수증(壽增), 수흥(壽興), 수항(壽恒)]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 건너편 모(某)씨 집에 살면서 매일 아침 할아버지께 가서 문안드리고 청원루(淸遠樓) 아래 작은 방에 앉아서 온종일 책을 읽었다.
그때는 병자호란 직후라서 다른 서적은 없고 당본한문초(唐本韓文抄 당나라 본(本) 한유(韓愈)의 글을 초한 책) 및 기사본말(紀事本末 연대나 인물에 중점을 두지 않고 사건에 중점을 두어 그 전말을 적은 역사)만 있어서 그 책만 따라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한문(韓文)은 거의 100번 읽었으나 기사본말은 그때 보셨다. p 52 」
한밤중 산야를 방황하다
「 창협에게 답변에서 젊으실 때에는 주량이 매우 많았으나 중년에는 조심하셔서 절대로 과음(過飮하지 않으셨다. 만년에 안동에 계실 때에는 한 방에 늘 홀로 주무셨는데 집안 식구들이 침소에 술병을 가져다 두면 대략 네다섯 잔씩 마셨다. 매일 한밤중에 늘 홀로 주무셨는데 집안 식구들이 침소 곁에 술병을 가져다 두면 대략 네다섯 잔씩 마시셨다.
매일 한밤중에 꼭 혼자 일어나셔서 산야(山野)를 방황하셨는데 생각나시는 대로 멀고 가까운 곳을 돌아다니시다가 닭이 울 무렵 침소(寢所)에 돌아오시곤 하였는데 이슬에 몸이 흠뻑 젖으셨다. 곧장 술을 가져다 자작(自酌)하시고 잠드셨다. 다음 날 아침 집안 식구들이 가서 보면 술병이 비어 있었다.
청음 선생 문집 중에는 ‘야삼경에 집을 나가 남쪽 북쪽 밭둑에서 달을 쳐다보며 바람을 쫓아 홀로 걸었네(南阡北陌夜三更, 望月追風獨自行)’ 라는 일절이 나오는데 이때 지으신 것이다. p 52-53 」
본문 안내(옮긴이 주)
『 밤중에 일어나 홀로 걷다〔夜起獨行〕〉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선생(청음)께서는 병자년(1636, 인조 14) 이래로 평상시에 늘 걱정과 울분에 잠겨 있으면서 밤에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 서성거렸는데, 추위와 더위도 피하지 않았다. 그때(1638년)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남쪽 밭길 북쪽 논길 밤은 깊어 삼경인데 / 南阡北陌夜三更
달을 보고 바람 쫓아 외로웁게 길을 가네 / 望月追風獨自行
하늘과 땅 무정하고 사람들은 다 잠자니 / 天地無情人盡睡
백 년간의 이 회포를 누굴 향해 쏟아낼꼬 / 百年懷抱向誰傾 53 』
주량(酒量)
「 창집이 이르기를
“일찍이 영안위[永安尉는 홍주원(洪柱元). 1606년(선조 39) -1672년(현종 13). 선조의 사위로 자는 建中 호는 無何翁, 본관은 풍산, 정명공주와 결혼]의 연석에서 음주하신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라고 하니 대답하시기를 영안위의 어버이 수연(壽宴) 때의 일이다. 그때 월사(月沙 李廷龜1564 - 1635 영안위의 외조부)가 수석에 앉아 있었다. 주연이 한참 무르익어갈 무렵 할아버지(청음)께서 월사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선인(先人)의 수연석에 대감께서 오셔서 흠뻑 취하여 돌아갔다 하여 마음속으로 늘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오늘은 공을 뵙고 실컷 마시려 합니다. 라고 하시고 드디어 술잔을 들어 서로 교환하기 시작하여 잔만 차면 곧장 마시셨다.
월사가 할아버지께 말씀하시기를 영공(令公)의 주량이 이처럼 홍대(弘大)하신대 평일에는 절대 마시지 않으니 어떤 일입니까? 할아버지께서 말씀드리기를 나의 음주에는 두 가지 병이 있소. 하나는 술을 마신 후에 두통이 몹시 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취중에 반드시 우언(愚言)을 내뱉어서 다른 이들이 접촉하기를 꺼려함으로 마시지 못합니다. 고 하셨다.
이미 월사가 크게 취하여 쓰러지고 백주형제(白洲兄弟 백주는 이명환의 호. 1595년(선조 28)-1645년(인조 23). 시호는 문정(文靖)]도 대작하다가 모두 취하였다.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영안위를 불러 말씀드리기를 공(公)이 나와 함께 마셔야 하겠다. 라 하시고 드디어 바싹 다가가 앉으셔서 가만히 희언(戱言 익살로 하는 말)을 하셨다. 영안위가 술기운이 도는 것을 보시고 조용히 대작하시다가 밤이 깊어서야 주연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시는 길에 학곡[鶴谷 홍서봉의 호. 1572년(선조 5)-1645년(인조 25). 시호는 문청(文靖)]을 방문하시어 또 술을 마시고 가셨다. 영안위는 늘 그때 일을 말씀하시기를 평일에 대감을 반차(班次 지위의 순서)나 도로에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두려워서 가까이 못할 분이라 여겼는데 이날 손잡고 해학(諧謔 익살스럽고도 품위 있는 조롱)을 하시는 하는 자리를 가졌으니 마음에 늘 만행(萬幸)이라 생각하였다. 고 하셨다. p 53-54 」
7, 맺는말
이 땅에는 유사 이래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르던 여러 분은 흔적을 남겼으며 그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행적을 통한 평가가 진실을 가리키는지는 의문입니다. 깊이 없는 생각으로 세태(世態)의 편승하러 들지는 않았습니까? 현대에는 파고드는 영상물(映像物)과 쏟아지는 글이 바로 가리키기도 하지만, 편파적인 시각으로 기술되기도 해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옛날의 흔적을 바탕으로 한 시시비비는 그때의 모습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아니냐 이지 오늘의 잣대로 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의 김상헌의 네이버 캐스트의 실린 글의 댓글을 보면서 찹찹함을 금 할 수가 없습니다. 주화파(主和派)만 있고 척화파(斥和派)가 없었다면 그들(淸)에게 어찌 받아들였을 까요? 혼(魂)도 없는 나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까요? 청(淸)이 중국의 주인으로 자리 잡은 이후 원만한 관계로 역사를 엮어나갔음은 상승작용을 탄 두 파의 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대에 충실했고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당당하신 청음 김상헌, 청조차 감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세세연년 영원할 것입니다. 글을 쓰고 펼침에 바로 바라보고자 온힘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추적하고 조명함은 그 속에서 얻어지는 교훈이 우리나라의 밝은 앞날을 열어나갈 수 있는 가리킴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또는 발췌(출처) 한 곳
○ 고전번역원> 청음 연보
1, 4, 6, 8, 9, 12, 13, 14, 17, 19, 21, 28, 29, 33, 35, 38, 39, 40, 46, 50, 51, 53
○ 국조인물고> 김상헌 묘지명 (墓誌銘) -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2, 11, 15, 25, 31, 32, 36, 44, 47, 48, 49
○ 1996 동아닷컴> 전란(戰亂) 속에 꽃핀 이상주의자 金 尙 憲
3, 5, 12, 18, 20, 30, 33, 34
○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김상헌 7, 14, 20, 22, 23, 24, 27
○ 조선왕조실록의 김상헌 졸기 : 10, 13, 16, 45, 52
○ 위키백과> 병자호란>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 26
○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심양옥에 갇힌 사람들| 연려실기술
37, 42, 43
○ 네이버캐스트 최명길 편 : 41
○ 2015 藝文春秋館> 기사 유교(己巳遺敎 김위현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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