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선현들의 발자취

병자호란 그 시대적 배경

추읍산 2016. 5. 3. 11:58

병자호란, 그 시대적인 배경

 

 남한산성에 가면 현절사가 있고 그곳에는 병자호란 때 충성을 다한 오현(五顯 : 김상헌,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 그리고 정온)이 모셔져 있고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필자는 현절사에서 주관하고 최근(3월 31일) 발행한 현절사지(顯節祠誌)에 나오는 오현(五顯) 중 청음 김상헌을 맡았다. 그때 함께 보낸 글로 병자호란은 때의 그 배경을 이야기하였는데 반영 여부를 떠나 좀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는데 아래 안내하고자 한다.

 

병자호란[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은 조선이 개국한 이래 두 번째로 맞은 큰 외침이다. 임진왜란(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이 끝난지 38년(병자년), 상처는 아물지도 않았는데 그때는 만주 일대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발호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고려조 이하 회유와 정벌을 거듭하였고 조선 4대 세종대왕 때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으로 쫓아내고 투항하는 자들을 복속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수렵어로 민족으로 오랑캐 취급받았음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누루하치 아래 세력을 급격히 결집하고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명을 정벌함에 있어 명의 우방인 조선의 기를 눌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고 이는 정묘호란[1627년(인조 5)]에 이은 대규모의 침입인 병자호란을 불러왔다. 삼전도의 치욕, 그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조선

 

태어나고 성장하고 출사 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은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격변의 시기다. 조선은 훈구파[勳舊派 조선 전기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찬위(簒位)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가 퇴조하고 사림파[士林派 조선 중기인 16세기로 성종(1457-1494) 이후로 사화기(士禍期)에 재야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로 불리는 신정치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기득권층의 반발 속 퇴계 이황[李滉 1501년(연산군 7)- 1570년(선조 3)]을 따르는 영남학파(동인)와 율곡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를 따르는 기호학파(서인)가 등장하고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3

학파 간에 논쟁은 끼리끼리의 집단을 형성하였고 붕당정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과 이어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12월-1637년 1월)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로 말미암은 황폐화를 가져왔는데 깨닫지 못하고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동북아(중국) 정세

 

아직 세계를 알기에는 안개 속 이었을 것이고 중국을 통한 그리스도교(가톨릭)의 서양도 희미했을 것이다. 그저 대륙에는 중국이 있고 바다 건너에는 일본이 있다 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기다.

 

이웃이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중원(中原)을 차지하는 자가 주인으로 되었고 그곳에는 절대적인 비중(比重)의 한족(漢族)이 자리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어 왔는데 때로는 변방에게 내어주는 수모를 겪었으니 원(元 1271~1368), 청(淸 1616~1912)이 그 예이다.

 

조선(朝鮮 1392-1910)과 비슷한 시기에 개국한 명(明 1368년-1644년)은 한족(漢族)으로 변방인 몽고족이 세운 원(元)을 물리치고 중국의 지배자로 자리한지 250여 년이 흘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근간으로 하는 두 나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사랑으로 묶여 있었다. 찬란한 개국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쇠약하여지는가? 명(明) 또한, 피할 수 없음이나 빨리 온 느낌이다. 이는 누적되어온 내부적 요인과 갈등으로 말미암은 민심이반에서 천재지변까지 더하여 점차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조선에서의 임진왜란 참전으로 가속화되고 있었다.

 

여진족과의 관계

 

회고하건대 고려조 이후 끊임없는 외침에는 여진족이 크게 자리하였는데 회유와 정벌을 거듭하였다. 그들은 수렵 어로 민족으로 고려 때 윤관 장군의 분전(奮戰) 그리고 조선의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을 개척하고 압록강, 두만강까지 경계를 이루었고 귀순하는 무리를 복속시키기도 했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져 필요한 물건을 받고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미개한 떠돌이 존재인데 이는 중국의 분열정책으로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그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였음은 역사적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그들은 중국의 동쪽 지역과 압록강 이북인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에서 살았는데 이러한 변화를 인지한 족장 누르하치(1559-626)는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그를 구심점으로 여타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1616년(조선의 광해군 8년)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여 중원(中原)을 넘보게 되었다.

 

명(明)은 조선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주지하다시피 성리학(性理學)을 근본으로 하는 두 나라이고 명이 조선에서 상국(上國)으로 있었음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선(朝鮮)이란 국호도 명(明)의 가리킴을 따랐으며 임금의 즉위에는 추인(追認)을 붕어(崩御) 후에는 시호를 받았다. 모든 중요 문서에는 명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고 매년 또는 필요에 따라 사신을 받고 보냈는데 이는 그 결속이 깊고 사랑이란 끈으로 매여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에 명의 참전으로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