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스크랩]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추읍산 2018. 1. 9. 09:28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김 태 희*

1. 머리말
2. 정조의 선택과 안동 김문의
승리
3. 벌열 가문의 대두와 정치
참여의 축소
4. 노론 벽파의 축출과
세도정치로의 이행
5. 외척 세도가와 군주제적
질서의 관계
6. 맺음말


국 문 초 록
김조순의 집권은 정조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조는 왜 김조순 또
는 안동 김문을 선택했는가? 이즈음 정치세력 내지 정치지형에 나타난 추
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조의 탕평정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왜 정조가
죽자 세도정치가 출현했는가? 외척 세도는 종래 외척의 전횡과 어떻게 다르
며, 군주제적 질서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정조에 의한 김조순의 집권은 안동 김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했다. 안동
김문은 17세기 이래 주자학적 의리명분론의 상징이었으며, 영조를 즉위하
게 한 노론의 핵심이었다. 안동 김문은 정조의 지향에 부합했다.
붕당이 퇴조하고 가문이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벌열을 중심으로 정치
의 독과점이 추진되어 가는 큰 흐름이 있었다. 정조의 탕평은 일시적으로


* 다산연구소 소장, naturalriver@naver.com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6


이를 저지했을 뿐이다. 더욱이 탕평정치의 유산은 노론 벽파가 파괴해버렸
다. 노론 벽파가 축출되었지만 정치 참여 축소의 흐름은 결국 세도정치로
귀결되었다.
전제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유교정치의 여러 장치가 약화된 가운데, 벌열
의 배경을 지닌 외척 세도가가 비변사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권을 장악했다.
김조순은 자제력과 조정력으로 벌열 중심의 타협과 안정을 이뤘지만, 사족
층의 소외, 서민층의 불만이라는 시대적 문제에 대해 별다른 공업을 남기지
못했다.


주제어
김조순, 안동 김문, 세도정치, 벌열, 외척, 비변사, 정조, 순조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7


1. 머리말
楓皐 金祖淳(1765~1832)1)은 安東 金門의 일원으로서,2) 시기적으로
이른바 ‘勢道政治’의 시대3)를 연 사람이다. 김조순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세도정치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로만 파악할
수 없다. 김조순의 집권은 한 개인의 탁월한 정치적 역량도 작용했겠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는 일정한 시대적 추세가 반영되어 있다. 그의 집권을 조
선 후기 정치사의 큰 흐름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김조순의 집권은 正祖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純祖는 조의를 표하며 이렇게 회고했다.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
(정조 24, 1800)에 寧考(정조)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1) 풍고 김조순에 관한 연구는, 유봉학의 「풍고 김조순 연구」(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
학연구원, 한국문화 19, 1997)이 대표적이다.
2) 안동 김문에 관한 연구는, 이경구의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일지사, 2007)가
대표적이다. 다만 시적 범위가 정조대까지이다.
3) 대체로 1800년부터 1863년까지의 순조・헌종・철종 연간(1800~1863)의 정치를
‘勢道政治’라고 부르고 있다. 이 시기의 정치사에 관한 연구는 한국역사연구회(19
세기 정치사 연구반)의 조선정치사 (상・하)(청년사, 1990)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조선후기당쟁의 종합적 검토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 동방미디어, 2000; 박현모, 정조 사후 63년: 세도
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 , 창비, 2011;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
대: 정조와 19세기 , 신구문화사, 2009 등이 있다. 이 논문은 조선정치사 의 실증
적 연구 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만, 조선정치사 의 입장은 ‘세도정치’라는
이름으로 규정하는 것에 다소 유보적 태도이다( 조선정치사 상, 40면). 여기서는
일단 통상적 사용에 따라 ‘세도정치’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본디 세도의 한자
로 ‘世道’ 혹은 ‘勢道’가 쓰인다. 世道가 勢道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세도의 개념과
용법, 그리고 그 시기에 관해서는, 윤정애, 「정치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한국역사
연구회(19세기 정치사 연구반), 조선정치사(1800~1863)・상 , 청년사, 1990, 38
면 이하 참조.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8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
이 어제처럼 귀에 쟁쟁하다.”4)
정조는 왜 김조순 또는 안동 김문을 선택했는가? 이즈음 정치세력 내지
정치지형에 나타난 추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조의 탕평정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왜 정조가 죽자 세도정치가 출현했는가? 외척 세도는 종래 외척의
전횡과 어떻게 다르며, 군주제적 질서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런 논
제들에 관해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필자의 관점을 제시해보고자 한
다. 아울러 김조순의 집권과정에서 세도정치의 성격을 구성하게 된 주요 흐
름의 의미와 유기적 연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정조의 선택과 안동 김문의 승리
김조순의 집권은 정조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김조순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를 만났으며, 그의 ‘深知’를 얻었다.
“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
부터 이미 우뚝하게 世俗 밖에 뛰어났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오
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았다.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
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5)


4) 순조실록 순조32-04-03(기묘), “慟矣慟矣! 此何事也? 記昔庚申, 寧考執予小
子手而詔之曰: ‘今予以爾托于此臣, 此臣必不以非道輔爾. 爾其識之’, 事如昨日,
言猶在耳.” *이하 실록기사 국역은 국사편찬위원회 국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다
소 손질하여 사용함.
5) 순조실록 순조32-04-03(기묘), “容儀秀美, 器識宏達, 自少已卓然自拔於流俗
之外, 弱冠登第, 久處邇列, 以公直無隱, 受正廟深知, 特以他日輔幼之責托之.”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9


정조의 선택은 김조순 개인에 대한 신뢰도 있었겠지만, 그의 딸을 세자빈
으로 간택한 것은 그가 속한 安東 金門에 대한 고려가 컸다. 정조 9년
(1785, 을사), 김조순이 21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를 만났을 때, 정조는
김조순의 집안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그대는 故 相臣의 자손으로 금년 과거에 올랐으니, 일이 우연치
않아 내가 가상히 여긴다. 그대의 집안은 忠孝를 傳承한, 나라를 위
한 世臣이다. 그대가 집안의 名聲을 잘 계승해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대 한 집안의 福일 뿐만 아니라 장차 朝廷의 幸이
될 것이니, 그대는 힘쓰도록 하라.”6)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하면서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은 상투적인 것이기는
하나, 김조순이 속한 안동 김문에 대한 관심은 예사롭게 넘길 수 없다. 정조
는 日得錄 에서 안동 김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淸陰 金尙憲의 바른 道學과 높은 節義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敬服하는 바이니, 문장은 나머지의 일
일 따름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故相이라고 하지 않고 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韓愈와 曾
鞏이요, 그의 학문은 濂洛이라’고 한 것은 道學과 文章을 가리켜 말
한 것이고, ‘동해의 물과 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6) 정조실록 정조09-11-6(임자), “召見承旨假注書金洛淳, 上敎曰: 爾以故相之
孫, 登今年之科, 事不偶然, 予庸嘉之. 爾家忠孝相傳, 爲國世臣. 爾若克承家聲,
不忝所生, 則非但爾一家之福, 將爲朝廷之幸. 爾其勉之.” 김낙순은 김조순의 처
음 이름이며, 정조가 그를 ‘文正肖孫’이라고 일컫고, ‘조순’이란 이름을 주었다. 또
한 ‘풍고’란 호도 하사해주었다.(조두순, <永安府院君楓臯金公墓表>, 心庵遺稿
卷23, 한국문집총간 307책, 477면, “公諱祖淳, 字士元, 初諱洛淳, 正廟賜以今
名曰, 文正肖孫也. 又賜號楓臯.” <楓皐金公神道碑銘>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楓皐集 권17 부록, 보경문화사, 1986, 408면, “正廟乙巳登文科, 上召見甚喜曰,
文正肖孫, 初諱洛淳至是, 上賜今明.”)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10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節義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仙源文集 이
비록 몇 편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김상용・김상헌)의 雙節은 옛날에
도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文谷(김수항)이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고, 退憂(김수흥)가 자기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夢窩(김창집)
의 忠節과 農淵(김창협・김창흡)의 經術文章에다, 老圃澤(김창업・김
창즙・김창립)이 나란히 훌륭한 명성을 날렸으니, 참으로 전후에 드문
名閥이다.”7)


김조순에 대한 정조의 관심은 喬木 세가인 안동 김문에 대한 관심과 결부
되어 있었다.8) 김조순은 정조 10년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뽑혔다.9) 그런
데 정조 16년(1792)에 김조순이 5년 전에 패관소설을 읽다가 주의를 받은
사건이 새삼스럽게 재론되어 견책을 받았다.10) 이는 신해년(정조 15, 1791
년) 진산사건으로 천주교 문제가 악화된 데 따른 것이다. 정조의 문체정책
은 학문적 논거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천주교 문제로 인해 지극히 정치적


7) 弘齋全書 제171권, 日得錄 11, 「인물」 1, “金淸陰道學之正, 節義之高, 不獨
我國之所尊慕, 抑亦淸人之所敬服, 則文章特其餘事耳. 予於稱道時, 不曰故相,
曰先正者此也. 向來致祭文中, 其文韓曾, 其學濂洛云者, 指道學文章也; 東海之
水, 西山之薇, 擧以酹卿, 淸標是似云者, 指節義也. 仙源文集, 雖止數編, 兄弟雙
節, 古無其倫. 文谷之無忝厥祖, 退憂之不愧乃弟, 夢窩之忠節, 農淵之經術文
章, 老圃澤之聯芳趾美, 信乎前後罕有之名閥.”(原任直閣臣李秉模乙巳錄) 원임
직각 신 이병모가 을사년(정조 9, 1785)에 기록한 것이다. 文谷은 金壽恒으로 청
음 김상헌의 손자, 退憂는 김수항의 형인 退憂堂 金壽興이다. 夢窩는 김수항의 장
남 金昌集, 農淵은 김수항의 차남 農巖 金昌協과 3남 三淵 金昌翕이며, 老圃澤은
4남 老稼齋 金昌業과 5남 圃陰 金昌緝과 6남 澤齋 金昌立을 가리킨다. *이하 한
국고전번역원 국역 문헌은 번역원 제공 국역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다소 손질하여
사용함.
8) 정조실록 정조00-08-28(정묘). 집의 金亮行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약료
藥料를 사양하니, 비답하기를, “爾以喬木之裔, 文章道學, 可謂家世相傳. 予之欲
一致之之意, 誠深且切矣. 爾亦無一見予之心乎?”
9) 抄啓文臣題名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참조.
10) 정조실록 정조16-10-24(기축).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11


동기에 의해 제기한 것이었다.11) 김조순은 순응했고, 정조는 만족했다.
정조 24년(1800), 정조는 후계 작업으로 다망했다. 원자를 세자로 삼고,
관례와 책봉례를 거행했다.12) 이어서 세자빈 간택에서 김조순의 딸을 골랐
다. 정조는 첫 번째 간택의 의미를 그 이상으로 강조했으며, 김조순에게 手
書를 내려 말했다. “이 모두가 天命이요,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
요, 淸陰(김상헌)・文谷(김수항)・夢窩(김창집)・竹醉(김제겸)가 쌓아올린 경
사다. 경은 이제 나라의 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13)
이튿날 정조는 김조순 딸을 간택한 데 대한 만족감을 한껏 드러냈다. “마
치 그 집 門閥이나 취한 것 같고 또 왕실과 가까운 사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짐짓 빼면서도, 솔직히 말한다면서 다음
과 같이 말했다.14)


“현륭원을 배알하던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는 둥 마는 둥 하
고 있는데 무엇인가 아주 간곡하신 말씀이 분명히 있었다. 더구나 그
가문은 아주 훌륭한 德門・名族・閥閱로서 淸陰・文谷・夢窩・竹醉라는
號라면 부녀자와 어린애들까지도 다 아는 처지 아닌가. 어제 간택 장
소에 그 집 처자가 들어왔을 때 단장, 범절을 수수하게 꾸몄는데도 복


11) 김태희, 「正祖의 문체정책의 양면성: 학문적 성격과 정치적 성격」, 동양정치사상
사 제11권 제1호, 2012, 77~98면 참조.
12) 정조실록 정조24-01-01(갑인); 정조24-02-02(을유) 참조.
13) 정조실록 정조24-02-26(기유), 初揀旣成, 命朴宗輔護至本第, 諭以揀定之意
曰: “再揀三揀, 特外面文具. 國家事, 文具亦不得不顧, 將行再三揀, 而今之初揀,
卽昔之再揀也.” 又賜手書于金祖淳曰: “自初出轎, 殿宮於衆處子中, 特指曰此是
誰家處子, 引之至前一見, 上下莫不心悅誠服, 以爲初見. 此皆天命也, 陟降之所
賜也, 淸陰、文谷、夢窩、竹醉之積慶也. 尊, 今則爲國元舅, 處地與前不同, 尤
不可不自重也.” 김상헌-김광찬-김수항-김창집-김제겸-김달행-김이중-김조순
으로 연결된다.
14) 정조실록 정조24-02-27(경술), “今番揀擇之所屬意者, 自外人觀之, 則有若以
門閥取之, 又若以其近密之故, 而實則不然. …”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12


기가 얼굴에 가득하고 그야말로 群鷄一鶴이었다. 궁중 사람들은 그
가 처음 왔을 때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보려고 안달이었고, 자전과 자
궁께서도 보시고는 한눈에 좋아하셨다. 그리고 또 古禮를 폐할 수가
없어 國卜을 불러 물었더니, 모두 대길하다고 하였다. 이는 실로 황
천・조종이 주신 것으로 종묘사직의 막대한 경사다.”15)


정조는 발언한 것과 달리 김조순 가문에 대해 이미 마음에 두고 있었
다.16) 그 전 해(1799) 9월부터 수차례 迎春軒에 김조순을 불러 대화했다.
이를 김조순이 기록한 것이 「迎春玉音記」이다. 이러한 정조의 선택은 ‘右
賢左戚’의 원칙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외척의 도움은커녕 방해를 받았던
정조가 외척에 대해 좋은 감정일 리 없지만,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서는 강
력한 가문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보인다. 이 무렵 정조는 우현좌
척에 대해 실망스러운 결과를 피력하기도 했다. “평소 뜻이 우현좌척으로
어진 사대부를 친히 하는 효험을 거두려 하였으나 오히려 허다한 폐단이 있
었다”는 발언을 했다.17) 김조순은 정조에게, “戚里를 사대부처럼 쓰면 척
리도 능히 어진 사대부가 될 수 있고, 사대부를 척리처럼 쓰면 사대부도 어


15) 정조실록 정조24-02-27(경술), “拜園之夜, 不能着睡, 而方在假寢之際, 分明
有告戒之諄諄者. 況其德門名族閥閱甚盛, 如淸陰、文谷、夢窩、竹醉之號, 婦孺
皆知. 而昨日揀擇時, 其家處子之入來也, 粧开凡節, 皆從省約, 而福氣滿面, 超出
衆中, 眞所謂鶴立鷄群. 宮中之人, 於其始至, 不知爲誰某, 而無不聳瞻, 慈殿、慈
宮, 亦皆一見而嘉悅. 又以古禮之不可廢, 招問國卜, 咸曰大吉. 此實皇天祖宗之
攸賜, 宗社莫大之慶也.”
16) 이경구,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 일지사, 2007, 166~167면, “교목세가의 후예
이자 절의・도학・문장을 전하는 가문이라 표현하며 안동 김문을 상찬하는 것은 정
조의 개인적 호감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고 정국 운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
다.” 같은 책, 177면, “안동 김문의 행보는 사대부의 교목세가를 척신으로 육성하
려 하였던 정조의 구상과 일정하게 맞아떨어졌다. (중략) 결국 정조는 말년의 세자
빈 간택에서 일찌감치 김이중의 아들 김조순의 딸을 선택하고 天命이라 하며 안동
김문이 쌓아 놓은 세덕을 높이 평가하였다.”
17) 정조실록 정조24-04-15(정유), “蓋予素志, 在於右賢左戚, 以收親賢士大夫之
效, 而不但不見其效, 反有許多弊端.”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13


진 사대부가 될 수 없다”며, “이는 오직 導率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다”고 말
했다.18)
정조의 선택은 후계 안정을 위한 여러 옵션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의미 있
는 유력한 옵션이었다. 현실적으로 후계자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강력한
가문의 지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척신에 의한 혼란을 걱정하기보다 척신에
의한 확실한 지원을 기대했다. 다만 ‘왜 김조순의 안동 김문이었을까?’에 관
해서는 안동 김문이 갖는 조선 정치사에서의 위상과 정조의 통치스타일의
양면에서 재음미해볼 수 있다.
안동 김문은 인조반정 이후 반정에 참여하지 않는 서인의 흐름(소위 ‘淸
西’)을 잇고 있다. 안동 김문의 명성은 김상용・김상헌 형제에게서 비롯된다.
형제는 병자호란 때 자결과 척화로써 의리와 명분의 상징이 되었다. 병자호
란 이후 조선의 지배적 이념은 안동 김문의 지향과 함께했다. 안동 김문의
위상은 송시열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송시열은 김상헌과 그의 가문과 밀
접한 관계를 가졌다. 송시열은 김상헌의 아들 김수항과 학문적으로 교유했
다. 김상헌의 손자 김창협은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다.19)
김수항이 숙종 6년 기사환국(1680)으로 희생되었다가 숙종의 병신처분
(숙종 42, 1716년)으로 의리를 인정받았다. 이런 와중에 김수항의 유계20)
에 따라 조정에 진출하는 것을 자제하고 학문에 힘쓴 결과 안동 김문은 도
학과 문장에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조가 ‘農淵之經術文章’이라 말한
김창협과 김창흡, 석실서원을 이끈 김원행 등의 문장과 학문이 그 예다.
그러나 또 한 판의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경종 때 신축・임인년(1721~
1722) 옥사로 인해 노론의 4대신(金昌集・李健命・李頤命・趙泰采)이 죽음


18) 김조순, <迎春玉音記>, 풍고집 권17 별집, 보경문화사, 1986, 299면, “賤臣對
曰: 雖戚里用之如士夫, 李戚里能爲賢士夫之所爲, 則便是士夫也. 雖士夫用之如
戚里, 而不能爲賢士夫之所爲, 則士夫亦戚里而已. 此惟在於導率之如何矣.”
19) 이경구, 「조선후기 安東 金門의 의리 실현과 정치 활동」,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
학연구원(한국문화), 한국문화 30, 2002, 213~215면 참조.
20) 이경구, 조선후기 安東 金門 연구 , 일지사, 2007, 129면 참조.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14


을 당했다. 김창집이 역적으로 죽고, 집안은 참화를 입었다. 마침내 영조가
즉위하는 데는 노론 4대신의 희생이 있었다.21) 영조 즉위 후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김창집 등은 점차 신원되었다. 을해옥사(영조 31, 1755년)를 계
기로 노론 의리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얻게 되었다. 안동 김문은 명예를 회
복했을 뿐 아니라, 도학과 절의의 상징으로 더욱 추앙받게 되었다. 정조는
신임의리를 재확인했다. 김창집을 영조의 묘정에 배향했다.22)
정조의 선택에 의한 김조순의 집권은 안동 김문의 승리였다. 그것은 17
세기 이래 200년간 조선의 정신을 지배한, 척화파 김상헌을 상징으로 한 의
리명분론의 승리였다. 또한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사대신의 죽음을 통해 영
조를 옹립한 노론의 승리였다.
정조의 선택은 정조의 통치스타일로 설명해볼 수 있다. 정조는 의리탕평
에서처럼,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했다. 탕평윤음을 반포하면서는 과거의 명
분을 노론에게 주고 소론에게 통합의 지평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현실의 세
력관계를 기왕지사로 인정하면서도 더 큰 의리와 명분을 제시했다.23) 채제
공 세력에 대한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호했던 것처
럼, 현실을 인정하는 가운데에도 더 큰 의리와 명분을 제시하면서 다른 가
능성의 싹을 지원했다. 요컨대 정조는 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정하면
서도 의리와 명분을 견지했다. 그리고 사세의 추이에 따라 변화를 도모하면
서 자신의 의도를 구현했다. 안동 김문은 조선후기 척화 존주의리의 상징이


21) 그렇지만 신료가 택군했다는 점에서 군주인 영조로서 마냥 반길 것은 아니었다. 영
조는 김창집에 대해서는 신하로서의 입장을 의심하여 싫어하면서도, 안동 김문의
다른 구성원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영
빈의 후손들이기도 하거니와, 17세기 이래 안동김문이 차지하는 정치・사회적 위상
을 고려하여 후대하였다고 보인다.”(이근호, 「蕩平政局下 安東金門의 政治的 位
相: 英祖代 淸陰家系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한자한문연구
7, 2011, 57~58면)
22) 정조실록 정조02-02-25(병신).
23) 정조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서는, 김태희의 「정조의 통합정치에 관한 연구」(한국학
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박사학위논문, 2012), 162면 등 참조.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15


었고, 영・정조대를 연 신임의리의 상징이었다. 정조가 안동 김문을 외척으
로 선택하는 것은 의리명분과 현실을 함께 취하는 정조다운 결정이었다.
3. 벌열 가문의 대두와 정치 참여의 축소
외관상 정조가 왕실의 외척으로 안동 김문을 선택했지만, 사실은 안동 김
문이 왕실의 한 축을 차지한 것이다. 그만큼 왕실은 약화되었고, 사대부 친
족집단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이 강화되었다.
이건창은 黨議通略 에서 당쟁이 치열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로 ‘閥閱太
盛’을 들고 있다.24) 벌열이란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가문을
가리킨다. 정약용도 「通塞議」에서 나라의 인재를 당색・지역 등의 이유로
다 버리고,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벌열 몇 가문뿐이라고 말하고 있다.25)
정치세력으로서의 벌열의 등장은 정약용과 이건창의 논의에서도 분명하
다. 가문이 정치세력 단위로 기능하게 된 양상이 확연해졌다. 이는 조선 중
기 이후 주자성리학적 질서가 정착되면서 嫡長子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종법질서가 꾸준히 강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세도정치의 배경에 관한 한 연구는, 정치세력의 결집 양상이 가문 대 가
문의 관계를 위주로 했다고 파악했으며, 이는 “17세기이후 가속화되었던
친족관계에서의 宗法 질서의 강화와 문중조직의 범위와 영향력의 확대로


24) 이건창, 당의통략 , 당쟁이 극심했던 원인으로 8가지를 꼽고 있다. “其故有八. 道
學太重, 一也. 名義太嚴, 二也. 文辭太繁, 三也. 刑獄太密, 四也. 臺閣太峻, 五也.
官職太淸, 六也. 閥閱太盛, 七也. 承平太久, 八也.”
25)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권9, 「通塞議」, “… 其不棄之者 唯閥閱數十
家已矣.” 노론 시파에 속한 심노숭조차도 인재를 등용할 때 오직 문벌만을 중히 여
긴다고 한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재를 등용할 때 오직 문벌만을 중히 여긴다.
이는 출신 배경을 따지지 않고 현자를 등용한다는 원칙과 대를 이어 고위직에 기용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어긋난다. 당쟁이 성행한 이후로는 이 현상이 더욱 심해졌
다.”(심노숭 저, 안대회・김보성 역, 자저실기 , 휴머니스트, 2014, 402면)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16


인한 친족제도의 장기적인 변화”의 결과로 보았다.26)
친족 집단의 정치적 부상을 동아시아적 현상으로 파악한 연구도 있다.
“공적 주체로서 재정의된 친족 집단이 남송대 이후 통치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사실”에 주목하여 조선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았
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념적 기초를 성리학이 제공했다고 보았다.27)
이러한 벌열의 대두는 친족집단인 가문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세
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가문이 다른 어느 정치적・이념적 결사에 비
해 강고한 혈연적・학문적・경제적 결사체로 대두했다. 벌열 가문은 통혼・출
사 등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면서 차별적・독점적 지위를 강화했다. 그 결과
누대에 걸쳐 성장한 소수의 벌열 가문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26) 권기석, 「19世紀 勢道政治 勢力의 形成 背景(下): 조선후기 집권세력의 通婚關
係網 분석을 중심으로」, 진단학회, 진단학보 91, 2001, 181면, “이를 통해 전반
적인 정치세력의 형태를 검토해보면, 몇몇 유력한 개인의 가까운 친인척 관계로 구
성되는 개인중심의 親屬 관계를 기초로 결속되기보다는 소수의 유력 가문 사이의
집단적 연합관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개인
對 개인의 관계보다는 개인은 父系 宗族集團의 일원으로서만 기능하는 가문 對 가
문의 관계를 위주로 당시의 정치 세력이 결집되고 있는 추세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정치 세력 결집 양상의 변화는 17세기 이후 가속화되었던
친족관계에서의 宗法 질서의 강화와 문중조직의 범위와 영향력의 확대로 인한 친
족제도의 長期的인 변화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는 “문중조직의 강화로 지
속력과 결속력이 강화된 ‘가문’의 정치적 성장이 19세기 세도정치가 등장하는 배경
이 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세도정치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온 친족 관계의 변화에
서 비롯되었다”는 가설 아래 환국・탕평・세도정치 시기의 세 시기에서 각각 3년의
조사 대상 기간에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역임한 표본집단을 추출하여 소속가
문과 통혼망을 분석했다. 권기석, 「19世紀 勢道政治 勢力의 形成 背景(上): 조선
후기 집권세력의 通婚關係網 분석을 중심으로」, 진단학회, 진단학보 90, 2000,
125면 참조.
27) 김영민, 「친족집단의 정치적 정당성: 세도정치의 이념적 기초 해명을 위한 시론」,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47, 2012, 238면 참조. “성리학이 공적
가치의 담지자라는 지위를 친족 집단에게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친족관계에서 우
선적으로 성립하는 특질을 국가에서 필요한 정치적 덕성으로 재정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김영민, 같은 논문, 235면)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17


安東 金門이었다.28)


정치세력으로서의 벌열의 대두는 朋黨의 퇴조와 맞물려 있었다. 학연집
단과 관료집단이 결합된 정치세력으로서의 붕당을 대체하여 친족집단과 관
료집단이 결합된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또한 벌열 가문은 다른 한편
학문적 권위마저 획득하고 있다.
왜 붕당은 퇴조했나? 먼저 붕당 사이의 자기파멸적 싸움이 원인이었다.
조선의 붕당은 한때 붕당정치라 일컬을 만큼 융성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때는 공존과 경쟁의 논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종대 일진일
퇴의 환국정치와 경종 연간의 신임옥사에서 독점과 배제의 논리, 그리고 신
료들이 군주를 선택하는 목숨을 건 투쟁에서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한 반성의 정치가 영・정조대의 탕평정치였고, 그 주장이 ‘破朋黨’이었다.
붕당정치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로, 붕당론의 이론적 배경인 君
子小人論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29) 군자소인론은 자신은 군자당, 상대
방은 소인당이라 분류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공존과 경쟁
의 정치를 펴기 어려웠다. 실제적인 문제에 관해 활발한 공론으로 경쟁하기
보다는, 강한 의리명분론에 입각하여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옥사를 통한
살육과 배제로 승자독식을 추구했다. 붕당은 공존과 경쟁의 원리를 정착시
키지 못하고, 독점과 배제의 원리를 추구했다. 이러한 판국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패퇴한 붕당과 그에 속한 사족층은 정치권에서 탈락했다. 그 결과


28) 안동 김문은 그저 과거의 명성으로만 존속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통혼을 통해 그
위상을 유지하고 높였다. 가령 영조대를 보면 이렇다. “이른바 노론 4대신 가문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인 노론계 가문과 혼맥이 연결되며, 특히 영조대 후반 탕평을
주도한 풍산 홍씨 홍봉한 가문과의 혼맥이 주목된다. 또한 영조대 중반까지 역시
탕평을 주도하였던 소론 계열 풍양 조씨 조문명 가문과의 혼맥도 주목된다. 이들
혼맥은 안동 김문이 당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 사회적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
하다.”(이근호, 「蕩平政局下 安東金門의 政治的 位相: 英祖代 淸陰家系를 중심
으로」, 한자한문연구 7,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2011, 62면)
29) 김태희, 「정조의 통합정치에 관한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박
사학위논문, 2012), 19면 이하 참조.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18


상당수 사족층은 정치에서 소외되고 정치는 벌열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다.
한편, 붕당 문제와 관련해서 김조순 당시의 時僻 대립을 어떻게 볼 것인
가? 시벽 구분은 남북노소의 붕당만큼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주류 다수파
인 노론의 자기 분열의 하나였다. 정파적 수준이었다. 시벽 대립이 대칭적
인 것은 아니었다. 벽파는 소수이면서도 주장이 강했고 단결되어 있었다.
김종수・심환지 등이 주도했다. 정조의 정책에 타협적인 사람을 시류에 영합
하는 세력이라 비난했고, 그 과정에서 ‘僻派’라는 이름을 얻었다.30) 이에
비해 그 반대편으로 ‘時派’로 지칭되는 세력의 정체성은 약했다.
정조는 시벽의 대립 구도를 자신의 탕평정국을 운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벽파를 포용하고 훈수함으로써 정파
간 대립에 관여하고 세력관계를 조정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時’를 내세워
군주에 대한 충성과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時俗을 바로잡는다고 나섰다. 僻
派에 대해서는 궁벽되고 편협함을 비판하여 포용력을 요구하는 한편, 의리
내지 원칙을 견지하는 비판적 기능을 요구했다. 정조는 시파와 벽파의 기능
적 견제와 균형을 기대하고 있었다.31)
노론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정조 사후였다. 그런데 당시 심
환지 세력이 조정의 핵심적 지위에 있었던 것은 정조가 죽기 직전 탕평의
차원에서 정국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황이다. 을묘년(1795, 정
조 19) 이래 노론 벽파를 적극적으로 기용하는데, 이는 정조가 자신의 탕평
정국을 의도대로 운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갑작스런 서거로, 7월 순조가 즉위하고 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영조의 繼妃인 정순왕후는 鰲興府院君 金漢耈의 딸이었다.


30)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 푸른역사, 1998, 171면, “벽파는 학통 같은 뚜렷한
동질성을 공유했다기보다는, 왕실외척과의 연결을 도모함으로써 비로소 강화된 정
파다. 곧 벽파는 대외적으로 표방한 정치원칙과는 달리 왕실외척을 배제한 정조의
탕평정치에 반발하면서 결집된 세력이다.”
31) 김태희, 위 논문, 196~213면 참조. 이런 판단의 근거는, 최근 공개된 정조의 비밀
어찰의 분석 결과이다. 정조어찰첩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참조.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19


경주 김씨 가문으로 오빠 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은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洪鳳漢이 중심이 된 세력을 공격했다. 이때 후일 노론 벽파를 형성
한 김종수・심환지 세력과 결탁했던 적이 있었다.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
왕후는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다시 노론 벽파와 경주 김씨 가문이
결합되었다.
노론 벽파는 노론 사이의 정파적 수준의 존재로, 정조 사망 시점에 핵심
권력에 가장 근접해 있었지만 압도적인 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심환지 세
력은 정조 사후 유리한 지위를 활용해 더욱 강력한 세력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강경한 행동에 나섰다고 보인다. 신유옥사라는 도발적 양상은 벽파가
일반적 인식처럼 강고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며, 5년 후 병인경화로
숙청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순조 즉위 당시 정치지형은 노론 벽파 세력이 두드러졌고 크고 작은 여러
정파들이 존재했지만, 慶州金氏, 潘南 朴氏, 安東 金氏 등의 가문 만큼 명
확한 정치세력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벌열을 중심으로 한 정치의 독과점은 광범위한 사족층의 정치 참여를 배
제한 것이다. 그 결과 지배층 내에서 양극화와 배제가 심화되어 통치 기반
을 약화시키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괴리를 심화시킨다. 또한 벌열이 조정
을 장악한 경우에 가문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공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은 높
아진다. 세도정치기에 공직 지망자는 입신영달을 위해 세도가에 의존하게
되고, 수령들의 부패가 구조화되고,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봉건적 수취제제
의 가혹성은 심화되었다. 이제 정치적 문제는 민란과 같은 비정규적인 방향
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4. 노론 벽파의 축출과 세도정치로의 이행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단 김조순에게 위기였다. 정조의 후계 작업이
미완성인 채 김조순의 지위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노론 벽파와 정순왕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20


후의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1800년 11월 8일 사헌부 장령
李安黙이 서유린 형제를 탄핵했다.32) 신유년(1801) 1월 10일, 정순왕후가
斥邪 하교를 내렸다. 공격대상은 노론 시파, 소론, 남인에다 왕실인사까지
광범위했다. 주문모의 체포로 金建淳・金鑢등이 체포되었는데, 각각 김조
순과 가문관계와 친분관계가 있었다.
신유년 여름 權裕의 상소에서는 김조순에 대한 은밀한 공격이 시도되고
있었다.33) 훗날 순조실록 에는 다음과 그 상황을 같이 기록하고 있다.
“正廟 경신년(1800)에는 왕세자의 大婚을 김조순의 딸에게 정하
여 이미 再揀澤을 행하였고, 정묘께서 승하하자 정순대비께서 김조
순이 마땅히 肺腑之親을 삼을 만하다는 생각으로 戎垣에 발탁 제수
하였다. 이에 김용주의 무리들은 김조순이 같은 당이 아니라서 大禮
를 치룬 뒤에는 마침내 자신들의 우환이 될까 두려워했다. 드디어 대
사헌 권유를 부추겨 신유년(1801)의 凶疏를 꾸며내어 ‘都人 尹・姞,
曲堗徙薪’ 등의 말로써 현혹시키고 마음을 떠보는 조짐을 삼았으며,
또 ‘三揀擇을 하지 않는다’느니 ‘10월에는 吉日이 없다’느니 등의 말
로 온 세상을 유혹하고 위협했다. 그러자 심환지가 首相으로 老臣의
충심이라면서 권유를 칭찬하여 기미가 심히 위태하였는데, 정순대비
께서 확연하게 흔들리지 않아 감히 일을 이루지 못했다.”34)
노론 벽파도 김조순도 정조가 선택한 결과였다.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가


32) 순조실록 순조00-11-08(병술).
33) 순조실록 순조01-06-12(정사).
34) 순조실록 순조06-06-25(신축). “… 先是正廟庚申, 定王世子大婚於金祖淳女,
已行再揀, 正廟禮陟, 貞純大妃念祖淳當爲肺腑之親, 擢授戎垣. 於是龍柱輩, 以
祖淳非其黨, 恐大禮之後, 終爲己患, 遂嗾大司憲權裕, 粧出辛酉凶疏, 以 ‘都人
尹、姞, 曲堗徙薪’ 等語, 爲熒惑嘗試之漸, 又發 ‘三揀不爲’、‘月無吉’ 之說, 誘脅
一世, 煥之以首相, 奬裕以老臣忠悃, 機甚危迫, 賴貞純大妃, 確然不動, 未敢售.
…”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21


선왕의 정학론과 오회연교에서 명분을 끌어왔듯이, 김조순도 선왕의 권위
에 의존하는 양상은 마찬가지였다. 정순왕후가 쉽사리 김조순을 내칠 수가
없었다. 김조순을 총융사, 병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에 임명했다. 김조순은 노론 벽파의 장용영 혁파, 은언군・홍낙임・윤행임
처벌에도 반대하지 않고 은인자중했다. 마침내 순조 2년(1802) 10월에 國
舅가 됨으로써35) 결정적 지위를 확보했다.
당시 외척의 지위로 세 가문이 있었다.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는 慶
州 金氏였고, 정조의 妃이자 순조의 생모인 綏嬪은 潘南 朴氏였고, 순조의
처가는 安東 金氏였다. 순조 3년(180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
두고36) 순조 4년 정월부터 15세가 된 순조가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
다. 경주 김씨의 세력약화는 불가피했다. 노론 벽파의 주도권도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은 안동 김씨 가문과 반남 박씨 가문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순조 4년(1804) 노론 벽파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4월, 노론 벽파의
공격 선봉에 섰던 이안묵을 귀양 보냈다.37) 5월, 권유의 신유년 여름의 상
소가 문제되었고,38) 대사간 박윤수가 국문과 처벌을 요청했다.39) 권유는
의금부 추국에서 죽고 말았다.40) 6월 다시 수렴청정을 시도했던41) 정순왕
후는 순조 5년(1805) 정월에 죽었다.
노론 벽파의 최후는 김달순의 발언을 계기로 김한록의 ‘8자 흉언’이 폭로
됨으로써 결정되었다. 순조 5년 12월 우의정이 된 김달순이 순조에게 의리
천명을 주장하면서, 영남만인소의 주동자인 李瑀 등을 처벌하고, 사도세자


35) 순조실록 순조02-10-13(신해).
36) 순조실록 순조03-12-28(기축).
37) 순조실록 순조04-04-16(갑신).
38) 순조실록 순조04-05-14(임인).
39) 순조실록 순조04-05-20(무신).
40) 순조실록 순조04-05-26(갑인); 순조04-06-06(계해).
41) 순조실록 순조04-06-23(경진).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22


에게 불리한 일을 했던 尹在謙・朴致遠 등을 褒贈하도록 요구했다.42) 이듬
해(1806, 병인년), 순조는 김달순의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43) 며칠 후
형조 참판 조득영이 공격했다.44) 이어서 김한록의 ‘8자 흉언’이 거론되면
서45) 노론 벽파는 결정적으로 제거되었다. 김달순이 안동 김문의 사람으로
는 드물게 노론 벽파에 가담하고 있었지만, 안동 김문의 대다수는 시파로
분류되었다. 김한록의 발언을 거론하여 결정적 공격을 가할 계기를 제공한
것도 충청지역에 살고 있던 안동 김문이었다.
노론 벽파의 축출은 안동 김문이 주도하고, 박준원의 반남 박씨 가문, 조
만영의 풍양 조씨 가문이 협조한 성과였다. 노론 벽파가 전방위적으로 공격
했던 것과 달리 김조순은 몇몇 유력 가문의 협력을 통해 세력을 강화해 노
론 벽파를 축출했다. 여기서 김조순의 자제력과 조정력이 돋보인다.
노론 벽파가 축출되었지만 정치는 정조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정치사를 대체로 붕당정치-환국정치-탕평정치-세도정치로의 변천


42) 순조실록 순조05-12-27(병오).
43) 순조실록 순조06-01-06(갑인), 上曰: “右相擧條中, 李㙖、朴夏源等事, 係是
近來事也, 固當商量處分. 而至於朴致遠、尹在謙事, 事在久遠, 大關義理, 不可
不議審爲之. 故考見<政院日記>, 則入於洗草中. 使右相覓納兩書, 而得見原本,
則果是不忍見、不忍聞之事.” 순조는 영조와 정조가 일부러 세초한 사안에 대해
김달순이 다시 거론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44) 순조실록 순조06-01-15(계해). 조득영의 공격 배경에는 반남 박씨 가문이 김조
순 가문과의 협력으로 돌아선 변화가 있었다. 순조실록 순조07-10-29(정유).
박종보 졸기에 벽파 전횡에 대해 초기에 소극적이었지만, 순조 6년(병인년)에 벽파
를 제거하는 데 힘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庚申初, 以元舅之親, 與聞密勿, 而性慈
諒, 頗稱懦弱. 及丙寅義理處分, 亦其夾贊之力也.” 오수창, 「정국의 추이」, 조선
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990, 82~83면. 최성환, 「 한중록 의 정치사
적 이해」, 역사교육 115, 2010, 153~154면 참조.
45) 순조실록 순조06-05-13(경신) 등. 도승지 金履永의 소장에 나온 사실로, 사도
세자가 죽은 후 김구주와 정순왕후의 당숙인 김한록이 “죄인의 아들은 왕통을 이을
수 없고[罪人之子 不可承統], 태조의 자손이라면 어느 누구든 왕이 될 수 있다[太
祖子孫 何人不可]”고 말했다는 것이다. 권오영, 「김한록(1722~1790)의 사상과
정치적 역정」, 조선시대사학보 33, 2005, 221~230면 참조.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23


으로 요약할 수 있다.46) 그런데 정조의 탕평정치가 상당한 성과를 보였는데
도,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출현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관해서
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47)
첫째, 정조의 개혁정치가 반동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견해가 있다.48) 개
혁과 반동이라는 대립 구도는 명쾌한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정조가 여전히 수구 이념인 주자학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 등 정
조 정치의 보수적 측면에 관해서도 해명이 필요하다.
둘째, 정조의 왕권 강화책의 부작용 내지 부수적 결과로 보는 견해가 있
다.49) 그러나 이는 군주제의 일반적인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군주제에
서 영명한 군주가 있을 때는 관계없지만, 군주가 공백상태이거나 무능한 군
주 또는 포악한 전제군주가 등장했을 때는 문제다. 군신공치의 통치이념과
재상제를 통해 보완하고자 했던 유교국가의 기본 문제이기도 했다. 세도정
치가 출현한 원인의 하나는 될지언정, 필연적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셋째, 정조에게 공론정치의 붕괴의 책임을 묻기도 한다.50) 그러나 당시
의 언론이 이미 정적 제거를 위한 인신공격과 편협한 당론으로 전락한 양상
이 뚜렷했다. 물론 그러한 당론이라 하여 부정할 수 없겠지만, 언론기관의
특권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정조에게 공론정치를 무너뜨린 책임을 묻기 어


46) 이태진 외,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개정판), 태학사, 2003 ;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편, 조선후기당쟁의 종합적 검토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등 참조.
47) 정조의 탕평정치와 세도정치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김태희의 「정조의 통합
정치에 관한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박사학위논문, 2012),
252면 이하 참조.
48) 이태진, 「정조: 유학적 계몽절대군주」, 한국사시민강좌 13, 일조각, 1993; 김준
석, 「18세기 탕평론의 전개와 왕권」( 동양삼국의 왕권과 관료제 , 국학자료원,
1999), 한국 중세 유교정치사상사론 2 , 지식산업사, 2005; 김용흠, 「19세기 전
반 勢道政治의 형성과 政治運營」, 韓國史硏究會, 韓國史硏究 132, 2006; 정석
종, 「정약용과 정조・순조 연간의 정국」,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 한길사, 1994;
강만길, 「정약용시대의 경제사정」, 정다산과 그 시대 , 민음사, 1986 등.
49) 정옥자,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 일지사, 2000.
50) 박현모, 정치가 정조 , 푸른역사, 2001.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24


렵다고 생각한다. 정치 참여의 확대와 다양한 형태의 언론활동을 통해 공론
을 조성할 만한 정치 환경을 만들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넷째, 정조가 김조순에게 세도를 위임한 사실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
다.51)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조의 의도를 단정하거나 정조의 결정적 책임을
묻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정조가 유력 가문을 후계자 국왕의 國舅로 삼
는 것은 후계자 국왕의 안정을 위한 정조의 여러 포석 가운데 하나로 생각
할 수 있다. 김조순을 선택한 1차적 결과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주효했다. 2차적 결과로 노론 벽파를 물리친 김조순과 그의 집
안이 세도정치를 행하고 이와 함께 국왕의 힘이 약화된 원인은 다른 면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정치세력 내지 정치조직의 전체
적 지형이 문제다.
이밖에 개혁의 한계로 보는 견해,52) 권력기반 축소를 원인으로 보는 견
해,53) 지배체제의 한계로 보는 견해54) 등이 있다. 아무래도 탕평정치와 바
로 연결하여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정조의 탕
평정치를 그간 좋게만 해석한 면도 없지 않다. 좀더 시야를 넓혀 조선 후기
의 큰 정치사적 흐름 속에서 탕평정치와 세도정치를 파악해야 한다.
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좀더 시야를 좁혀 정조의 탕평정치에서 세도정치
로 이행하는 데는 2단계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1단
계 노론 벽파의 집권과정과 제2단계 노론 벽파 축출과정이 그것이다.
제1단계에서는 정조 사후 집권한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가 정조의 遺志를


51) 유봉학, 정조대왕의 꿈: 개혁과 갈등의 시대 , 신구문화사, 2001 등. 김용흠은
「영춘옥음기」 해석에 대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갑자년 구상을 염
두에 둔 것으로 보았다(김용흠, 「19세기 전반 勢道政治의 형성과 政治運營」, 한국
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32, 2006, 206~207면 각주 87번)
52)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 푸른역사, 1998.
53) 홍순민, 「19세기 전반 정치사의 내용과 성격」, 한국역사연구회(19세기 정치사 연
구반), 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54) 오수창, 조선시대 정치, 틀과 사람들 ,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0. ‘지배체제의 필
연적 와해과정’으로 보았다.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25


내세우면서 사실은 정조의 정치를 파괴했다. 정조에 의해 겨우 잔존하여 탕
평 정국의 일각을 이루던 남인 채제공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었다. 불과 5년
정도의 집권 기간이었지만 정조의 탕평정치의 유산을 파괴하기엔 충분했
다. 노론 벽파 정권은 정치세력으로서 비전을 갖지 못한 세력이었던 만큼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보다는 여러 시도와 가능성을 파괴하는 데 큰 구실
을 했다.55)
제2단계에서는 노론 벽파 세력의 축출을 통해 유력한 벌열 가문이 집권
했다. 이제 더 이상 붕당의 의미를 갖는 정치적 세력은 남아있지 않게 되었
다. 노론이 주류 다수가 된 가운데 몇몇 가문과 정파만이 남았다. 김조순의
정국 장악은 새로운 정치참여나 확대를 도모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득권을
갖춘 가문들의 참여와 이익보장이었다. 정치는 벽파 집권 이전의 정조의 탕
평정치로 복원되지 않았다.
이러한 두 단계 과정을 거쳐서 19세기 정치지형은 18세기와는 사뭇 다른
정치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단계적 사건을 통해 전혀 다른 정
치로 이행하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적잖게 볼 수 있다.56) 제1단계 변화과정을
주도한 정치세력이 리더십이나 정치조직이 강고하지 못할 때 나타날 수 있
다. 그 정치세력이 시대적 흐름을 잘 주도하지 못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후기 정치사의 전개를 돌아보면, 탕평정치든 세도
정치든 정치적 기반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원리를 공유할 수 없었다. 탕평정치는 붕당 간에 벌어지는
살육전을 저지하고 탕평 군주의 영도 아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지


55) 유봉학,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 , 일지사, 1995, 147면,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
음으로 어린 순조가 등극하고 정조의 친위세력들이 구심점을 잃고 이합하는 과정
에서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에 뒷받침된 벽파의 집권은 정조대까지의 정국의
기조를 뒤바꾸어 놓고 말았다.”
56) 1917년 러시아혁명이나 1960년~1961년 한국현대사의 정치 변동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제1단계와 제2단계가 다른 역할을 분담하면서 종국적으로 큰 역사적 변동을
일으켰다.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26


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왕권에 의해서 유지되었던 미봉적이고 취약
한 평화였다. 무엇보다도 양란 이후 지배이념으로 채택했던 주자학적 의리
명분론의 일관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변화를 반영하고
전망하기보다는 기존의 이념을 더욱 강하게 묵수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노론 벽파의 파괴 후, 경쟁할 만한 다른 정치세력 없이 유력 가문들만의
타협과 조정에 의해 정치가 이뤄지는 상황이 되었다. 김조순 세력은 노론
벽파를 물리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지만, 그것은 축소된 정치지형 내에
서 벌열 중심으로 이익을 조정한 안정을 의미했다. 정조의 시대로 회귀하거
나 정조가 의도했던 정치적 과제를 실천하지 않았다. 정조가 군주의 입장에
서 포용하려 했던 정치세력도 허용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의 집권과 축출이
라는 2단계 과정을 거쳐, 정조의 탕평정치기와는 판이한 세도정치가 등장
한 것이다.


5. 외척 세도가와 군주제적 질서의 관계
김조순이 죽었을 때, 실록은 그의 정치적 위상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密勿을 돕고 밖으로
는 彌綸에 임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다.”57) 순조와 김조순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기본적으로 협
력・의존관계이면서도 갈등・긴장관계였다. 다만 김조순의 정국 장악력이 확
실해지면서 순조는 적극성을 잃는 대조적인 모습이 보인다.58)
김조순은 반남 박씨 가문의 협력으로 벽파와 경주 김씨 세력을 축출했다.


57) 순조실록 순조32-04-03(기묘), “祖淳旣處肺腑, 內贊密勿, 外任彌綸, 殫誠竭
忠, 身佩安危者, 三十餘年.”
58) 오수창은, 순조가 19세(순조 8년) 되던 무렵부터 정사에 주도적으로 나섰으나, 순
조 11년 홍경래 난(평안도 농민전쟁)을 겪으면서 꺾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파악했다.
오수창,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990, 85~89면.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27


그러나 순조 12년, 대사헌 조득영을 통해 박종경을 탄핵했다.59) 이때 순조
는 박종경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 김조순에 대한 견제였다. 순조 17
년 12월에 박종경이 죽자 순조는 그동안 의지하고 위임했던 회고와 함께 슬
픔을 표시했다.60)
박종경이 죽자 더 이상 김조순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없게 되었다. 순조
19년 4월에 조득영・채홍원이 석방되었다.61) 그해 5월, 김조순의 친아들 김
유근이 비변사 제조로 차출했다.62) 8월에는 조만영의 딸과 효명세자의 혼
인이 결정되었다. 김조순의 장악력과 유화책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 무
렵 순조 19년 사간 任㸁의 상소는 순조와 김조순의 대조적 상황을 보여주
고 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내린 聖德으로 큰일을 하여야 할
때를 당하여 善治를 구하는 정성이 지극하십니다만, 즉위 이후로 침
묵이 너무 지나쳐 政令 등 사무를 일체로 뭇 신하에게 일임하시고,
章奏와 稟啓에 모두 ‘允’ 자로 判下하시며, 可否에 대하여 裁決하시
는 분부가 전혀 없으시니, 利害의 구분과 公私의 구별이 이제 기약하
지 않아도 저절로 權柄에게 돌아갑니다. 賂門이 크게 열려 뇌물이 공
공연히 거래되어, 한 관직, 한 과거에 있어서도 族黨이 아니고 巨室
이 아니면 곧 뇌물이 첩경입니다. 京司를 말한다면 각 衙門, 각 營門
의 錢穀 비축은 한갓 文簿만을 보유하고, 멋대로 지출하며 서로 감싸
주어 창고가 바닥이 나게 되었습니다. 감영・병영・邑倉의 비축도 京


59) 순조실록 순조12-11-07(병자). 이 기사에 나온 박종경의 권력남용에 대한 묘사
는 외척 세도 양상에 대한 신랄한 지적으로 예시되고 있다.
60) 순조실록 순조17-12-01(경오), 敎曰: “忠獻公(박준원)及故判書(박종보), 相
繼卒逝之後, 朝家之倚仗於此重臣(박종경)果何如也? 文武柄用, 委任無比, 重臣
亦自任國事, 隨處殫竭矣. 昨聞其病少差, 意謂一時之證, 筋力素强, 豈料一夜之
間, 遽聞其長逝驚愕之心, 若夢非眞, 追惟往事, 新舊之悲, 交切于中. …”
61) 순조실록 순조19-04-04(을축).
62) 순조실록 순조19-05-25(을유).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28


司처럼 거의 소모되었고, 뇌물이 거래되는 바에 威福을 멋대로 시행
하고 있습니다. 인재를 말한다면, 선비가 비록 才行이 있더라도 권문
에 인연이 없거나 뇌물에 힘입는 바가 없으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는 것은 거의 緣木求魚와 같습니다. 온 세상이 도도하게 오직 이익에
만 치닫고 있으니, 인심이 타락됨은 오로지 요행을 바라는 뇌물에서
말미암습니다. 진실로 그 근원을 구명한다면 전하께서 지나치게 침묵
을 지키시고, 모든 사무의 재결을 일체 뭇 신하에게 맡기신 소치입니
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의 마음으로 결단하시고 특별히 공평 정직
한 사람을 가려서 이 일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기약하되, 죄를 범한
바가 드러난 경우에는 贓汚의 율을 시행하소서.”63)
순조가 신하에게 일을 일임해 버리고, 權柄에게 모든 것이 돌아가 관직과
과거가 族黨과 巨室이 아니면 뇌물이 첩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관아는
부패했다. 세도가의 전횡과 전반적인 부패 양상에 대한 고발이었다. 구체적
거명은 없었다. 이런 정도의 고발이라면 그 다음 단계로 진전이 있어야 할
테지만, 오히려 임선의 처벌이 문제되었다. 순조는 임선을 두둔했지만 신료
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임선을 유배 보냈다.64)
세도정치의 양상으로 외척의 전횡을 들기도 하는데, 외척의 전횡은 군주


63) 순조실록 순조19-04-08(기사), “司諫任㸁疏略曰: 今我殿下, 以天縱之聖, 膺
有爲之際, 求治之誠, 非不至矣, 臨御以來, 淵默太過, 凡係政令事爲, 一委群下,
章奏稟啓, 竝以允字判下, 初無絲綸之可否裁決, 利害之分, 公私之別, 於是乎, 不
期然而自歸於權柄. 賂門大開, 苞苴公行, 一官一科, 如非族黨, 且非巨室, 則卽是
賄賂之捷徑也. 以言于京司則各衙門各營門錢穀之儲蓄, 徒擁文簿, 互相擅發, 互
相掩置, 以致空蕩. 藩閫邑庫之藏, 亦如京司, 幾盡虛耗, 惟賂所行, 威福專擅. 以
言乎人才, 則士雖才行, 無緣權門, 無賴苞苴, 筮仕選職, 殆同緣木求魚. 擧世滔滔,
惟利是趨, 人心之陷溺, 專由於倖門之賄賂, 而苟究其源, 則殿下淵默太過, 裁決
庶務, 一委於群下之致也. 伏願斷自聖衷, 別擇公平正直之人, 使之按覈, 期於釐
整, 現出所犯者, 施以贓汚之律. 批曰: 所陳可不留念? 京外經費事. 令廟堂察飭.
倖賂云云, 非人人可指, 則爾何不直斥誰某, 而如是糢糊乎? 殊欠直截矣.”
64) 순조실록 순조19-윤04-24-(을묘) 등.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29


제에서 항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외척의
전횡은 어디까지나 국왕의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요, 조정의 신료와 재야의
사족들의 견제를 받을 수 있었다. 군주의 전제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둔 여
러 유교정치의 견제장치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외척 세도가는 일반 외척과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65) 혈연으로
서 국왕과 가장 가까운 종친은 혈연으로 세습되는 군주체제에서 역모의 중
심이 될 수 있으므로 늘 잠재적 반역자로서 정치적으로 견제 받았다. 따라
서 왕실 가문은 갈수록 약화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면 앞에서 보았듯 유
력한 사대부 가문은 통혼을 통해 세력을 강화시켜왔으며 왕실과 통혼을 하
기도 했다. 누대에 걸쳐 벌열로 성장해 이미 정치적 세력을 확보한 가문에
서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이 된 경우, 그 외척은 종래의 일반 외척과 영
향력이 같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왕실에서 외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도가가 이후 왕실 혼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또
한 환경도 달랐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붕당과 이와 연관된 사족들의 견
제력은 아주 약화되었다. 유교통치의 견제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
었다. 더욱이 세도가는 비변사를 통해 정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했다.
김조순은 領敦寧府事로서 순조 2년(1802) 10월부터 순조 32년(1832)
4월, 즉 종신까지 비변사 당상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66) 또한 비변사에
문중 인사를 포진시켜 완전히 장악했다. 비변사 인사에는 상피제의 구애도
받지 않았고, 임기의 제한도 없었다. 이로 인해 세도 가문의 권력을 자가 재
생산할 수 있었다.67) 세도 가문에 대한 견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65) 권기석, 「19世紀 勢道政治 勢力의 形成 背景(下): 조선후기 집권세력의 通婚關
係網 분석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91, 진단학회, 2001, 180면, “흔히 척족정치
의 전형으로 지목되는 세도정치가 역사적으로 국왕이 족외혼을 하는 한 언제나 출
현 가능성이 있는 일반적인 외척의 전횡과는 구별되는 세도정치의 독특한 면모였
다. 그 결과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의 성관명으로 불리는 문중 집단이
‘척족 세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고 ….”
66) 오종록, 「비변사의 조직과 직임」, 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515~520면.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30


다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군주제적 질서가 전제되고 있었다. 즉 외척 세
도가라도 결코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없었다. 그 권위에 의존해야 하
는 존재다. 세도정권 하에서 왕권이 약화되는 가운데에서도 군주 내지 왕실
의 이름과 권위를 높이는 작업은 한층 강화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김조순은 왕실의 전례에 적극적이었으며,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가령 홍재전서 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68) 정조의 묘
인 건릉 이장을 발의하고 추진했다.69) 혜경궁의 誌文도 썼다.70) 그러나 왕
실의 권위를 높이는 것과 국왕의 실권을 강화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세도
가의 선택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면서도 실권을 자신이 취하는 방향이 될 것
이다. 이로써 국왕권은 명목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군주제적 질서 속에서는 역량이 아주 뛰어난 군주가 등장하거나 정치세
력 관계에 변동이 생기면 군주와 세도가의 실질적인 역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 순조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시행함으로써 김조순의 세력이 어려
움에 처하게 된 데서 알 수 있다. 순조 27년부터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맡기게 되면서, 조정 내에는 권력관계의 변화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다. 이로 인해 김조순은 정치적으로 도전을 받게 되지만, 세자가 순조 30년
5월에 죽고 만다. 세자가 죽자 김노, 홍기섭, 이인부 등이 붕비로서 공격 받
았다. 이 공격에는 김조순이 관여했다고 보고 있다.71) 훗날 고종의 등장에
따라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문을 제압하게 된 것도 모두 군주


67) 오종록의 「비변사의 조직과 직임」과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
1863 (하), 청년사, 1990).
68)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 효형출판, 2001, 198~201면.
69) 정조대왕 遷陵誌文 참조. “嗚呼! 我烈考正宗大王, 旣大葬于華城顯隆園之東麓,
是曰健陵, 國人之有識慮者, 皆竊憂其地淺夷, 非聖人安久之藏. 後二十二年辛巳
三月九日己未, 我孝懿王后薨, 將筮兆于先陵, 領敦寧府事臣金祖淳, 上疏極言陵
地可憂狀, 請精擇吉土爲萬年之圖 …”
70) 순조실록 순조16-01-21(신축).
71) 순조실록 순조30-06-22(무신). 오수창, 「정국의 추이」, 조선정치사 상, 103
~104면.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31


제적 통치 질서 속에 군주권이 부정될 수 없다는 대전제가 작동하기 때문이
었다. 왕권약화와 외척 발호 사이의 인과 관계의 방향은 일률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조순의 세도 장악 요인으로 외척의 지위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문과 정
치 환경 등 앞에서 본 여러 요소와 함께 개인의 역량도 작용했다. 김조순은
세도가라는 지탄에도 불구하고 ‘厚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72) 정치적 포
용력과 조정력은 오랫동안 세도를 얻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되었다.73)
그러나 그의 한계를 실록은 말하고 있다. “본래 성격이 仁厚함에 지나치고
人倫을 돈독히 좋아하므로 그 흐름이 더러 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功業을 자처하지 않았
다.”74)
김조순은 신중하고 仁厚했다.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대대적으로
정적제거에 나섰던 노론 벽파의 폭력성・편협성과 대비되었다. 유력 가문 사
이의 타협과 조정을 적절히 이뤄내, 지배층 내부의 폭력적 분쟁을 종식시키
는 데는 기여했다. 그러나 특별한 공업이 없었다. 時務에 힘쓰는 경세가로


72) 황현은 김조순의 인품이 후덕하다고 평가 받는다면서, 그 후손들은 부정적으로 평
가했다. “장김의 선대인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문곡 김수항, 몽와 김창집 같은
분들은 모두 덕망과 공훈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높았다. 김조순도 글을 잘 짓고 일
을 잘 처리하여 후덕하다고 칭찬을 들었지만, 그 자손들이 탐욕스럽고 완고하며 교
만하고 사치하여 참으로 외척이 나라를 망치는 화의 시작이 되었다.”(황현 저, 허경
진 역, 매천야록 . 서해문집, 2006, 16면)
73) 유봉학, 「풍고 김조순 연구」, 한국문화 19, 266면. “풍고는 세도가로서 그의 영
향력 행사를 가급적 자제하고 매사를 큰 파문없이 원만하게 처리하려 노력하는 미
덕을 보였으며, 정치적 위기에 임하여서도 언제나 조정론을 펴서 피해자를 줄이고
정적까지도 지공(至公)한 일을 위해서라면 받아들일 자세를 보였다.” 유봉학, 위
논문, 267면. “순조대 이후 외척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 부상한 풍고가 세도를 장악
하고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식의 포용력 발휘와 정치적 입
장 조정의 결과이었다. 병인경화 이후 연립하였던 순조의 외가 반남 박씨의 박종경
에 비하여 그는 ‘후덕’함으로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74) 순조실록 순조32-04-03(기묘), “然素性過於仁厚, 篤好人倫, 故其流也或至於
泛博, 又謹愼之至, 事多循常, 蓋不以功業自居也. 後因廷議, 追配正宗廟庭.”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32


서의 업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백성 또는 지역민의 불만과 성장이라는 시대
적 상황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6. 맺음말
정조가 왕실 외척으로 안동 김문의 김조순을 선택한 것은 정조의 통치스
타일에 부합했다. 정조는 늘 의리명분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이었고, 현실
의 인정 위에 事勢에 따른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김조순의 집권은 안동
김문의 정치적 승리였다. 그것은 17세기 이래 김상헌으로 상징되는 주자학
적 의리명분론의 승리였으며,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사대신의 죽음(신임옥
사)을 통해 영조를 옹립한 노론의 승리였다.
정조의 안동 김문 선택은 단순히 왕실이 외척을 선택하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벌열 가문이 왕실을 압도할 정도로 위상이 바뀐 것이다. 그 배경에
는 17세기 이래 주자성리학의 종법 질서가 강화되는 가운데 친족집단이 정
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해온 흐름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치세력으로
서의 붕당은 퇴조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들어 붕당이 자기파멸적 과정을
겪고, 붕당정치가 정치원리로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공존과 경쟁의
논리가 제시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점과 배제의 논리에 입각했던
붕당의 운명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군자소인론에 입각한 붕당론의 근원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정조의 선택과 김조순의 집권 사이에는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과 노론 벽
파의 위협이 있었다. 김조순이 벽파와의 충돌을 피하며 순조 2년 국구의 자
리를 확정지었으며, 순조 6년에는 노론 벽파와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세력
을 완전히 축출했다. 김조순이 인내심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안동 김문의
지원과 다른 척족 가문의 협조를 끌어낸 결과였다.
정조 사후, 노론 벽파는 탕평군주 정조의 유산을 파괴했다. 벽파가 축출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33


되고 나서 정조의 정치로 회귀하지 않았다. 탕평 정국이 파괴되어 축소된
정치지형 내에서 벌열의 중심으로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정조의 정치와 세
도정치와의 연관성에 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크게 보아 승자의 독점으로
정치적 참여가 약화・축소되어 가는 것이 기본적 흐름이었다. 정조의 탕평은
일시적으로 이를 저지하고 통합을 미봉했을 뿐이다. 노론 벽파의 집권과 축
출이라는 2단계 과정을 거쳐, 정조의 탕평정치기와는 판이한 세도정치가
등장한 것이다.
왕실 외척은 군주제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존재다. 군주의 권위에 의존하
는 한편, 유교 군주제의 다양한 견제장치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외척 세
도가는 벌열 가문의 배경으로 왕실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왕실 권력에만 의
존하는 일반 외척과는 질적인 수준이 달랐다. 또한 세도정치기에는 유교 군
주제에 내장되어 있는 여러 견제장치가 약화되거나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원적 기구인 비변사를 세도가가 용이하게 장악하여 활
용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척세도는 본질적으로 군주제적 권위
에 의존했다. 김조순이 왕실 권위를 높이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왕실의 권위는 높아지지만 왕권이 강화되지
않는 명목과 실재의 괴리현상이 생길 수 있었다. 외척 세도가와 국왕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협력의존관계이면서 내부적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는 관
계였다. 또한 군주제라는 대전제 속에 양자의 실질적인 역관계는 역전될 수
도 있었다.
김조순은 신중하고 온건한 정치가로서 세력 가문 사이의 타협과 조정을
이뤄냈다. 노론 벽파의 폭력성・편협성과 비교된다. 그는 낙론계 경화사족으
로서 문화적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뤄낸 정치적 안정
이란 몇몇 기득권 가문 사이의 것이었다. 집권 이후 몇몇 가문의 사적인 권
력남용이 구조화・공고화되는 흐름이 이어졌다. 사족층의 광범한 소외, 서민
층의 체제불만에 대해 시대가 요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이 논문은 2015년 5월 8일(금요일)에 투고 완료되어,
2015년 5월 18일(월요일)부터 6월 9일(화요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5년 6월 10일(수요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34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35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순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김조순, 楓皐集 , 보경문화사, 1986.
정조, 弘齋全書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
權奇奭, 「19世紀 勢道政治 勢力의 形成 背景(上): 조선후기 집권세력의 通婚關
係網 분석을 중심으로」, 진단학회, 진단학보 90, 2000.
權奇奭, 「19世紀 勢道政治 勢力의 形成 背景(下): 조선후기 집권세력의 通婚關
係網 분석을 중심으로」, 진단학회, 진단학보 91, 2001.
김영민, 「친족집단의 정치적 정당성: 세도정치의 이념적 기초 해명을 위한 시론」,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47, 2012.
김용흠, 「19세기 전반 勢道政治의 형성과 政治運營」,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32, 2006.
김태희, 「정조의 통합정치에 관한 연구」, 한국학연구원 정치학박사학위논문, 2012.
박현모,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 , 창비, 2011.
유봉학,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와 19세기 , 신구문화사, 2009.
유봉학, 「풍고 김조순 연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 19, 1997.
이경구,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 일지사, 2007.
이경구, 「조선후기 安東 金門의 의리 실현과 정치 활동」,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
학연구원(한국문화), 한국문화 30, 2002.
李根浩, 「蕩平政局下 安東金門의 政治的 位相: 英祖代 淸陰家系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한자한문연구 7, 2011.
李成茂, 조선시대 당쟁사 2, 동방미디어, 2000.
李在喆, 「備邊司의 政治的 位相과 機能」,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91, 2008.
이태진 외,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개정판), 태학사, 2003.
임혜련, 「19세기 國婚과 安東 金門 家勢」,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57, 2014.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990.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정치사 1800~1863 (하), 청년사, 1990.
大東漢文學 (第四十三輯)
36
ABSTRACT
A Review on Kim Jo-soon's Seizure of Power
in Political History of Joseon
Kim, Tae-Heui*
75)
Kim Jo-soon(金祖淳)'s seizure of power originated from King Jeongjo
(正祖)'s choice. Why did King Jeongjo choose Kim and Andong Kim's
family(安東 金門)? What trend was seen in politics power change in the
late of Joseon(朝鮮)? In spite of King Jeongjo's Tangpyeong(蕩平,
Impartiality)-politics, why Sedo(勢道)-politics appeared after the death of
King Jeongjo? What's difference between the Sedo-politics and usual
arbitrariness by the maternal relatives of the King? Which relations the
Sedo-politics did have with monarchy order?
Kim Jo-soon's seizure of power means the political victory of Andong
Kim's family. Andong Kim's family had been the symbol of neo-Confucian
justice and cause since 17C. And the family was the core of Noron(老論)
who made King Yeongjo ascend the throne. The family accorded with
King Jeongjo's orientation.
The faction(朋黨) was in decline and Family was rising as political
power. There was a growing trend of political monopoly or oligopoly by
meritorious families(閥閱). It was stopped temporarily by King Jeongjo's
Tangpyeong-politics and that's all. The heritage of King Jeongjo's
Tangpyeong-politics was destroyed by Noron Byeok-pa(僻派). Even
though Noron Byeok-pa was ousted, the trend of political monopoly or
* Chief, The Institute of Dasan Studies, naturalriver@naver.com
Key Words Kim Jo-soon( ), Andong Kim's : 金祖淳 Family(安東金門), Sedopolitics(
勢道政治), A Meritorious Families(閥閱), A Maternal
Relatives of the King(外戚), Bibyeonsa(備邊司), King Jeongjo
(正祖), King Soonjo(純祖)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김태희)
37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樂民(장달수) 원글보기
메모 :

'안동 김씨 > 贊成公(達行) 가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고 김조순의 서화론(書畫論)  (0) 2018.08.18
용문산 그리고 박물관  (0) 2018.06.16
인릉 기신제  (0) 2017.10.20
백련봉 아래로 달려갑니다  (0) 2017.08.17
옛터전에 서서  (0) 2017.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