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수증의 묘표(墓表)

추읍산 2018. 6. 25. 13:39

국역 국조인

김수증

[]

원본글 출처김수증의 묘표()
저자김창흡()
본관안동()
이명 : 연지()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5 휴일()


선생의 이름은 수증이고 자()는 연지()이고 성은 김이고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의 태사() 김선평()이 시조이고, 좌의정() 문정공() 청음 선생() 김상헌()이 할아버지이고 동지중추부사() 김광찬()이 아버지이며, 어머니 연안 김씨()는 청주 목사(使) 김내()의 딸인데 천계() 갑자년(, 1624년 인조 2년) 4월 14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조용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문정공 곁에 있을 때에는 진퇴를 삼가고 무릇 한 마디 짧은 말도 모두 곧 알아듣고 널리 기억하여 종신토록 마음에 간직하고 자손에게 가르친 것도 다 이 도()이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전서()ㆍ예서()에 능하였으며, 문사()가 분방하여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므로 문정공이 그 수수하고 바른 것을 칭찬하였다.

경인년(, 1650년 효종 원년)에 생원시()에 제2인으로 입격하고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에 익위사 세마()로 초사()하여 무릇 여섯 고을을 맡았는데, 석성()ㆍ평강()의 현감()과 안악 군수()와 성천()ㆍ회양()ㆍ청풍()의 부사(使)를 지냈으며, 내직()을 지낸 것은 형조()ㆍ공조()의 정랑()ㆍ좌랑()과 사직서 영()과 장악원()의 첨정()ㆍ정()과 제용감()ㆍ예빈시()의 정과 돈령부 도정()인데, 도정은 보전()을 쓴 공로로 통정 대부()의 품계에 오른 것이다.

을묘년(, 1675년 숙종 원년)에 뭇 아첨하는 신하가 권세를 훔쳐 잡아 계씨() 문곡(, 김수항())공과 우재(, 송시열()) 송 선생이 다 귀양 가니, 선생이 성천에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춘천() 곡운()에 살 곳을 터잡고 온 가족이 걸어서 고개를 넘어가 매조미쌀과 채소를 먹고 살며 생애를 마칠 듯하였는데, 경신년(, 1680년 숙종 6년)에 비운()이 끝나서 비로소 회양 부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기사년(, 1689년 숙종 15년)에 중궁()이 실위()하고 문곡 공이 화를 입고 이듬해에 중씨() 퇴우(退, 김수홍()) 공이 또한 유배지의 촌가에서 작고하니, 선생이 석실()에 물러가 살다가 곡운으로 옮겨 들어가 이 뒤로 10여 년 동안 성묘하거나 자녀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태반을 산에 있었다.

갑술년(, 1694년 숙종 20년)에 경화()되어 시종()의 아버지로서 가선 대부()에 올랐고, 동지돈령부사()ㆍ한성부 좌윤()에 제수되고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다 한 번 숙배()하고 그만두었다. 선생은 평소의 뜻이 고상하여 세상 재미에 담담하였고, 벼슬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자나 깨나 은둔을 생각하였는데, 천륜()의 화를 당하고부터는 잠시도 서울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일찍이 말하기를, “경성을 바라보면 소리 내어 울고 싶다.” 하였다. 경오년(, 1690년 숙종 16년) 입산()하였을 때에 전에 지은 농수정()이 오히려 깊지 않다 하여, 그 상원()에 부지암()ㆍ무명암() 등 암자를 짓고 멍하니 외로이 앉아서 세상과 멀리 끊으려 하였으며, 혹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방황하면서 노래하여 회포를 풀었고, 또 한()나라의 제갈 무후()와 우리나라의 매월당(, 김시습()) 및 송 우재()의 유상()을 한 곳에 안치하고 유지당()이라 이름하였는데,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아는 자가 드물다. 평소에 주자()의 글을 좋아하여 만년에 더욱 깊이 고찰하였는데, 더욱이 사도()를 배척하고, 이단()을 변별할 때에는 반복하여 뜻을 기울이고 가훈()이 바른 것을 참조하여 지키고 변하지 않았고, 회호()의 논의는 가장 일에 해롭다고 늘 말하면서 반우()ㆍ궤장()에는 만 길 높이 서 있는 암벽[] 등의 말을 즐겨 썼으며, 갑술년 이래로 나라의 논의가 날로 비루해지고 선비의 절조가 더욱 타락하는 것을 보면 그 일에 저촉하여 정의의 마음이 겉으로 나타나서 논의가 격렬히 일어나므로 더욱이 남과 서로 접촉하려 하지 않았다. 임시로 살던 서울 집에 청람()이라 편액()한 것이 대개 또한 집착이 없다는 뜻인데, 신사년(, 1701년 숙종 27년) 3월 초나흗날 잠시 그 안에 머물다가 단정한 모습으로 서거하니, 가인()이 처음에는 낮잠으로 여기면서 불러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 통탄스럽다. 그해 5월 5일에 양주() 석실에 있는 선대 묘역에 장사하였다. 부인 창녕 조씨()는 참판 조한영()의 딸인데, 평소에 간소()를 지키고 화려한 것을 배제하였으므로 세상에서 환소군(, 후한() 때 포선()의 처) 맹광()의 풍도가 있다고 일컬었다. 14일 먼저 작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같은 언덕에 장사하였다. 모두 세 아들과 네 딸을 낳았다. 맏아들 김창국()은 부사(使)로서 두 딸을 낳고 아들이 없으므로 종제() 김창흡()의 아들 김치겸()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이하조()에게 출가하고 막내딸은 후궁()에 들어갔다. 그 다음 아들 김창숙()은 문학과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종형 김창집()의 아들 김호겸()을 후사로 삼았다. 그 다음 아들 김창직()은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이며 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맏딸은 홍문도()에게 출가하였는데, 한 아들은 홍유인()이고 한 딸은 어유봉()에게 출가하였다. 그 다음 딸은 이병천()에게 출가하였는데, 자식이 없다. 다음 딸은 신진화()에게 출가하였는데, 한 딸은 윤득귀()에게 출가하였다. 다음 딸은 유명건()에게 출가하였는데, 한 딸은 이진성()에게 출가하였다.

아! 선생은 78년 동안 살았는데, 당한 것은 만변()이나 일덕()은 매우 높았다. 집안에서의 중용에 맞는 행실부터 백성에게 임하여 다스린 것까지 그 쓸 만한 것이 어찌 한두 가지뿐이랴마는, 그 가장 나타난 것을 들자면 지조를 굳게 지켜 보통 사람보다 빼어난 운치와 가엾이 여기어 매우 생각하는 인애와 순수하고 바르게 도리를 지키는 아름다움인데 말년의 절조를 나타내고 쇠퇴한 풍속을 격려한 것으로서 유독 크게 이룬 것이다. 소자()가 이에 대하여 그 재절()한 바를 알거니와, 걸음마다 주워 모아 잗달게 거듭 벌여 남에게 보여서 행실이 갖추어지고 덕이 완전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말하면, 평소에 가르침에서 받은 것이 실로 이것을 우려하신 것이므로, 이제 또한 다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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