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국조인물고
김수항
[金壽恒]
원본글 출처 | 김수항의 묘지명(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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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송시열(宋時烈) |
본관 | 안동(安東) |
이명 | 호 : 문곡(文谷)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65 갑인 이후 이화 입절인(甲寅以後罹禍立節人) |
아! 서울 동대문 밖 율북리(栗北里)는 석실 대묘(石室大墓, 1701년 숙종 27년)에서 몇 리 떨어졌는데, 요즈음 문곡(文谷, 김수항의 호) 김공을 장사한 곳이다. 숭정(崇禎)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임금이 장차 큰 처분을 내리려고 순종하는 사람을 급히 진용(進用)하니, 그 무리가 기세를 타고 모해하여 공이 처음에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가 그해 4월 9일에 그 뒤 다시 내린 명을 받고 생애를 마쳤는데, 수명은 환갑이다. 임종 때에 의기가 편안하고 한가하여 뒷일을 처치하고 자손에게 훈계하는 것이 빠짐없이 상세하였고, 또 주자(朱子)의 고사에 따라 고산일곡팔괘정(高山一曲八卦亭)이란 시를 뒤미처 지어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붙였으니, 그 지킨 것이 굳고 함양한 것이 깊다는 것을 속일 수 없다. 아! 오늘날 어디에서 얻어 오겠는가?
공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며 문정공(文正公)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 노선생(老先生)의 손자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아버지는 목사(牧使) 김내(金琜)이고 할아버지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의민공(懿愍公) 김제남(金悌男)이다. 노선생은 천하의 강상(綱常)을 자임하여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다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소학(小學)≫이니, 문공이 진정한 큰 영웅을 논하면서 반드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하고 엷은 여름을 밟는 듯하라’고 말한 것은 뚜렷한 증험이 된다. 공은 가정의 학업을 받았고 ≪소학≫의 경신편(敬身篇)에 가장 주력하였는데, 노선생이 안동에서 구용1)(九容)ㆍ사물2)(四勿)을 써 보내어 힘쓰게 하였으니, 그 기대하는 것이 깊고도 멀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종일 똑바로 앉아서 다리를 뻗고 앉은 적이 없으며, 어깨와 등을 펴서 곧게 하고 조금도 한쪽 발로 서서 기대지 않았으며, 외면에 조금이라도 이지러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도 따라서 잘못된다고 생각하였다. 문사(文辭)가 바르고 고상하며 화려한 것을 벗어나려 힘썼으므로, 노선생이 일찍이 유용(有用)한 글이라고 적었다. 17세에 성균관(成均館)에 나가 시험 볼 때에 대제학(大提學) 택당(擇堂, 이식(李植)) 이공이 뽑아서 상위에 두고 말하기를, “근세의 문체(文軆)를 바꿀 만하다.” 하였다. 이듬해에 사마시(司馬試)에 으뜸으로 입격하였으나 수년 동안 과거보지 않고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서적에 뜻을 두어 스스로 배양하였다. 23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제1인으로 뽑히니, 조정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칭하였다. 28세에 중시(重試)에 입격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31세에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34세에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신해년(辛亥年, 1671년 숙종 12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오르고, 임자년(壬子年, 1672년 숙종 13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44세이었으며, 그동안 지낸 벼슬은 모두 극선(極選)이었다.
처음에 대간(臺諫)이 되었을 때는 일을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렀으나, 뒤에 경연(經筵)에서 강론할 때에는 은총이 날로 높아졌으며, 대제학이 되어서는 시론(時論)이 일치하고 앞다투어 본받았으므로 정승이 되어서도 그대로 겸직하고 갈리지 않았다. 여러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는데, 등용하는 것이 투명하고 선거하는 것이 공정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헐뜯지 못하였으며, 정승이 되어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재주가 없으므로 옛 대신의 사업을 행한다는 것은 워낙 바랄 수 없으나, 근자에 재상이 된 자가 임금의 덕이 부족한 것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대간에게 넘기니, 이것은 보필하고 바로잡는 의리가 아니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로지 이것을 자임하였다. 현종은 오로지 허적(許積)에게 맡겼으나 공이 바르고 성실하여 큰일을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을 살폈으므로, 빈청(賓廳)에서 의례를 의논한 뒤에 중씨(仲氏, 김수흥(金壽興)을 지칭)와 여러 관원이 많이 견벌(譴罰)을 당하였으나, 공은 곧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고 고명(顧命)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면유(勉諭)하고 위안(慰安)하는 것이 매우 정녕하였다.
금상(今上, 숙종을 이름)이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 예우가 더욱 융숭하였거니와, 역적 윤휴(尹鑴)가 흉악을 부려 혹 불손한 말이 동조(東朝)를 범하기까지 하게 되어서는 공이, ‘이것은 국가의 윤기(倫紀)에 관계되므로 한번 임금을 위하여 말하여 깨닫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윤휴ㆍ홍우원(洪宇遠)ㆍ조사기(趙嗣基) 등의 무망(誣妄)하고 패려(悖戾)한 정상을 극론(極論)하니, 뭇 유감 있는 자가 고슴도치 털처럼 어지러이 일어나서 도리어 ‘공이 양궁(兩宮)을 이간한다’ 하여 남쪽 끝으로 멀리 귀양 보냈다. 이에 앞서 명성 모후(明聖母后, 현종 비(顯宗妃) 김씨)가 밤에 임금과 함께 편전에 나아가 발을 드리우고 허적을 인견하여 통곡하면서 반복하여 교유(敎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입을 다물고 먹지 않고서 죽고 싶다.” 하였는데, 이는 지극한 정성과 가엾이 여겨 슬퍼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끝내 한 사람도 나와서 죄를 비는 자가 없었으니, 그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알 것이라 하겠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ㆍ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ㆍ허견(許堅)ㆍ오정창(吳挺昌)이 모역한 일이 발각되어 그 무리를 죽이거나 귀양 보냈는데, 윤휴는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죽이고 또 그 아들들을 가두었다. 이때 공이 적소(謫所)에서 명을 받고 돌아와 옥사(獄事)의 평결을 주관하여 죄를 가볍게 한 것이 많았고, 이원정(李元禎)ㆍ유혁연(柳赫然) 등과 같은 경우 역적들이 끌어대게 되어서는, 정상이 뚜렷하지 않다 하여 즉시 석방을 청하였으나, 뒤에 다시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이 더욱 낭자하므로 구제하려 하였으나 될 수 없었다. 이때에 명성 성모가 말하기를, “김상(金相)은 여러 해 동안 귀양 갔던 끝에 옥사를 다스리는 것이 투명하고 합당하여 조금도 좋은 기회를 타서 분을 풀을 생각이 없으니 가상하다.” 하였다. 그때 간흉(奸兇)이 이미 주벌(誅罰)되고 뭇 어진 이가 모여와서 다들 공을 영수(領袖)로 삼았고, 임금도 존중하는 예우가 특별히 도타웠으며, 공도 나라를 위하여 몸과 마음의 노고를 다하고 정신을 모아서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때와 같은 소강(小康)의 치평(治平)을 이루었으나, 시의(時議)가 문득 기회를 견제하였다.
대개 주벌하여 제거한 공은 실로 사류(士類) 중의 척신(戚臣)에게서 나왔으나 경박하고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무리가 매우 헐뜯고 매우 공박하는 것을 공으로 여기므로, 공이 말하기를 “저들은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이 있으나 아직 뚜렷한 죄과가 없는 것을 매우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젊은 무리가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비로소 공을 언짢게 여겼다. 예전 송(宋)나라 정승 조여우(趙汝愚)가 소희(紹凞, 광종(光宗)의 연호) 때에 처치한 것은 실로 명실(名實)ㆍ역순(逆順)의 형세가 있었으므로, 주자(朱子)가 대변(大變)으로 여기기는 하였지만 그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국가를 안정시킨 것이 세상에 드문 공이기 때문에 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성심으로 협동하여 함께 왕실을 도왔는데, 더구나 이제 훈척(勳戚)이 충성으로 역적을 토벌한 것은 조공(趙公, 조여우)이 당한 것에 견줄 것이 아니니, 그렇다면 지금 공을 공격하는 자는 스스로 주자보다 어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시배(時輩)와 어그러졌는데, 역적 허새(許璽)ㆍ허영(許瑛)의 옥사에 이르러서는 말하는 자가 김익훈(金益勳)이 더욱 급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혹 옥사의 정상을 의심하기까지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허새ㆍ허영이 역모한 정상은 본디 의심할 것이 없고 김익훈이 염탐한 것은 실로 지시받은 것이 있는데, 이제 고발한 것이 상세하지 않다 하여 드디어 이 옥사를 의심하여 사실이 없는 것으로 하고, 김익훈을 매우 죄주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그래서 시의가 더욱 시끄러워지고 드디어 공과 뜻을 같이하는 자를 아울러 공박하는 것이 점점 도리에 어그러지고 격력해져서 이산(尼山) 사는 윤증(尹拯)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대개 역적 윤휴가 처음에 퇴계(退溪)ㆍ율곡ㆍ우계 세 선생을 헐뜯다가 주자(朱子)를 배척하게 되고 드디어 공자(孔子)도 꺼리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인데, 윤증이 앞장서서 편들어 돕고 때때로 또한 겉으로는 배척하고 속으로 비호하므로, 내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통렬하게 배척하니 공이 내 역량이 약하고 적이 강한 것을 가엾이 여겨 때때로 구제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시배(時輩)가 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공은 노선생에게서 ‘농락을 계략하면 심술이 바르지 않고 피차를 조정하면 사업에 매우 해롭다’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대개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송원헌(宋元憲)의 농락한 일은 내가 못할 바이고 건중(建中, 휘종(徽宗)의 연호) 때의 조정은 난세(亂世)를 불러온 방도이었다.” 하였다. 공의 가법(家法)은 연원이 본래 이러하므로 늘 사마광(司馬光)이 ‘하늘이 송나라에 복을 준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한 것을 명심하고, 범순인(范純仁)이 ‘속으로 뒷날 스스로 보전할 생각을 한다’ 한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결핏하면 시의와 서로 배치되고 특히 간사한 무리에 미움받은 까닭이다. 대저 주자는 성인인데, 공이 주자의 도(道)를 따라서 이롭지 못하였더라도 어찌 주자의 도가 그르겠는가?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빼어나서 조회 때마다 신(紳)을 드리우고 홀(笏)을 꽂고서 공수(拱手)하고 장중하게 서면 조정 안이 모두 주목하고 말하기를, “사람 중의 난곡(鸞鵠)이다.” 하였고, 청나라 사신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켜 칭친하였다 하니, 이것을 미루어 말하면 가정의 효경(孝敬)이 도탑고 집안의 윤리가 바른 것이 남들도 친근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유(劉)ㆍ양(梁)의 죽음을 천하가 슬퍼하였고 여(呂)ㆍ채(蔡)의 화(禍)는 이제까지도 원통하다고 호소하나, 당시에 용사(用事)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예로운 것이고 욕된 것이 아닌데, 더구나 이제 인선 모후(仁宣母后)가 무함당하고 어진 정비(正妃)가 폐출되는 욕을 당하였으며, 율곡ㆍ우계 두 선현(先賢)이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당하였으니, 공이 이런 때에 서거한 것이 도리어 또한 영예롭지 않은가? 노선생이 일찍이 시를 지어 나에게 보내어 주자의 학문을 힘쓰게 하였는데, 내가 또한 그의 스스로 한 것을 보면 대개 이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노선생의 손자들이 다 주자의 글을 좋아하였지만 공이 더욱이 따라 익혔으므로, 내가 일찍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찬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청하니, 공이 함께 증거하고 정정하며 산정하고 윤색하여 오류가 적게 하였으니, 공이 배운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주자가 임종 때에 제자들에게 진결(眞訣)을 주기를,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은 곧음일 뿐이다.” 하고 이튿날 또 말하기를, “도리는 이러한 것일 뿐이나 견고(堅固)하고 각고(刻苦)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공자 맹자가 말한 ‘사람의 생리는 정직한 것이다.’ ‘정직으로 기(氣)를 기른다.’는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의 언행에 굽은 것이 없었던 것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명(銘)은 이러하다.
죽음에는 나쁜 때가 있고 영예로운 때가 있거니와, 아! 공의 때는 내가 감히 알 수 없다.
각주
- 1) 구용(九容) : 군자(君子)의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즉 족용중(足容重)ㆍ수용공(手容共)ㆍ목용단(目容端)ㆍ구용지(口容止)ㆍ성용정(聲容靜)ㆍ두용직(頭容直)ㆍ기용숙(氣容肅)ㆍ입용덕(立容德)ㆍ색용장(色容莊)임.
- 2) 사물(四勿) : 인(仁)의 실천을 위한 네 가지 조목으로, 즉 비례물시(非禮勿視)ㆍ비례물청(非禮勿聽)ㆍ비례물언(非禮勿言)ㆍ비례물동(非禮勿動)임.
관련이미지 5[네이버 지식백과] 김수항 [金壽恒]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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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수항 [金壽恒]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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