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창립의 묘지명(墓誌銘)

추읍산 2018. 6. 25. 15:01

국역 국조인물고

김창립

[]

 

원본글 출처 묘지명,
저자 김창협()
본관 안동()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2 사자()

나의 아우 김창립()의 관향은 안동()인데, 선친() 영의정 휘() 수항()의 여섯째 아들이다. 나이 16세에 노봉() 민정중() 공이 관례()를 주관하면서 자()를 탁이()로 지어 주었고, 17세에 서하(西) 이민서() 공이 딸을 시집보내어 사위로 삼았다. 1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죽은 뒤 7년째에 기사년()의 화1)()가 일어났다. 화를 당한 날에 선친이 나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우 무덤에 내가 묘지명()을 지으려고 한 지 오래 되었으나 너무나 슬퍼서 글을 짓지 못하였다. 지금은 글러버렸으니, 네가 묘지명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았으나 슬픔이 갈수록 심하여 글을 지을 수 없었으므로 그 뒤 7년이 되어 비로소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명()을 쓰는 바이다.

아우는 위인이 아름답고 총명하며 준수하고 명랑하여 어려서부터 예리한 면이 생동하였다. 10세에 선친을 따라 남쪽으로 갔을 때 이미 당나귀를 조종하여 타고서 천리를 달리곤 하였는데, 장성하자 다시 기를 접고 느슨해졌다. 그러나 그의 의기()는 고상하고 굳세어 항상 개연()히 세속을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다. 어려서 여러 형들을 따라 공부하면서 이미 풍아(, ≪시경()≫의 국풍()과 대아(), 소아())의 원류()를 들어보고 고금 성률()의 높낮음에 대해 취사 선택()할 줄을 알았는데, 이해력이 풍부하여 스스로 터득한 바가 많았다. 이에 평소 좋아하는 잡기()를 모두 버리고 오로지 문장에다 힘을 쏟았는데, 이미 형 김창흡() 자익(, 김창흡의 자())을 스승으로 삼아 마을의 동지 5, 6명을 인솔하여 주야로 어울려 서로 갈고 닦는 것을 일삼았다. ≪시경()≫, ≪초사()≫, ≪문선()≫과 옛날 악부()로부터 당()나라 중기 제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고 심취하여 시가()로 발로되었다. 특히 태사공(,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여 매양 읽다가 경경()과 고점리()2)가 축()을 타며 슬프게 노래하는 대목에 이르면 대뜸 탄식하고 강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동료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같이 날마다 술을 마시고 이소(, 옛 초()나라 굴원()의 서정시())나 읊조리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는데, 그러면 족하겠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뜻은 세상의 부귀 공명을 하찮게 여기었던 것이다. 간혹 태학()에 나가 노닐면서 누차 과시()에 합격하였으나 또한 탐탁지 않게 여기었다. 그러나 아우는 선량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사람과는 신의가 있었으며 특히 친구간에 독실하였다. 이로 인해 그와 노니는 자들은 너나없이 성심으로 사모하였고, 그가 죽었을 때 동기간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상복()을 입기도 하였다.

계해년(, 1683년 숙종 9년) 정월에 아우가 벽에다 큰글씨로 ‘나의 나이 18세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스스로 격려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해 12월 26일에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우가 병이 났을 때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모두 글에 관한 이야기였고, 간혹 탄식하면서 ‘지극히 높은 뜻이라’고만 말하고 뒷말을 잇지 못하였으나 그가 자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 부모가 노심 초사()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왜 이런 걱정을 끼친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그의 효심()이 죽을 때까지 이와 같았다. 아! 아우가 그 같은 재주와 뜻을 가지고도 불행히 단명하여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정말 천고의 한이다. 그러나 그의 독실한 효심으로 또한 다행히 일찍 죽어 기사년()의 화를 미처 보지 않은 것이다. 아! 슬프다. 아우의 시가()는 청수하고 호탕하며 격조가 높으면서도 정서가 풍부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동지들이 상자 속에서 글 수십 편을 찾아내어 자익(, 김창흡)의 산정()을 거치고 나서 그가 강습한 서실의 이름을 따라 택재고(稿)로 이름을 붙였다. 선배 여러분들이 그의 유고를 보고 모두 탄식하며 말하기를,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의 묘소는 석실() 선영에서 몇 리 떨어진 양주() 율북리()에 있는데, 동쪽 수십 보()쯤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태사() 김선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증조 휘() 상헌()은 좌의정() 문정공() 청음 선생()이고, 할아버지 휘 광찬()은 동지중추부사()이다. 외조부는 해주 목사(使) 나두안() 공인데, 안정()의 저명한 씨족이다. 아우는 1녀만 두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익이 그의 아들 김후겸()을 그의 후사로 삼아 주었는데, 지금 9세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너는 선친이 화를 당하기 전에 죽었고 너는 선친의 묘소 곁에 묻히었으니, 아! 너의 요사()는 즐거운 일이지 슬픈 일이 아니다. 완고한 나는 살아 있는 것이 독()과 같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너의 묘지명()을 쓰면서 오직 슬픔을 고하는 바이다.

각주

  • 1) 기사년(己巳年)의 화(禍) : 숙종 15년인 기사년(己巳年;1689년)에 남인(南人)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김수항(金壽恒)이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사(賜死)된 일. 기사 환국(己巳換局).
  • 2) 경경(慶卿)과 고점리(高漸離) : 경경은 형가(荊軻)임. ≪사기(史記)≫에 “고점리는 축(筑)을 잘 탔는데, 형가와 친구였다. 형가가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러 길을 떠나자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 등이 역수(易水)에 나와 전별하였는데,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가는 진시황을 저격하였다가 미수에 그쳐 죽었고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진 시황이 고점리를 잡아다 눈을 빼고 곁에 두고 축을 타게 하였다. 고점리가 축 속에다 칼을 넣어 두었다가 틈을 타 진시황을 찔렀으나 맞지 않아 피살되었다.”고 하였음.

관련이미지 2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립 [金昌立]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955&cid=49618&categoryId=4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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