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국조인물고
김창협
[金昌協]
원본글 출처 | 김창협의 묘지명(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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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창흡(金昌翕) |
이명 | 자 : 중화(仲和) 호 : 농암(農巖)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8 유학(儒學) |
선생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창협(昌協)이며 자(字)는 중화(仲和)이고 호는 농암(農巖)인데, 묘소는 양주(楊州)의 석실(石室) 선영에 있다. 그곳에 5대의 비석이 있으므로 성씨의 계통과 원류를 상고할 수 있는데, 특히 할아버지 증(贈) 영의정(領議政, 김광찬(金光燦))의 비문(碑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친(先親, 김수항(金壽恒))이 안정 나씨(安定羅氏) 해주 목사(海州牧使) 휘 성두(星斗)의 가문으로 장가들어 아들 여섯 명을 낳았는데, 선생이 둘째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울 때에 사람과 귀신을 분별하였고 인(仁)으로 용납하여 사물을 체득하는 것에 대해 평론하는 바가 공정한 말이 많았으므로 부모가 기특히 여겨 사랑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659년 효종 10년)에 선생이 9세로 해주 관아에 계시는 목사공(牧使公, 나성두)을 따라갔는데, 행동이 법도에 맞아 엄연히 성인(成人)과 같았으며, 차분하게 책을 보고 다른 일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또래 중에 더러 싸우다가 서로 호소하면 목사공이 그의 한마디 말을 듣고 잘잘못을 가려 주었다. 15세에 정관재(靜觀齋) 이 선생(李先生, 이단상(李端相))의 가문으로 장가들었는데, 그때 이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한가롭게 살면서 크게 서당(書堂)을 열고 학도들을 가르쳤다. 이 선생이 선생을 불러 고명(高明)에 마음을 기울이라고 말해 주자, 선생이 개연히 흥기(興起)되어 비로소 과거 이외에 마음을 쓸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유년(己酉年, 1669년 현종 10년)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이해에 이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의지할 곳을 잃고 더욱더 경서(經書)에 주력하여 이미 심오하고 해박해지자 가끔 고문(古文)으로 발로된 바가 점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의 경지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논리의 정립에 힘썼다. 갑인년(甲寅年, 1674년 숙종 즉위년)에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과 용문(龍門)에서 만나 질문을 하여 많은 인정을 받았고 이때부터 편지를 왕래하면서 우재 선생이 더욱더 기대를 크게 걸었다. 그 뒤에 우재 선생이 ≪주자차의(朱子箚疑)≫를 저술할 때 태반이나 선생의 설(說)을 따랐는가 하면 임종(臨終) 무렵에 멀리서 마무리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선친이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다가 철원(鐵原)으로 옮기는 등 6, 7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실망하였었는데, 선생은 평소 세상에 대해 담담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초야에서 은둔할 뜻을 가졌다. 선친이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 밑에다 집터를 잡아 놓고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려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생이 드디어 그곳으로 돌아가 서실(書室)에다 ‘은구(隱求)’라는 편액을 붙이고 마음을 기울여 이미(理味)를 사모하며 여생을 마칠 것처럼 하다가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정국(政局)이 쇄신되자 서울의 집으로 돌아와 임술년(壬戌年, 1682년 숙종 8년)에 문과(文科)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일찍부터 조정과 재야의 선망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앞다투어 크게 천명된 것을 축하하였으나 선생의 낙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이조(吏曹)의 좌랑(佐郞), 정랑(正郞)과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 교리(校理)와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집의(執義)와 사간원(司諫院)의 헌납(獻納), 대사간(大司諫)과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고 청풍 부사(淸風府使)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홍문관에 있을 적에는 마음을 쏟아 임금을 계옥(啓沃)하였고 경연(經筵)에 나아가면 임금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고 아랫사람에게 서슴치 말고 물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리고 반복해서 밝힌 바가 모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위태롭거나 미약한 것에 대한 것으로서 온화한 안색과 명랑한 목소리로 설명하였으므로 들은 사람들이 모두 고무되었으며, 과묵한 임금도 기꺼이 대화하였다.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는 날마다 유생(儒生)들을 불러 삼석(三席)의 사이에 경전(經典)을 놔두고 심오한 뜻을 설명하여 깨우치는 바가 모두 지극하였다. 그리고 가끔 변두(籩豆)를 차려 놓고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정서를 함양하고 발산하는 등 옛날 사술(四術,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의미가 있었으므로 선비들이 상당히 흥기되었다. 이조의 낭관(郎官)으로 있을 적에 인사의 선발을 매우 공정히 하였다. 그때 사류(士流)들의 의론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시기와 반목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일종의 과격한 자들은 구별없이 선발하지 말라고 선생을 비난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경위(涇渭)로 갈라진 저들은 어쩔 수 없는데, 지금 또다시 청탁(淸濁)을 가리기 위해 과도하게 도태한다는 것은 공평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비난을 감수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로 일을 주선하며 마음을 깊이 아는 사람은 선생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에 감탄하였다. 선생이 또 의정부(議政府)와 대각(臺閣)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민망하게 여겨, 들어오면 가정에서 노력하고 나가면 연소(年少)한 무리들과 가부(可否)를 조정하는 등 정성을 다 쏟아 보았으나 일이 이미 엇갈려 뜻대로 되지 않아 주야로 걱정하고 탄식하다가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병인년(丙寅年, 1686년 숙종 12년)에 이징명(李徵明)이 후궁(後宮)의 일을 말하자, 임금이 도에 지나칠 정도로 매우 노하였으므로 상소를 올려 경계의 말씀을 드렸다. 대체로 선생이 조정에서 벼슬할 때 제기한 언론 중에 경학(經學)의 연원(淵源)을 볼 수 있는 상소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홍문관(弘文館)에 있을 때 임금의 학문과 당시의 폐단에 대해 논한 것으로서 본말이 모두 극진하여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고, 하나는 바로 이번의 상소로서 은미한 곳에까지 언급하여 사람들이 더욱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내직(內職)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나갔는데, 다스리는 데 강령(綱領)이 있어서 관리가 엄숙해지고 백성이 편안해져 관아가 조용하여 한 가지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매양 어버이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시가(詩歌)에 나타나 ≪이소(離騷)≫처럼 연연하는 뜻이 있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 선친(先親)을 따라 진도(珍島)의 유배지에 갔다가 이내 큰 화를 당하였는데, 선친이 사약(賜藥)을 받을 적에 백운산(白雲山)에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고하자 허락하였다. 상여를 모시고 바다를 나올 때 먼 길을 오기가 매우 어려워 모든 일이 정황이 없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대충대충 일을 치르려고 하자,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장례를 치를 때 선친의 유언을 따라야 할 것은 종이 수의, 거마(車馬)이고, 그 외에 할 수 있는 제전(祭奠)이나 곡용(哭踊)은 ≪가례(家禮)≫가 있으니만큼 그에 따라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때 우재(尤齋)가 제주(濟州)에서 붙잡혀 오는 도중이었다. 선생의 생각에 이 원로(元老)가 사약을 받을 경우 선친의 묘비문(墓碑文)을 받을 곳이 없다고 여기어 슬픔을 떨쳐 버리고 행장(行狀)을 지어 사람을 중도로 급히 보내어 묘비문을 받아 가지고 왔다. 이처럼 급박할 때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영구히 불후(不朽)할 글을 받는 등 모두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선친의 장례를 치른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영평(永平)으로 들어가 송노암(送老菴)에서 거상(居喪)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哭)하고 난 여가에 힘을 쏟아 연구하여 주해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는 더욱더 오묘한 뜻을 천명(闡明)하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생각에 ≪소학(小學)≫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여겨 더욱더 실천에 힘써 도학(道學)의 책임을 지려고 뜻을 가지자 원근의 벗들이 서로 앞다투어 도덕(道德)의 귀추로 추앙하였다. 예를 들면 창계(滄溪) 임영(林泳)이 누차 편지를 보내어 도(道)의 근원을 깊이 찾아 혼자 세상에 우뚝 설 것을 매우 권하였는데, 이는 선생이 세상에 나가지 않기로 뜻을 굳히고 이 일에 전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상복(喪服)을 벗고 이른바 농암(農巖)의 집에서 살면서 집 사람과 같이 식솔을 헤아려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을 경영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선친의 원한이 씻어지고 이어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임명하자 선생이 충심을 피력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개요는 영예의 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사양한 것이었다. 친구들이 대부분 조정의 명을 받아들일 것을 권하였고, 집안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자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사모(紗帽)를 쓰지 않기로 결심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순서에 따라 벼슬이 승진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더욱더 나와서 벼슬할 것을 간곡히 권면하였고 특별히 백씨(伯氏) 의정공(議政公, 김창집(金昌集))을 어전(御前)으로 불러 설득하여 나오게 하라고 하는 등 자상하고 간곡한 은총이 파격적(破格的)이었다. 그러자 대중의 의논이 한번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벗들도 한번 신하의 분수를 펼쳐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선생은 여전히 처음의 뜻을 견지한 채 처벌을 받기로 작정하니, 임금이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뒤로 다시금 부르지 않았다. 선생이 갑술년(甲戌年) 뒤로 어머니가 서울의 집에 있었으므로 문안드리기에 편리하도록 양주(楊州)의 삼호(三湖)로 나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사이 7, 8년 동안 농암을 왕래하였다. 이윽고 연달아 외아들과 2녀를 잃고 계미년(癸未年, 1703년 숙종 29년)에 이르러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선생이 평소 병환을 잘 앓아 오다가 혹독한 화를 겪은 뒤로 바짝 야위어 겨우 부지하고 있는데다 전후로 슬픔을 당한 바람에 혈증(血證)이 폭발하여 결국 무자년(戊子年, 1708년 숙종 34년) 4월 11일에 삼주(三洲)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년) 정월 2일에 태어나 58세를 살았다. 아! 매우 슬프다. 임금이 애도하면서 부조를 내리고 관청에서 장례를 치르라고 명하였다.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매우 슬퍼하며 곡(哭)하였고 제자들 중에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이 거의 6, 70명이나 되었다. 이해 6월 9일에 석실(石室)의 선영(先塋) 북동으로 향하는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다. 부인 이씨(李氏)는 씩씩하고 단아하며 부덕(婦德)이 있었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뒤따라 합부(合附)하였다.
1남 5녀를 낳았다. 아들 김숭겸(金崇謙)은 재주가 뛰어났으나 일찍 죽고 그의 처 박씨(朴氏)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므로 선생이 조카 김제겸(金濟謙)의 아들 김원행(金元行)을 데려다가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지금 진사(進士)가 되었다. 큰딸은 군수(郡守) 서종유(徐宗愈)에게, 둘째 딸은 이태진(李台鎭)에게, 셋째 딸은 현령(縣令) 오진주(吳晉周)에게, 넷째 딸은 박사한(朴師漢)에게, 다섯째 딸은 유수기(兪受基)에게 시집갔다.
선생은 인자하고 명철한 바탕에다 마음이 간이(簡易)하였고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안에서 쌓아 밖으로 드러났다. 몸에 드러난 바가 긍지의 태도가 없었고 실천에 나타난 바가 구차한 행실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집에서 생활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데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화순(和順)하여 다른 것이 없었다. 사람을 수응할 때 매우 공평하여 비록 원한이 있는 말단의 부류들도 정도로 대하고 교묘하게 넘어뜨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대체로 그의 호오(好惡)와 애증(愛憎)이 어느 곳에서나 공평하였고 친밀한 사람이든 소원한 사람이든 한결같이 마음을 터놓고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았다. 선생이 숭배하는 옛날 사람을 살펴보면 한(漢)나라 공명(孔明, 제갈양(諸葛亮)), 송(宋)나라 남헌(南軒, 장식(張栻)) 및 우리나라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과 합치된 바가 있었으니, 그로 하여금 세상을 어루만지게 하여 시행하려고 한 바를 들어주었더라면 이른바 성심(誠心)을 열고 공도(公道)를 펼치어 모든 선을 받아들이고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등 옛날의 사람들과 동일한 궤도를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자 물러나 고정(考亭, 주자(朱子))을 법받았는데, 만리(萬理)를 종합하고 뭇 설을 분석하되 한결같이 자신의 공평한 척도를 사용하였고 비록 고정의 학설도 그냥 수긍하려고 하지 않았다. 선생의 생각에 ‘의심을 깊이 해보지 않으면 독실하게 믿을 수 없다’고 여겨 처음부터 오래도록 분발하였다가 결국 융화되어 일치에 이르렀으므로 마음과 눈에 간직된 것으로부터 필단과 말로 발로된 것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이고 분명하여 그때마다 근거가 있었고 부질없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의리가 중요한 일을 당하였을 경우에는 정밀하게 분석하였고, 관계된 바가 중대할 경우에는 선유(先儒)나 선배들이 이미 정설(定說)로 굳혀 대중이 금석(金石)처럼 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곧바로 나아가 설파(說破)하고 득실(得失)을 따지면서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공리(公理)이니, 선유나 선배를 존경하기 위해 옹호하는 것은 또한 이른바 옳은 것을 찾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또 일찍이 ‘주자(朱子)처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주자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 말하기를, “주자의 뒤에 태어나 사물의 연구에 노력하지 않은 것은 바로 세상 선비들이 스스로 나태한 것이니, 또한 구차스럽다고 하겠다.”고 하였다. 평소 옥처럼 온화하여 만면에 화기 애애(和氣靄靄)하였고 말씀을 할 때 사람을 손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논변(論辨)할 때 더러 도(道)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말을 미워할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분변하되 음성이 날카롭고 기운이 강개하여 늠름한 칼날을 범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선입견(先入見)에 치우친 적이 없었고 사람의 말이 옳으면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따랐다. 후학(後學)을 등급에 따라 지도하였으나 가끔 정밀한 것이나 조잡한 것을 보편적으로 말하고 상하를 모두 설명하여 유가(儒家)에 그러한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 사모하게끔 하였는가 하면 거듭 시를 읊조려 금석(金石) 같은 음운이 준동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선생의 가르침을 들으면 너나없이 심취(心醉)되어 떠나지 않았고, 간혹 성실한 사람의 질문이 뜻에 맞을 경우에는 온종일 설명하면서 기갈(飢渴)을 잊었는가 하면 더러 손님이 곁에 있다가 미처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도 담담하였다. 만년에 들어 수년간 병석에 누운 적이 많아 사람들과 접촉이 드물었고 따라서 후학의 지도도 드물었는가 하면, 글의 요청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고 시는 아들을 잃은 뒤로 다시금 짓지 않는 등 일마다 줄여나가 어둠을 향해 휴식하여 스스로 응정(凝定)하려고 하였다. 간혹 학설을 뽑아 기록하였는데, 대체로 심성(心性)의 체용(體用) 및 유가(儒家)와 불도(佛道)의 차이점을 변론한 것으로서 병중(病中)에도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리(道理)가 원숙해져 부딛치는 곳마다 명쾌하였다. 오직 탐구하여 깊이 융화되는 데 이르고 함양하여 주밀한 데 이르러 박약(博約)의 공부가 원숙하게 되려면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데,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므로 논저(論著)하고 싶은 큰 뜻은 발단(發端)만 해 놓고 절필(絶筆)하였으니, 아! 애석하다.
선생이 세상에 드문 명철한 기질로 늦게 먼 변방에 태어난 바람에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전하여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뜻)의 강석(講席)에 나가 안회(顔回, 공자의 제자 안자(顔子)), 단목사(端木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와 같이 주선하지 못하였고 또 백풍(伯豊, 송(宋)나라 오필대(吳必大)의 자(字)), 계통(季通,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의 자)의 무리와 같이 무이(武夷, 주자(朱子)가 강론하던 곳)의 강석에 참여하지 못한 채 혼자 경서를 안고 외롭게 읊조렸으므로 동조한 사람이 적었다. 오직 한두 명의 형제가 선생과 더불어 울적한 회포를 풀었으나 창흡(昌翕)처럼 완고한 사람은 그 소리를 계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귀로 들어 배에 가득 채운 바가 모두 지극하고 좋은 언론이었으므로 지금도 서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생의 말씀 중에 ‘글을 자세히 읽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이치를 원숙하게 강론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되고, 일을 할 때 미리서 선을 그어서는 안 되고, 사물에 수응할 적에 지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씀은 바로 선생이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고 제자들이 배우지 못한 바이다. 선생이 또한 지나치게 과장하는 말세의 폐단을 병통으로 여기면서 사람을 걸맞지 않은 데에 비유하여 진짜의 모습으로 전하지 않은 것을 매우 탄식하였으므로, 지금 선생의 사적을 서술할 때 전전 긍긍(戰戰兢兢)하였다. 평소의 훈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폐습(弊習)을 답습할 경우 이는 자신의 마음을 속여 나의 형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므로, 창흡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감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천백년의 뒤에 이 묘지(墓誌)를 읽고 선생이 인명(仁明), 간이(簡易)하고 공정(公正), 소통(疎通)한 사람임을 안다면 거의 접근했다고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하늘이 만물에게 균등하니 그 도리 공평하다 하겠도다.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저울과 거울처럼 공평하지만, 다만 한번 차질이 생기면 천 겹으로 장막이 쌓이도다. 오로지 순수한 기질만이 명철하게 통할 수 있도다. 진정으로 선생을 말하자면 영롱한 창으로 들어갔도다. 명철로 엄폐를 떨쳐버리면 공평이 그 가운데 있도다. 일을 통철하게 다스리니 사물의 정상을 꿰뚫었도다. 수레에 실린 귀신과 진흙 묻은 돼지를 모두들 바야흐로 빗나가게 보았는데, 움푹 패인 땅에 유환(流丸)이 떨어지듯 내가 그 그침 받았도다. 느끼어 평정을 찾으니 치국이 여기에 있도다. 수렴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나 도는 나에게 있었도다. 신봉하는 거대한 규구는 오로지 주자(朱子)뿐이었도다. 천고(千古)에 시비로 갈라지고 만리로 차별이 났도다. 정위(情僞)로 향배가 정해지고 안팎에 도가 행해지도다. 모여서 통하는 곳을 보아 칼날을 대면 해결되었도다. 각각 그 극치를 지적하니 나에게 관계가 없었도다. 끝없이 줄기찬 말씀에 화기가 넘쳐흘렀도다. 쇳소리에다 옥 같은 안색 방안에 가득히 사모했도다. 겹겹 쌓인 차양을 철거하고 넓은 곳으로 가게 했도다. 사해(四海)와 더불어 함께 하니 원하면 여유가 있었도다. 전후로 참담한 일 당하니 생각이 오거(五車) 정도 쌓였도다. 누구에게 전할 수 없는지라 가지고 영원히 떠났었도다. 적막하고 광활한 삼주(三洲)에 백운(白雲)이 왔다가 가도다. 허명(虛明)한 것은 신(神)뿐이고 조박(糟粕)은 글에 남았도다. 정조(精粗)가 자취로 남으니 전형(典刑)이 변하지 않았도다. 울창하게 자란 묘목(墓木) 앞에 후진들이 존경할 것이도다. 아우가 이 지명(誌銘)을 지으면서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하도다.
관련이미지 7[네이버 지식백과] 김창협 [金昌協]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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