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창직의 묘표(墓表)

추읍산 2018. 6. 25. 14:04

국역 국조인물고

김창직

[]

원본글 출처김창직의 묘표()
저자김창흡()
이명 : 계달()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29 명류(流)


군의 휘()는 창직()이고 자()는 계달()이다. 안동 김씨()는 고려() 태사() 휘() 선평()을 시조로 삼는다. 증조 휘 상헌()은 좌의정() 문정공()이고, 할아버지 휘 광찬()은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이고, 아버지 곡운() 휘 수증()은 공조 참판()이고 어머니 창녕 조씨()는 참판() 조한영()의 딸이다.

군이 병인년(, 1686년 숙종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병조 좌랑(), 시강원 설서(), 사서(), 문학(),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토산 현감()으로 나갔다가 임오년(, 1702년 숙종 28년) 8월에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나 그해 10월에 양주() 땅 귀곡()에 묻히었다. 전 부인 함종 어씨()는 아들이 없고 후 부인 안동 권씨()가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김일겸(), 김퇴겸(退)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군의 위인이 순결()하고 방직()하여 겉으로는 영리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속으로는 의리가 있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되 반드시 대단치 않은 것도 따졌으며, 명리()에 담담하여 과거의 당락()이나 벼슬길의 승침()을 가지고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국사()의 시비가 마음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가슴에 음식이 걸려 내려가지 않은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심사()가 이와 같았다. 기경()의 화변()1)이 영해()에서 일어났을 때 군이 두 번이나 영구()를 부축하여 돌아오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갑술년(, 1694년 숙종 20년)에 그때 무리들이 역적을 두둔하는 정상을 자세히 보고 이야기할 때마다 이를 갈면서 같은 나라에 살고 싶어하지 않다고 하였다. 군이 막 벼슬길에 나가자마자 어려움을 만났고 이어 화를 당하였으므로 더욱더 벼슬에 뜻이 없어, 벼슬에 임명할 때마다 대부분 피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일컬어진 바가 없었고, 오직 토산 현감으로 있을 때 인성()이 사람들 사이에 대단히 퍼졌는데, 대체로 백성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진실과 허위에 밝아 송사와 폐막이 깨끗해지도록 하기 반년 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큰 곳에다 썼더라면 재주가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결국 펼쳐보지 못함으로써 가슴속에 꽉 찬 충효()까지 매몰되고 말았으니, 아! 매우 슬프다. 나는 그와 동년()으로서 서로 존중해 마음속에 간격이 없었으므로 대략 아는 바를 이렇게 기록하는 바이다.

각주

  • 1) 기경(己庚)의 화변(禍變) : 숙종 15년인 기사년(己巳年; 1689년)에 남인(南人)이 집권 하는 기사 환국(己巳換局)으로 김수항(金壽恒)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곧 사사(賜死)되었고, 김수흥(金壽興)은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해인 경오년(庚午年; 1690년)에 그곳 배소(配所)에서 사망하였던 일.

관련이미지 2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직 [金昌直]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958&cid=49618&categoryId=4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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