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졸기(卒記)

전 영의정 김수항의 졸기

추읍산 2018. 7. 23. 13:46

숙종실록보궐정오 20권, 숙종 15년 윤3월 28일 을축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직계


전(前)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죽였다. 경재(卿宰)인 민암(閔黯) 등의 말에 따라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사사(賜死)된 것이다. 김수항은 현상(賢相)의 손자로서 젊은 나이에 태사(台司)에 올랐고 풍의(風儀)가 단아하고 정중하였으며 지조와 품행이 조용한 가운데 함축성이 있었다. 문사(文辭)에 능하였는데 유술(儒術)로 수식하였다. 갑인년011) 에는 고명(顧命)을 받아 국가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정사년012) 에는 직언(直言)을 했다가 죄를 받았으므로 사류(士流)가 더욱 흠모하였다. 경신년013) 에 요직(要職)에 앉아 역적 허견(許堅)을 다스릴 적에 연좌(連坐)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거듭 그 당여(黨與)에게 원수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배(時輩)들이 마음껏 보복하게 된 것이다. 이미 해도(海島)에 귀양보내어 위리(圍籬)시키고 나서 또 합사(合辭)의 논계(論啓)와 경재(卿宰)의 상소가 있어 기필코 죽이고야 말았는데, 그의 죄명(罪名)은 꾸며 만든 것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억울하게 여겼다. 김수항은 스스로 강방(剛方)함을 자임(自任)했지만 국량(局量)이 작았기 때문에 괴팍한 데 가까웠고, 스스로 견확(堅確)함을 허여(許與)했지만 사심(私心)이 성했기 때문에 전횡(專橫)에 가까웠다. 스스로 세도(世道)를 담당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훈척(勳戚)들에게 부림을 당했고, 스스로 사문(斯文)을 호위한다고 일컬었지만 부억(扶抑)에 중도(中道)를 잃음을 면치 못하는 등 실제로 사무(事務)에 통달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재처(裁處)하는 모든 것이 매양 피상적이었으므로 8년 동안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으면서 일컬을 만한 선정(善政)이 없었다.

경신년014) 오시수(吳始壽)의 죽음과, 임술년015) 전익대(全翊戴)의 옥사(獄事)는 크게 공평성을 잃은 처사였으며, 은밀히 밀고(密告)를 주장하였으므로 이미 청류(淸流)에게 배척당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송시열(宋時烈)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으로 가계(家計)를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갑자년016) 경연(經筵)에서 사적인 일을 아뢰어 조정(朝廷)에까지 올린 다음 자신의 사견(私見)만을 주장하고 공의(公議)를 거스림으로써 드디어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분열시키고 조정을 불리하게 하여 15 년간의 흑백(黑白)의 논전(論戰)의 꼬투리를 열어놓았으니, 화수(禍首)를 소급하여 논한다면 절로 귀착(歸着)되는 데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내어 문벌이 정성(鼎盛)한데 총리(寵利)에 대한 경계에 어두웠고, 겸익(謙益)에 대한 훈계를 소홀히 한 탓으로 부녀(婦女)의 사치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군자(君子)들이 진실로 그가 자신의 죄가 아닌 것으로 화(禍)를 당한 것을 마음 아파했지만, 또 일면으로는 화를 자취(自取)하게 된 이유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 사초(史草)를 편수한 사람이 세 가지 대절(大節)로 그를 허여한 것은 그 또한 여탈(與奪)에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84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sb_11503128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