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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 정 2품(판서급) 이상 안동김씨 인사들

추읍산 2018. 12. 22. 23:09

순조 때 출사표.xlsx



참고

정조[1752(영조 28) -1800(정조 24)]

       재위 : 1776 -1800

정순왕후 수렴청정 때[1800(순조 원년) - 1803, 12월(순조 3) ]

순조 [1790(정조 14) -1834(순조 34)]

       재위 : 1800 -1834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1804년-1832년) 정권의 핵심인 정경[정 2품(판서 급) 이상]급의

안동김씨 문중 출사표

 

급제하고 처음 출사한 때

 

 

1804년(순조 4)~1832년 순조 32)

 

출사한 분

영조

김문순

정조

김이익, 김이교, 김이재, 김이양, 김이도, 김조순, 김희순, 김달순

정순왕후 수렴청정 때

김시근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

김학순, 김교근, 김유근

 

위 표(아래 ○로  개인별 안내하였다)의 인사들은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 정경급으로 한분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김조순을 평가하는데 있어 비중(차이는 있지만)이 높은 분들입니다. 탐구 없이 세도정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편승해서 삼정의 문란, 매관매직 등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양 취급하는 부류들이 꽤나 있습니다. 김조순은 본 블로그에서 여러번 안내하였으나 참고하려면 다음을 검색하십시오. 볼 곳: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143 


윗분들이 계속해서 상당기간 정 2품 이상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1804년 이후 매년 단위로 정리하니 평균 2명입니다. 이는 20여 명에 이르는 정경급의 인사 중 일부로 이 숫자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함께하는 타 문중 분들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총체적인 부정부패에 빠져들었나 이고 김조순이 조장했느냐 이겠지요.


조정의 핵심은 정경(정일품, 종일품, 정이품)으로 아래 정리하였습니다.

[정일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 부사, 영돈령 부사(國舅), 師傅(3 政丞의 겸직)] [종일품: 좌찬성, 우찬성, 판의금 부사, 판돈령 부사, 판중추 부사, 규장각 제학,] [정이품: 좌참찬, 우참찬, (6조)판서, 대제학, 한성부 판윤, 지돈령 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아래 발췌한 곳 : 민족문화대백과사전으로 아닌 곳은 퍼 온 곳을 밝혔다. 


○ 김문순(金文淳)

1744(영조 20) - 1811(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재인(在人). 고조부는 김창집(金昌集)이고, 할아버지는 김준행(金峻行)이며, 아버지는 김이신(金履信)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7년(영조 43)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겸문학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문학·사서를 거쳐 1773년 벼슬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라 승지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대사간이 되었으며 좌승지·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782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노론인 김문순은 남인인 지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의 죄를 논하고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곧 기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784년 동지경연사에 이어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채제공과 뜻이 맞지 않아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789년 이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듬해 강화 죄수의 처결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그러다가 곧 예조판서로 기용되어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이 되었다. 1791년 평시서제조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평택현감 이승훈(李承薰)이 천주교인으로서 향교의 문묘에 알성(謁聖)할 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에 여론이 분분했지만 처벌하지 않아 금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곧 풀려나 다시 한성판윤이 되었다.
1796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듬해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0년(순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1802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순조 즉위 후, 국구(國舅)인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김희순(金羲淳)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 되어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804년 수원유수, 1806년 판의금부사에 이어 이조판서·선혜청당상·우참찬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김이익(金履翼)
1743(영조 19) - 1830(순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보숙(輔叔), 호는 유와(牖窩). 할아버지는 김우겸(金祐謙)이고, 아버지는 김유행(金由行)이며, 어머니는 이덕영(李德英)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5년(정조 9) 진사로서 알성 문과에 갑과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부교리(副校理)가 되어 1787년 함경도 경원에 익조(翼祖)와 도조(度祖)를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다음 해 교리가 되어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을 탄핵하다가 이성(利城)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790년 장령(掌令)과 동부승지, 이듬해 대사성과 대사간 등을 거쳐 1793년에는 안동부사가 되었다.
안동부사 재직시 형벌이 과다하여 안동사람들의 소청에 따라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조참의와 대사간을 지내고 1795년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97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99년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0년순조가 즉위한 뒤 벽파(僻派)가 득세하자 시파(時派)로 지목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안동김씨가 집권하자 방환되어 1807년(순조 7) 공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어서 수원부유수·대사헌·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812년 대호군으로 재직시 세도(世道)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스스로 치사(致仕: 벼슬길에서 은퇴함)하고 봉조하(奉朝賀)를 받았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옮긴이 주 1800년 정순왕후 집권으로 진도에 유배되었고 이때 올곧은 삶을 살면서 그의 저서 순칭록(循稱錄)을 통해 진도 백성의 교화(敎化)를 위해 진력했다고 합니다. -  전남일보 2008, 2, 13자 -유배지에서 만난사람.-


○ 김희순(金羲淳)
요약 1757(영조 33) -1821(순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초(太初), 호는 산목(山木)·경원(景源). 김시발(金時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교행(金敎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김이인(金履仁)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극현(李克顯)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3년(정조 7)에 생원이 되고,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사직서직장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사서를 강론하였다.
1791년 부수찬·삼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사간으로서 이가환(李家煥)의 부당함을 상소하다 삭직당했으나, 곧 포천에 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1793년 상소한 일이 말썽이 되어 파직되었다.
1796년 괴산군수와 서산군수를 지낸 뒤, 1799년 응교·부응교·세자보도 등의 임무 수행 중 영남 지방에 기근이 들어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승지를 거쳐, 1800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순조가 즉위하자 실록당상(實錄堂上)에 제수되었다.
시강원보덕·이조참판을 거쳐 1803년 영남안찰사, 1806년 호조·예조·병조·공조의 참판과 한성부서윤·이조참판·한성부판윤·대사헌 겸 홍문관제학·비변사유사당상 등을 두루 지냈다. 1809년 병조판서·이조판서, 이듬해에 호남관찰사, 1812년 광주유수·이조판서 겸 세자빈객으로 인재 등용을 고르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사감을 가졌던 전 참의 한시유(韓始裕)의 무고로 사직당하였다. 뒤에 정헌으로 승계한 뒤 종부시제조·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19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임 중 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른 뒤 죽었다. 어릴 때부터 문사에 능했으며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천집(淵泉集)』


○ 김이교[金履喬 1764년(영조 40) - 832년(순조 32)]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시찬(金時粲)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수찬(修撰)·초계문신(抄啓文臣)·북평사(北評事)를 거쳐, 1800년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같은 해 6월순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 김씨(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고 시파(時派)를 탄압하였다. 이 때 시파로서 벽파에 의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당하고 동생 이재(履載)도 전라남도 고금도에 안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부사과(副司果)의 직첩을 환수받고 동부승지·이조참의·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10년 10월 10일 일본 통신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호조판서 심상규(沈象圭)를 탄핵하다가 일단 체포되고 통신사도 교체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16일에 다시 통신사로 재임명되었다.
1811년 2월 12일 통신사의 사명을 띠고 출발해 5월 22일 부사(副使) 이면구(李勉求)와 함께 대마도부중(對馬島府中)의 객관(客館)에서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源忠岡]와 부사 후지야스[藤安薰]에게 국서전명(國書傳命)을 거행하고 공사예단(公私禮單)주 01)을 전달하였다.
사명을 다하고 같은 해 7월 3일대마도를 떠나 부산에 도착했고, 7월 26일에 왕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이듬해에도 대마도에 건너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도승지·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 우의정에 올랐는데, 이 때 영의정과 좌의정이 모두 공석이어서 한 때 국정을 도맡아 수행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죽리집(竹里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김이재(金履載)

요약 1767(영조 43) -1847(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후(公厚), 호는 강우(江右).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시찬(金時粲)이고, 아버지는 김방행(金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형이 우의정 김이교(金履喬)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9년(정조 13) 진사가 되고, 17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검열(檢閱)·지평(持平)을 거쳤다. 1799년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 죄인이던 정처(鄭妻)의 석방 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네 번이나 상계(上啓: 왕에게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글을 올림)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의 사직 상소가 마땅치 않다는 소를 올려 언양현(彦陽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 1805년에 풀려나 대사간·이조참의·경상도관찰사·대사성·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풍덕부(豊德府)를 개성에 통합시켜 땅의 경계를 확장, 정비하고 『중경지(中京誌)』를 편찬하였다. 이어 행호군(行護軍)·대사헌·공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좌참찬·예조판서·이조판서까지 이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뒤에도 계속 좌부빈객(左副賓客)·대사헌·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39년(헌종 5)에 시파와 벽파간의 논쟁으로 경기도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상호군·공조판서·이조판서를 지냈다.
당시 시파로 역량있는 중신이었으나, 시파와 벽파간의 싸움으로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했다. 판서로 있을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한 법전에 실린 금고조(禁錮條)를 산개(刪改: 쓸데없는 문장이나 글을 없애거나 고침), 이혁(釐革: 바로잡아 새롭게 함)해 백성의 신원안(伸寃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편서로는 『중경지(中京誌)』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기년편고(紀年便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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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달순(金達淳 )

요약 1760(영조 36) -1806(순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以), 호는 일청(一靑). 김양겸(金養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범행(金範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김이현(金履鉉)이며, 어머니는 송재화(宋載和)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전직 군수·현감과 유생 등이 순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총애를 받던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를 제거하고자 소를 올리고 통문을 발하였다.
이에 서용보는 김달순도 관계되었다고 하여 인책하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책 도중 순조의 동가(動駕) 때에 불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0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전 호조판서 이서구(李書九)가 죄를 쓰고 물러감에 따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한 뒤 그 해 특지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정조실록(正祖實錄)』을 바치고 『선조보감(先祖寶鑑)』의 편찬을 청하였다.
벽파(僻派)였던 김달순은 박치원(朴致遠) 등을 추증(追贈)하라고 아뢰었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에 이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다시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속조야집요(續朝野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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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양(金履陽 )

요약 1755(영조 31) -1845(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命汝). 할아버지는 김시술(金時述)이고, 아버지는 김헌행(金憲行)이며, 어머니는 윤지술(尹志述)의 딸이다. 초명은 김이영(金履永)이었으나 예종과 이름이 비슷하여 피휘(避諱: 임금의 이름을 피함)하기 위해 김이양이라 개명할 것을 청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95년(정조 19) 생원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812년(순조 12) 함경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그 지방의 기강확립에 힘쓰는 한편 고장주민들의 민생고 해결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계문(啓文: 왕에게 드리는 형식을 갖춘 글)를 올려 변경지방 군사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시정하도록 건의하는 동시에 어염선세(漁鹽船稅)와 둔전세(屯田稅) 및 마필(馬匹)의 헌납을 감면해주도록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서 함경도의 진환곡(賑還穀) 확보를 위하여 영남포항창(嶺南浦項倉)의 곡식 3만석을 이급(移給: 옮겨서 지급함)해주도록 주청하여 2만 3000석을 얻는 데 성공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1815년 차대(次對: 임금의 요청에 의한 임금과의 대좌)에서는 함경감사 때의 경험을 들어 국경지방 군사제도 개선을 주장, 허락을 받았다. 같은 해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어 토지측량의 실시와 세제 및 군제의 개혁,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고,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다.
1844년(헌종 10)에는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되었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요약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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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도(金履度) 

요약 1750(영조 26) -1813(순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계근(季謹).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고, 아버지는 김탄행(金坦行)이며, 어머니는 한백증(韓百增)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00년(정조 24) 전령(前令)으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바로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정언(正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벽파(僻派)가 득세하자 시파(時派)로 몰려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04년 대사성을 비롯하여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며,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왕비가 된 뒤 외척세력이 득세하자 우주서사관(虞主書寫官)으로 가자되었다. 1806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경기도관찰사·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1810년 병조판서·공조판서 등을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또, 그 해 대사헌으로 액례군(掖隷軍) 증액을 상소하고 무예별기군을 선발하여 훈련도감에 되돌려 소속되게 하였으며, 1812년 수원부유수가 되었다. 지조가 굳었으며 친하고 먼 것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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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순(金明淳, 1759년 - 1810년 7월 24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자(字)는 대숙(大叔), 본관은 (신)안동이다. 1801년(순조 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순조의 국구 김조순(金祖淳)과는 6촌(4촌 - 옮긴이 주)간이다. 서울특별시 출신
생애[편집]
김창집의 4대손으로, 김제겸의 증손이며 김달행의 손자이다. 생부는 김이기인데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김이경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순원왕후의 친족으로, 김제겸의 다른 아들인 김성행(김달행 - 옮긴이 주)의 손자 김조순과는 6촌간(4촌 - 옮긴이 주)이 된다.
음보로 출사하여 현감(縣監)으로 재직 중 1801년(순조 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그해에 특별히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1801년(순조 1년) 경연관(經筵官)에 발탁되고, 10월 9일 호조참의(戶曹參議), 1802년 2월 25일 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1803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804년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거쳐 1807년 11월 5일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고 12월 18일 승지가 되었다. 1808년 이조참판(吏曹參判), 1809년 비변사당상을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 다시 이조참판이 되고, 그해 4월 18일 비변사 당상, 11월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1810년(순조 10년) 3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 그해 7월 24일 함경도관찰사로 근무 중 사망하였다.

발췌 : 위키백과,


옮긴이의 글

아경(참판급)으로 머물러 종2품이고 옮긴이는 어떤 부정적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김조순의 세도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류(部類)들이 묶어놓았습니다

 


◯ 김시근(金蓍根 1755 ~ ?   흥지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흥지(興之). 1802년(순조 2) 성상수두평복경과(聖上水痘平復慶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뒤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시근 [金蓍根] (두산백과)


◯ 김학순(金學淳1767 ~ 1845 )

(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습(而習). 호는 화서(華棲). 아버지는 목사 김이석(金履錫)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홍주영(洪疇泳)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5년(순조 5) 증광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808년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1809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영남어사·순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825년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1827년 도승지, 1832년 공조판서, 1833년 형조판서, 1835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40여 년 동안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왕의 자문과 정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청렴과 근면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화서집(華棲集)』이 있다.

참고문헌
• 『국조방목(國朝榜目)』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화서집(華棲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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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근(金敎根, 1766 -1844)

조선 헌종(순조와 헌종대- 옮긴이 주)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맹여(猛汝)이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후 대과(大科)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 참고문헌 : 『순조실록』, 『철종실록』

발췌 : 여주시사 - 성씨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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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근(金逌根)

요약 1785(정조 9) -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선(景先), 호는 황산(黃山). 할아버지는 김이기(金履基)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김조순(金祖淳)이며, 어머니는 홍배호(洪配浩)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0년(순조 10) 부사과(副司果)로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뒤 곧 홍문록회권(弘文錄會圈)에서 5점을 얻고 사서를 거쳐 검상(檢詳)이 되었다. 181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고, 2년 뒤에는 대사성을 역임한 뒤 곧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었다.
1822년 이조참판에 오르고, 3년 뒤에는 대사헌이 되었으며, 1827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는 도중 면회를 거절당한 전직 관리(德川郡에서 퇴임한 전직 아전)에 의해 일행이 살상되는 흉변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고, 돌아와서는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곧이어 이조판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군사의 실권을 잡아 판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중풍에 걸려 4년간 말을 못하는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갈필(渴筆: 붓에 먹물을 묻혀서 그리는 수법)을 사용하여 지극히 간일(簡逸: 간략하면서도 안락함)하고 문기(文氣) 넘치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잘 그렸다.
유작으로 개인 소장의 「오주고목도(五株枯木圖)」와「괴석도(怪石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연산도(硏山圖)」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 『한국회화대관』(류복렬 편, 문교원, 1969)요약 테이블


 옮긴이가 추가하는 글

1823년(순조 23) 9월 9일 순조실록에 의하면 당시로써는 금기시되던 서얼소통(庶孼疏通, 서손<庶孫>이 과거 응시 자격을 얻거나 관직에 임명되던 일)에 관하여 김조순과 위 김이교, 김이재, 김이양, 김시근과 조정의 여러분이 열린 마음으로 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순조 때 출사표.xls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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