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명당이라는 영화

5, 김조순이 지은 효명세자의 지문

추읍산 2019. 3. 20. 10:00

지문(誌文)에,

"우리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주상 전하(淵德顯道景仁純禧主上殿下)께서 왕위에 오르신 30년 경인(庚寅) 5월 6일(임술)에 왕세자(王世子)가 병으로 희정당(熙政堂)의 서협실(西夾室)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춘추(春秋)가 22세였다. 성상(聖上) 및 왕비(王妃)가 호통(號慟)하고 운절(霣絶)하면서 하늘에 호소하였으나 어쩔 길이 없었으며, 경사 대부(卿士大夫)와 진신 장보(搢紳章甫)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울먹이며 서로 조상(弔喪)하기를, ‘하늘이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가? 저성(儲聖)이 돌아갔으니,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액정(掖庭)의 위사(衛史)와 제사(諸司)의 이서(吏胥)들이며 도성에 가득한 군민(軍民)과 여대(輿儓)와 부유(婦孺)들도 모두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울기를, ‘우리 양성(兩聖)의 지인(至仁)과 성덕(盛德)으로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며칠 사이에 슬퍼하며 원통해 하는 소리가 팔역(八域)에 사무쳤다. 예관(禮官)이 영조[英宗]가 찬정(纂定)한 《상례보편(喪禮補編)》에 의거하여 성상은 참최(斬衰) 3년의 복(服)을 입고, 왕비는 재최(齋衰) 3년의 복을 입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삼대(三代) 이래로 역대(歷代) 및 국조(國朝)에서 일찍이 시행하지 않았던 바였으므로, 성상께서 그것을 의심하여 선왕(先王) 병오년098) 에 문효 세자(文孝世子)의 복제(服制)를 의논한 내용을 인용하여 국조의 구제(舊制)로 결단하도록 명하자, 예관이 다시 인조(仁祖) 때의 이목(李楘)·김홍욱(金弘郁)·이경여(李敬輿)의 말을 들이밀면서 대신(大臣)과 유현(儒賢)에게 묻도록 청하였으며, 마침내 참최와 재최로 제정하여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미 염습(殮襲)을 해서는 환경전(歡慶殿)으로 옮겨 빈소(殯所)를 조성하였으며, 4일 만에 성복(成服)하고 3일을 지낸 무진(戊辰)에 시호(諡號)를 효명(孝明), 묘(墓)를 연경(延慶), 묘(廟)를 문호(文祜)라 하였으며, 추(秋) 8월 4일(기축)에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좌측 유좌(酉坐)로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성상께서 신에게 현실(玄室)의 지문(誌文)을 짓도록 명하셨는데, 신이 여러 날을 지내면서 두려워하며 겁이 나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아래와 같이 차례로 짓는다. 삼가 살펴보건대, 세자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대(旲)이며, 자(字)는 덕인(德寅)이니, 우리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전하의 제1자(第一子)이시며, 우리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니는 명경(明敬) 중궁 전하(中宮殿下)이시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시다. 기사년099) 8월 9일(정유)에 왕세자가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에서 태어나셨다. 이보다 먼저 모비(母妃)의 꿈에 용(龍)이 나타난 상서가 있었으며, 장차 태어날 때에 이르러서는 채색(彩色)의 무지개가 원중(苑中)에서 일어나 묘정(廟井)으로 뻗쳤으며 소나기가 내리고 우레가 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미 태어나자 하늘은 즉시 개이고 궁전의 기와에는 오색(五色)의 운기(運氣)가 둘렸다가 권초일(捲草日)100) 에 이르러서야 흩어졌다. 세자는 이마가 융기(隆起)한 귀상(貴相)에다 용(龍)의 눈동자로 천표(天表)101) 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므로, 궁중(宮中)의 상하(上下)가 모두 말하기를, ‘장효왕(莊孝王)102) 과 흡사하다.’라고 하였었다. 그날로 원자(元子)라고 호(號)를 정하였다.

임신년103) 여름에 대신(大臣)이 일찍이 세자[儲貳]를 세우도록 청하여 7월 병자(丙子)에 책봉(冊封)하여 왕세자로 삼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책봉받는 예(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살이었다. 그리고 정축년104) 봄에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였으며, 3월에 태학(太學)의 생도들 틈에 끼어 알성(謁聖)하고 박사(博士) 앞에 나아가 배우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무엇을 닦아야 성인(聖人)이 될 수 있습니까?’ 하였는데, 영특한 음성이 맑고 명랑하여 의도(儀度)가 엄연하였으므로, 성균관에 빙 둘러 있던 수많은 청금(靑衿)105) 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옛날에 들었던 우리 선왕(先王)의 입학(入學)할 때의 융성했 던 일을 지금 다행스럽게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묘년106) 봄 3월 임자(壬子)에 경희궁(慶熙宮)의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그 해 겨울인 10월 임인(壬寅)에 가례(嘉禮)를 행하였으니, 풍양 조씨(豊壤趙氏) 판서(判書) 만영(萬永)의 딸인 지금의 빈궁 저하(嬪宮邸下)이시다. 정해년107) 7월 18일 신유(辛酉)에 원손(元孫)이 탄생(誕生)하여 금년 9월에 장차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려고 하던 참인데, 그 기일에 미치지 못하고 신선(神仙)의 수레를 타고 떠나셨으니 아! 슬픕니다.

신사년108) 3월에 효의 왕후(孝懿王后)예척(例陟)109) 하시어 양성(兩聖)이 애구(哀疚) 중에 있을 때에 세자가 좌우(左右)에서 위로(慰勞)를 드리며 힘써 죽음[粥飮]을 드시도록 하였고, 임오년110) 수빈(綏嬪)111) 의 상(喪)에도 그렇게 하였다. 계미년112) 에 임금이 대소(大小)의 전좌(殿座) 및 신린(臣隣)의 진접(進接)과 세자의 시좌(侍坐)를 명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임금이 세자에게 태묘(太廟)의 동향(冬享)을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로부터 종묘(宗廟)·사직(社稷)·전궁(殿宮)의 향사(享祀)를 모두 섭행하였다. 정해년113) 원조(元朝)에 수필(手筆)로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에 하령(下令)하기를, ‘나의 나이가 이제 열아홉 살이다. 그런데 단지 한가하고 편하게 지내는 것이 즐거운 것인 줄만 알고 항상 학문에 종사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한 것인 줄을 모르고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이미 허다(許多)한 세월이 지나갔다. 스스로 그러한 가운데를 돌아다보면 송구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제 정월 초하루를 맞아 문득 지난날 일을 다잡아 하지 않던 습관을 변경하여 앞으로는 대단한 반성으로 새로운 공부에 힘쓸 터이니, 나의 양방(兩坊) 궁료(宮僚)들은 각기 신칙하고 면려하는 경계를 보존하여 권면하는 뜻을 진달하도록 힘쓰라.’고 하였다.

2월 을묘(乙卯)에 임금이 왕세자에게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빈대(賓對)를 행하고 인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신미년114) 이후부터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있는 적이 많아 비록 조금 편안하기는 하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언제나 기무(機務)가 지체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는 바는 바로 내가 스스로 근심하는 바이다. 세자는 총명하고 영리하며 나이가 점점 장성하였으니, 근래에 시좌(侍坐)하게 하고 섭향(攝享)하게 한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멀리는 당(唐)나라 때의 일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열성조(列聖朝)에서 대리 청정하게 한 일을 본받아 내 마음에 이미 정하여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수고로움을 나눈다는 핑계로 조양(調養)을 온편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정무(政務)를〉 밝게 익혀 다스리는 도리를 통달하게 하는 것이 종묘·사직과 생민(生民)의 복(福)이다. 모두 조정에 나아가 대계(大計)를 고(告)하도록 하라.’ 하자, 이에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임금을 입견(入見)하고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는 이제 근심할 일이 없었던 문왕(文王)과 같습니다.’ 하면서, 마침내 서정(庶政)과 서사(庶事)를 을미년115) 의 고사(故事)를 법으로 삼도록 청하였다. 세자가 세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의 수고로움을 네가 대신하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의 떳떳한 법이다. 내가 어떻게 떳떳한 법이 아닌 것을 밟으려고 하겠는가? 조심스럽게 할지어다. 사물(四勿)은 자신을 수양하는 근본이고 구경(九經)은 나라를 다스리는 요긴함이니, 부지런히 하고 검소하게 하여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만들지 말고 원대하게 내다보면서 덕스런 말을 받아들여 사람들의 마음을 미덥게 하라.’ 하였다. 그 뒤 열흘만인 갑자(甲子)에 세자가 대리 청정하는 하례를 중희당(重熙堂)에서 받았다.

이미 〈대리 청정하는〉 명을 받고서는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는 데 힘쓰느라 잠자고 식사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초야(草野)에서 목을 빼거나 눈을 닦고서 보기도 하였다. 야순(夜巡)하는 법금(法禁)을 거듭하게 하고 좌아(坐衙)하는 규정을 신칙하였으며, 감수(監守)하는 법을 엄격히 하고 과장(科場)의 폐단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는데, 도성(都城) 주민의 휴척(休戚)이 관계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경계하여 형조(刑曹)의 관원과 한성부[京兆]의 관원은 가려서 뽑도록 하였으며, 감사(監司)·곤수(閫帥)와 수령으로 사폐(辭陛)하는 자는 모두 힘쓰도록 유시하여 보내고, 복명(復命)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두 인견(引見)하여 폐단이 있고 없음을 물었으며, 문신(文臣)·무신(武臣)과 한학 유생(漢學儒生)의 강독(講讀)과 제술(製述), 그리고 윤대관(輪對官)의 소견(召見)은 모두 일차(日次)로 하였었고, 궁궐을 경호하는 위사(衛士)들의 교시(較試)와 연습에도 역시 모두 몸소 임어(臨御)하여 열시(閱視)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옥안(獄案) 및 사민(士民)의 상언(上言)은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먼저 직접 열람하고서 해당 관사(官司)에 회부하게 하고 간혹 곧바로 판결하여 내리는 것으로 떳떳함을 삼았다.

9월 신해(辛亥)에 주상 전하(主上殿下)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연덕 현도 경인 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라고 하였으며, 중궁 전하(中宮殿下)에게는 ‘명경(明敬)’ 이라고 올리고 친히 책보(冊寶)를 올렸었다. 무자년116) 에 모비(母妃)의 춘추(春秋)가 40이 찼다고 하여 2월 임오(壬午)에 자경전(慈慶殿)에서 진작(進爵)하였는데, 양전(兩殿)에서 함께 임어하여 받으셨으니, 자애와 효도가 융흡(融洽)하여 상서롭고 화목한 기운이 궁궐에 넘쳤다. 이 진작에 호조[度支]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궁중에서 조판(措辦)하여 행하였다. 명년(明年)인 기축년117) 에 성상(聖上)의 보령(寶齡) 또한 40에 올랐으므로, 2월 계축(癸丑)에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명정전(明政殿)에서 진찬(進饌)하며 구작례(九爵禮)를 행하고 3일 뒤에 또 자경전(慈慶殿)에서 소작(小酌)을 올렸으며 이어서 내연(內宴)을 행하였다. 이때에 대사헌 박기수(朴綺壽)가 글을 올려 여령(女伶)을 대궐 가운데 들인다는 것을 논하고 경계하는 말을 진달함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귀양을 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용서를 받고 돌아왔으며, 이듬해 봄에 발탁하여 형조 판서를 삼고 영지(令旨)를 내려 그의 직언(直言)을 표창하였으므로 국인(國人)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가을에 팔도(八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숨었거나 빠뜨려진 이를 찾아내게 하였고, 겨울에는 신의학(愼宜學)을 주벌(誅罰)하였다. 대체로 신의학이 진달한 글 내용에 진신(搢紳)을 기울이어 빠뜨리게 하려고 밖으로는 선조(先朝)의 오회 연교(五晦筵敎)를 핑계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기 때문이었다. 경인년118) 봄에 세자가 어용(御容) 대소(大小) 두 본(本)을 고쳐 그릴 것을 청하였으며, 이미 완성이 되자 세자가 손수 표제(標題)를 써서 서향각(書香閣)에 봉안(奉安)하고 있는 구본(舊本)과 함께 규장각(圭章閣)의 주합루(宙合樓)로 옮겨서 봉안하게 하였다. 상서(象胥)119) 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면서 황조 보록(皇朝寶錄) 4백여 권(卷)을 구매하여 바치니, 세자가 각신(閣臣)으로 하여금 그 편차(編次)를 열람하여 갑(匣)에 넣어 대보단(大報壇)의 봉실(奉室)에다 봉안하게 하였다. 그리고 4월 10일 뒤부터 세자에게 대단치 않은 병이 있었는데, 얼마를 지나지 않아 갑자기 각혈(咯血)하는 병을 앓게 되었고, 나타나는 증세가 여러 번 바뀌어 처방(處方)과 약(藥)이 그 효과를 아뢰지 못하였고 기도(祈禱)가 그 신령함을 얻지 못하여 5백 년의 반석(磐石) 같은 종묘(宗廟)가 하루 아침에 위태롭기가 한가닥의 털끝에 매인 것 같았으며, 군신 상하(君臣上下)에게는 남은 슬픔이 있게 되었다. 아! 원통하도다.

세자의 총명은 남들보다 뛰어나 네 살 때에 관서(關西)의 역적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평정이 되었다는 첩보(捷報)가 이르자, 세자가 한창 젖을 먹고 있다가 젖을 놓고서 웃으며 말하기를, ‘쾌하고 좋구려.’라고 하므로, 유모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를 물으니, 답하기를, ‘도적이 벌써 잡혔으니, 어찌 쾌하고 좋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그 영특함이 이런 부류였다. 점점 장성함에 이르러 사람들이 간혹 국조(國朝) 열성(列聖)들의 성덕(盛德)을 가지고 우러러 질문하기를, ‘아무 일과 아무 일 같은 것을 저하(邸下)께서도 할 수 있습니까?’ 하면, 번번이 말하기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하늘에서부터 타고나시어 성상(聖上)께서 비록 사랑을 모으심이 비교할 데가 없었지만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존하였으며, 감히 〈총애를〉 믿고 함부로 하는 바가 있지 않았고, 아무리 장난이나 좋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모비(母妃)가 금지시키면 그만두었다. 청양 부부인(靑陽府夫人)이 졸(卒)하자 모비가 별전(別殿)에 거처하면서 너무 슬퍼한 나머지 가끔 기절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맨발로 약시중을 들면서 근심스런 표정으로 간호를 하였고, 악전(幄殿)을 문 밖에다 설치하게 하고는 다시 침실(寢室)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공제(公除)에 이르러 모비가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와 같이 한 달이 넘게 이곳을 지켰는데 이제 본래의 처소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섭섭한 마음 금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자가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소자(小子)가 어머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였다. 이로부터 아침이면 밤 사이의 안부를 살피고 저녁이면 물러났다가 어두워지면 이부자리를 깔아드리고 밤중이 되어서야 물러난 것이 몇 달이 되었다. 대군(大君)이 태어나자 세자가 매우 기뻐하며 날마다 어루만져보고 말하기를, ‘내 동생이 언제 나만큼 자라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일찍 죽는 데 이르러서는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기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러 누이들 보기를 귀천(貴賤)의 다름이 없이 하였으며, 명온 공주(明溫公主)와는 나이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에 정의(情誼)가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고 영온 옹주(永溫翁主)박 숙의(朴淑儀)에게서 낳았는데 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말을 잘 못하였으므로 항상 불쌍하게 여겨 어루만져 주었으며, 그가 졸(卒)하자 세자가 놀라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 자모(慈母)의 정경(情境)은 더욱 슬프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그리고 너그러우면서도 남들을 아끼고 뭇 신하와 접견하면서 기상은 인자하고 말은 온화하며 경대부(卿大夫) 및 궁료(宮僚)로 친근한 자에 대해서 자(字)를 많이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백성들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이 긍휼함을 보였고, 오두막집에 곤궁하게 사는 상황을 들으면 번번이 서글프게 여기며 차마 듣지 못하는 기색이 있었다. 영남과 호서에 기근이 들자 내탕고(內帑庫)에 있는 많은 곡식을 내어 그 진휼하는 밑천을 넉넉하게 하였고, 북로(北路)에 또 큰물이 지자 배로 관동(關東)과 영남의 곡식을 운반하여 진휼하도록 하여 남방과 북방에 버려지거나 야윈 자가 없게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밥을 드시다가 밥알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스스로 주워서 삼켰으며, 간혹 옆에 뫼시고 있는 사람에게 먹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내려 준 것을 만홀하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화공(畵工)을 시켜 경작하고 길쌈하는 것을 병풍에다 그리도록 하여 농사짓는 일이 어렵다는 뜻을 마음에 두게 하였으며, 사전(祀典)에 대해서도 더욱 뜻을 두어 황단(皇壇)과 태묘(太廟)에서부터 사직(社稷)과 전궁(殿宮)의 향사(享祀)에 이르기까지 바르고 밝게 일을 받들면서 반드시 그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주선하며 오르내리고 절하며 꿇어앉고 창(唱)하며 찬(贊)하는 절차와 준이(尊彛)와 형두(鉶豆)를 씻거나 진설(陳設)하는 일과 금석(金石)·사혁(絲革)의 강조(腔調)를 합치거나 멈추게 하는 수(數)며 일우(佾羽)의 모습과 현가(絃歌)의 읊조림에 품위가 있도록 하지 않음이 없었고 살펴보지 않음이 없었으며, 관천(祼薦)을 이미 마치고는 오히려 목연(穆然)하게 철상(徹床)하기를 기다리셨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상복(上服)120) 이 아니면 단기(緞綺)121) 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의대(衣襨)는 모두 주면(紬綿)을 사용하였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세손(世孫)이 단품(緞品)이 있는 때때옷을 입었는데, 세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 어찌 비단옷을 착용하게 하는가? 더구나 나도 입지 않는 것이겠는가? 빨리 고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아! 신이 폐부(肺腑)처럼 가까운 친척으로 늙어서 머리가 하얗도록 먼저 왕사(王事)를 위하여 몸을 바치지 못하였으니, 슬픔과 원통함을 머금은 듯하며 구구(區區)한 필묵(筆墨)으로 해와 달 같은 유광(遺光)을 그리려고 하니, 심장(心腸)이 목석이 아닌데 유독 어떻게 차마 하겠습니까? 지금 주워서 기재한 것은 모두 나라 사람들이 듣거나 본 것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며, 복(服)을 이루던 날에 우리 곤전(坤殿)께서 목이 메어 신에게 말하기를, ‘세자의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착한 일을 좋아하는 성품과 청명(淸明)하고 특별히 뛰어난 자질이 단절(短折)할 상(相)이 아닌데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세자가 근간에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지난 일은 뉘우칠 것이 많습니다. 평소에는 남을 신임하기를 자신처럼 여겼었는데, 요즈음에는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가 각기 그 사사로움을 위하고 진실되게 나를 위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소자(小子)가 이제부터는 옛날의 습관을 끊어버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책을 읽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또 시환(侍宦)을 대하여 짓고 있는 가옥(家屋)을 가리키며 탄식하기를, 「이렇게 지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내 마음이 오늘날과 같았다면 옛날에 반드시 건축하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바로 여기에서 그의 현명함을 알 수 있는데, 하늘이여 원통하게 어찌 천년(天年)을 여기서 그치게 하셨는가? 아니면 국사(國事)를 우려하다 지쳐서 그의 수명을 재촉하였는가?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으므로, 신이 받들어 듣기를 끝내기도 전에 역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엄억(掩抑)하면서 번민스럽고 원통함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여 물러나왔다.

얼마 있다가 또 삼가 가만히 생각하니, 융성하도다 우리 세자의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청명한 자질로 춘궁(春宮)에서 덕(德)을 기르기를 거의 20년에, 좋은 소문이 날마다 전파되었고 구가(謳歌)가 날마다 돌아와 〈옛날〉 순(舜)임금의 섭정(攝政)이 사람들의 마음에 잘 맞아 구역(區域) 안이 그의 덕화를 입어 의당 더욱 힘쓰도록 기다림이 없을 듯하였으며, 오직 스스로 자만하지 않는 뜻이 저절로 《서경(書經)》에서 일컫는 바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니, 공자[孔夫子]가 이른바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禮)를 회복시킨 이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 같지만 심법(心法)이 서로 부합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에서 낸 능력이 아니면 돌아보건대, 어떻게 여기에 참여하겠습니까? 만약 하늘로 하여금 연수(年壽)를 빌리게 하여 그 온전한 덕(德)을 성취하도록 하였다면, 진실로 요(堯)임금같이 되기도 하고 순임금같이 되기도 하여 융성함이 삼대(三代)에 견줄 만하였는데, 이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심법의 전수(傳授)가 멀지도 않고 간격도 없어 뒷날 우리 세손(世孫)이 우뚝하게 성인(成人)이 되어 이 심법의 오묘함을 전수하고 잇달아 계승하며 넓히고 크게 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에 비교할 만한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국가 억만년 영장(靈長)의 복으로 실제 여기에서 기반이 되는 것이 우리 세자께서 마침내 몸소 가르치지 못한 마음 또한 장차 하늘과 땅 속의 어둡고 막막한 가운데서도 유감이 없을 것이니, 아! 애석하고, 아! 슬프도다."

하였다. 【영돈녕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