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문곡과 영안위

영안위 홍공 묘지명 병서

추읍산 2020. 3. 28. 14:53
한국고전종합DB

문곡집 제19권 / 묘지명(墓誌銘) 17수  

永安尉洪公墓誌銘 幷序            

근세의 의빈(儀賓 왕의 사위)은 뛰어나고 훌륭하여 사람들에게 이름이 난 이가 많지만, 문장과 행실, 기절(氣節)로 세상에 일컬어지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다. 덕성과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원망도 미움도 없이 복록(福祿)을 누릴 수 있었던 경우는 오직 영안(永安) 홍공(洪公)이 아니겠는가.
공은 휘가 주원(柱元)이고 자는 건중(建中)이며 자호(自號)는 무하당(無何堂)이고,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豐山縣) 사람이다. 예조 참판 증 영의정 휘 영(霙)이 아버지이고, 대사헌 증 영의정 휘 이상(履祥)이 할아버지이며, 증 좌찬성 휘 수(脩)가 증조이다.
시조 지경(之慶)은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직학사(直學士)가 되었다. 그 아들 간(侃)은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을 지냈는데, 문장과 절의로 무거운 명망을 얻어 세상에서 홍애 선생(洪厓先生)이라고 불렀다. 홍애의 아들과 손자는 모두 대제학을 지냈다. 그 뒤 몇 세대 동안 막혀서 현달하지 못했다가 대헌공(大憲公) 호 모당(慕堂)에 이르러 또 경술(經術)로써 세상의 명신이 되었다.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가 만력(萬曆) 병오년(1606, 선조39) 8월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 기국(器局)이 있었고 글 짓는 재주가 뛰어나 외할아버지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이 그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슬하에서 가르쳤고, 또한 북저(北渚) 김공 류(金公瑬)에게 더 배우도록 했다. 글을 지으면 그 표현이 매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문형(文衡 대제학)을 교대할 때 이른바 ‘마음을 전하는 벼루〔傳心硯〕’가 있었는데, 월사공이 오랫동안 대제학을 맡고 있다가 벼루를 가리키며 “언젠가 이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했으니, 그 기대가 이와 같았다.
관례(冠禮)를 올리기 전 발해(發解 향시(鄕試))에 입격하여 명성이 매우 자자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선발되어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받들었고 영안위에 봉해졌으며 관계(官階)는 명덕대부(明德大夫)가 되었다. 공주는 바로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따님이다. 모비(母妃) 인목왕후(仁穆王后)께서 광해조(光海朝) 때 서궁(西宮)에 10년간 유폐되어 있었는데 공주만이 모시고 보호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이르러 자성(慈聖)의 뜻을 받들어 친히 부마(駙馬)를 골랐다. 공경(公卿) 가문의 자제들 중 재주 있는 준걸들이 많이 나아왔는데, 결국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 공이 마침내 선발되었다. 갑자년(1624),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으로 주상께서 창황히 출행(出幸)했는데 마침 날이 어두워져 양궁(兩宮)께서 서로 길을 잃었다. 공이 명을 받들어 강변에 달려가 자전(慈殿)의 가마를 모시고 돌아오자 상이 매우 기뻐하며 특별히 위로하고 상(賞)을 내렸다. 어가(御駕)가 한양으로 돌아온 뒤 호종한 상으로 광덕대부(光德大夫)로 진급했다.
신미년(1631)에 자전께서 편찮으시자 상께서 위로하고 기쁘게 해 드리고자 공에게 한 계급을 더해 주어 성록대부(成祿大夫)로 진급했다. 병자년(1636, 인조14) 호란(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하여 또 수록대부(綏祿大夫)로 진급했다. 기묘년(1639)에 궁중에서 무고(巫蠱) 옥사가 있었는데, 공의 집안 여복(女僕)이 연루되었다는 진술이 있었다. 공은 대궐 아래에서 석고대죄했고, 얼마 안 있어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공은 문을 닫아걸고 물러나 바깥사람과 교류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한 것이 5년이었다.
을유년(1645)에 부친상을 당했다. 복제가 끝나고 들어가 사례하니 상께서 내시에게 선온(宣醞)을 명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며 총애하셨다. 신묘년(1651, 효종2)에 현묘(顯廟)께서 동궁(東宮)에서 세자가 되었는데, 공을 맞아 사신(使臣)으로 삼았으며 공은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공은 전후로 여러 번 도총관(都摠管)을 겸했고, 사옹원(司饔院)ㆍ전설사(典設司)ㆍ활인서(活人署)ㆍ빙고(氷庫)ㆍ조지서(造紙署) 등 여러 관서의 제조를 맡았으며, 의빈으로서 주원(廚院 사옹원(司饔院))을 겸하여 관장한 것은 오직 여성(礪城) 송공 인(宋公寅) 및 공 두 사람뿐이라고 한다. 부례(祔禮)의 제조가 되었던 것은 잠곡(潛谷) 김육(金堉) 정승이 공의 재주와 자질을 아깝게 여겨 관례를 제치고 특별히 임명했던 경우이다.
정해년(1647, 인조25)부터 신축년(1661, 현종2)까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연경(燕京)에 간 것이 모두 네 번에 이른다. 일찍이 하직하던 날에 효묘(孝廟)께서 노친(老親)의 연세와 병환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위유(慰諭)가 간곡했다. 갑오년(1654, 효종5)에 공이 사신에서 돌아왔는데, 마침 조공 석윤(趙公錫胤)과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모두 언사(言事)로 귀양을 갔다. 공이 평소 두 공과 교분이 깊었고 또 그 사람됨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윽고 상소를 올려 조석윤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시로 표현되어 원근 사람들이 전해 가며 읊으며, 박장원은 집에 노모(老母)가 있는데 자식 생각에 병이 났으니 정리로 보아 측은하다고 극진히 진달했다.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을 용서하고, 당(唐)나라 때 유우석(劉禹錫)을 관용했던 일을 인용하여 논의가 간절하고 지극했으며, 아울러 조공의 시를 베껴 바쳤다.
임금께서 공이 국정(國政)에 간섭하여 방헌(邦憲)을 함부로 범했다고 하면서 엄한 전지(傳旨)를 내려 파직시켰다. 공이 비록 말 때문에 죄를 얻었지만, 사론(士論)은 더욱더 어질게 여겼다. 얼마 있다가 영의정 정공 태화(鄭公太和)와 승지 김공 익희(金公益煕)가 입대하여 주상께 아뢰기를 “모(某)는 본래 내외가(內外家)가 명문이고 그 사람 자신도 사류(士流)이며, 혐의나 구애됨을 피하지 않고 지닌 소회를 진달했으니 나라를 위한 충정이 아님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 얼마 있다가 서용되어 원래 봉해졌던 지위를 회복했다.
무신년(1668, 현종9)에 현묘(顯廟)께서 온천에 거둥했는데, 공은 군부(君父)가 멀리 교외에 나가는데 의리상 홀로 뒤에 있을 수 없다며 병을 무릅쓰고 애써 따랐다. 이듬해에 임금께서 편찮아 날마다 대궐에 가 거처하다 갑자기 풍질(風疾)에 걸렸고, 임자년(1672)에 이르러 심해졌다가 9월 14일에 마침내 졸했으니, 춘추 67세였다.
병중에 있을 때 상께서 태의(太醫 전의(典醫))를 보내 약물을 가지고 가 구완하게 했으며, 부고를 듣고 특별히 비기(祕器 관곽(棺槨) 등의 장례 도구)를 하사했다. 삼전(三殿)과 동궁(東宮)께서 각각 중사(中使 환관)를 보내 공의 자식들에게 조문하게 했는데, 상(喪)에 임하고 제사에 예물을 보내는 것이 예법(禮法)대로였다. 11월 19일에 관청에서 도와 파주(坡州) 오리동(梧里洞) 병향(丙向 남남동향) 새 선영(先塋)에 예장(禮葬)했다. 태상시(太常寺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문의(文懿)’라고 했는데, 시법(諡法)에,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고 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인자하고 착한 것을 의(懿)라고 한다.
공주(公主)께서는 맑은 덕과 밝은 법도를 지녔는데, 공보다 14년 뒤인 을축년(1685, 숙종11)에 나이 83세로 졸했다. 지관(地官)이 공의 장지(葬地)가 금기를 범했다고 해서 마침내 풍덕(豐德) 모리(某里) 모향(某向) 언덕으로 묘소를 고쳐 잡아, 10월 28일 공의 묘를 옮겨 합장했다.
공은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만용(萬容)은 문과(文科)에서 두 번 장원(壯元)을 했으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다음 만형(萬衡) 역시 문과에 두 번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재주와 행실이 있었는데 일찍 졸했다. 다음은 진사(進士)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만희(萬煕)이고, 막내는 진사 호조 정랑 만회(萬恢)이다. 딸은 군수 조전주(曺殿周)에게 시집갔다.
만용은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중기(重箕)는 참봉이며, 다음은 중범(重範)ㆍ중연(重衍)ㆍ중복(重福)ㆍ중주(重疇)이다. 딸들은 진사 이대성(李大成), 생원 심귀서(沈龜瑞), 사인 이사량(李師亮)에게 시집갔다. 만형은 2남을 두었는데, 판관(判官) 중모(重模), 진사 중해(重楷)이다. 만희는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중석(重錫)은 생원이고 중익(重益)은 진사이다. 딸들은 사인 조정륜(趙正倫)ㆍ정희선(鄭希先), 생원 최창헌(崔昌憲), 사인 송요경(宋堯卿)에게 시집갔다. 만회는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중성(重聖)이고, 딸들은 진사 이집(李㙫), 사인 윤충(尹漴)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전주는 3남을 두었는데, 하언(夏彥)과 하기(夏奇)는 모두 진사이며 하장(夏章)은 어리다. 내외 증손과 현손 남녀 모두 50여 명이다.
아, 수항(壽恒)은 어린 시절부터 다행히 공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사랑을 입어 매번 공의 법도 있는 위의(威儀)와 빼어난 풍채를 보았거니와 마치 옥(玉)이 푸른 노을이 피어오르는 속에 서 있는 듯하여 근엄한 모습이 신선 속의 인물과 같았다. 조금 자라서 문하에 출입하며 사적으로 공의 기상을 보았더니 독실하고 두터우면서도 빛이 나고 우아했으며, 너그럽고 평안하면서도 장중했다. 몸을 단속할 때는 단정하며 분명했고, 남을 대할 때는 화락하며 공손했다. 이어서 공이 집안의 훌륭한 행실을 알 수 있었으니, 참판공의 병시중을 들 때 옷은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면서 9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다. 앞뒤로 부모님의 상례를 치를 때는 예를 집행하는 데 허물이 없었다.
이 부인(李夫人)의 상을 당했을 때 나이가 이미 60세가 지났고 병을 얻어 거의 위태로워 자제들이 울며 권도를 써서 변경하기를 청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제삿날에 곡읍(哭泣)하는 슬픔은 마치 초종(初終 초상(初喪)) 때와 같았으며, 묘소 아래 작은 집을 짓고 ‘추원(追遠)’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우재(尤齋) 송공(宋公)이 그 사실을 기록했다.
일찍이 참판공의 묘소를 옮길 때 난수(灤水)가 침식한 변고가 있었다. 이후 매번 폭우로 물이 불어나는 것을 보면 슬퍼하여 추모하며 마음 아파하는 기색을 띠었다. 여러 동생에게 우애로웠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며, 질병이나 기한(飢寒)을 자신이 겪는 듯했다. 이런 마음을 미루어 친척에게 미쳤으며, 은혜로운 뜻을 두루 펴서 멀고 가깝고의 차이가 없었다.
정축년(1637, 인조15)의 호란에 공의 처남 이공 단상(李公端相)이 붙잡혀 가 오랑캐 진영에 있었다. 마침 공이 인조(仁祖)를 따라 서교(西郊)에 나가 세자(世子)의 인질 행렬을 전송했는데, 임금에게 처남을 찾아올 수 있도록 청했고 곧 재산을 떼어 속환(贖還)하자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다.
여러 동생들과 어울려 글을 짓고 술을 마시는 모임을 즐겼으며, 언제나 신나게 술 취하고 흡족하게 하루를 보냈다. 비록 술 마시고 시를 읊으며 농담을 할 때라도 바르게 경계하길 그만두지 않았으며,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였고 존귀하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교유한 사람은 모두 당대의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으며,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 귀하거나 천한 사람 누구나 공을 사모하고 친히 여겼다.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고 가난했으므로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존귀하게 되었어도 항상 겸손했고 포의(布衣)의 선비로 자처했다. 갖옷이나 말, 음악이나 여색(女色) 같은 놀이개나 전원(田園)과 재물 같은 이익에는 일체 뜻을 두지 않았다.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서 오직 문학(文學)만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연경에서 받았던 의례적인 선물은 모두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짐 꾸러미는 씻은 듯했다.
평소에 시정(時政)을 비난하길 좋아하지 않았고 조정의 잘못을 들을 때면 번번이 저녁 내내 언짢아 했으며, 그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해서 나라의 근심을 잊지 않았으니, 곧 갑오년(1654, 효종5) 상소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공의 문장은 월사공(月沙公 이정귀(李廷龜))의 가법(家法)을 배운 것으로, 자유(子幼)가 사마천(司馬遷)에게 배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를 지으면 사정을 곡진하게 묘사하여 가락과 곡조가 모두 아름다워 한 편을 지어낼 때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입에 올렸다. 유고(遺稿) 몇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고 묵적(墨跡)도 펄펄 나는 듯 힘차고 뛰어났으니 겸비한 재능을 알 수 있다. 삼가 보건대, 위진(魏晉) 이래 부마의 선발 중에 가장 뛰어났다.
공의 평생을 논해 보자면, 자태가 순수하고 아름다워 하평숙(何平叔 평숙은 하안(何晏)의 자)과 비슷했고, 정신은 맑고 깔끔하여 왕자경(王子敬 자경은 왕헌지(王獻之)의 자)과 비슷했으며, 풍류를 즐기며 손님을 좋아하기로는 유진장(劉眞長 진장은 유담(劉惔)의 자)과 비슷했고, 곧은 신하를 구원하려고 논변하다가 그 말 때문에 죄를 입은 것은 또한 왕진경(王晉卿 진경은 왕선(王詵)의 자)과 비슷했다. 귀하게 되어서도 예의가 있었으며 부유하면서도 검소할 수 있었고, 집안이 번성했음에도 겸손할 수 있었던 인품은 또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데가 있었으니, 어찌 탁월하고 흠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판서공의 형제가 공의 묘지명을 변변치 못한 나에게 부탁했는데,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공을 위해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라 의당 사양할 수가 없었으나, 다만 우재공(尤齋公)이 이미 공의 묘비에 명을 지었으며 그 말이 믿을 수 있고 증거가 될 만한데 내가 또 어찌 감히 한마디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겠는가? 삼가 가장(家狀)을 보고 그 비문에서 빠지거나 소략한 곳을 모아 더 상세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이어 명을 지었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나라의 계책을 빛낼 만했으나 / 文章足以煥猷
관각에서 울리지 못했고 / 不得鳴於館閣
기량은 사람들을 누를 만했으나 / 器量足以鎭物
괴극에서 번성하지 못했으며 / 不得盛於槐棘
계책과 언론은 시대를 구하고 임금을 바로잡을 만했으나 / 謀猷言論足以救時而匡君
경연에서 펼치지 못했도다 / 不得展布於帷幄
어찌 하늘은 온전함을 주었는데 / 胡天之與其全
이 세상에서는 국한되었는가 / 而世之有所局
이름과 덕성은 성대하게 드러났고 / 惟其名德之顯盛
복록은 융성하고 혁혁했으며 / 福履之隆爀
자손들 번창했으니 / 子姓之昌熾
무궁하게 빛날 수 있으리라 / 足以垂耀乎無極
이는 본디 공이 스스로 이룩한 것이니 / 是固公之自致
또한 천도가 어김없음을 알 수 있네 / 亦可見天道之不忒
내가 지석에 명을 기록하나니 / 我銘玄石
모르는 사람들은 살펴볼지어다 / 昧者之矚
[주-D001] 고사(故事)에 …… 있었는데 : 
조선 시대 관례적으로 대제학에게 전해지는 벼루가 있었다고 한다. 중간에 벼루를 이이첨(李爾瞻)의 집에서 잃어버리고 신흠(申欽)이 다시 만들어 전했다고 한다. 《澤堂集 卷6 次交代太學士金淸陰寄傳心硯示韻》
[주-D002] 현묘(顯廟)께서 …… 하사받았다 : 
현종은 1649년(인조27)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고 1651년(효종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2년 9월 6일》 훙주원은 세자빈책례 때 정사(正使)로 다녀왔는데, 세자 책봉을 위해 고명과 면복을 청하러 중국에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承政院日記 孝宗 2年 12月 29日》
[주-D003] 부례(祔禮)의 …… 경우이다 : 
인조(仁祖) 부묘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가 영의정 김육(金堉)이었고 제조가 홍주원이었다. 《국역 효종실록 2년 9월 6일》
[주-D004] 공이 …… 진달했다 : 
영안위(永安尉) 홍주원이 1654년(효종5) 2월 18일에 상소를 올렸다. 《국역 효종실록 5년 2월 18일》
[주-D005] 송(宋)나라 …… 용서하고 : 
송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蘇軾)이 귀양 가 있으면서 〈수조사(水調詞)〉를 지었는데, 그 가사에 “다만 임금이 계신 궁궐 높은 곳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까 염려되네.〔只恐瓊樓玉宇, 高處不勝寒.〕”라고 했다. 이 노래가 전파되자, 신종이 듣고는 “소식이 끝까지 임금을 사랑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죄를 감하여 귀양지를 옮겨 주었다. 《宋史 卷338 蘇軾列傳》
[주-D006] 당(唐)나라 …… 관용했던 : 
당나라 헌종(憲宗) 때 유우석이 풍자시(諷刺詩)를 지었다가 조정 권신(權臣)의 미움을 사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배도(裴度)가 유우석의 모친이 늙었으니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청했다. 그러자 황제가 유우석의 행실은 밉지만 모자간의 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파주보다 조금 더 가까운 연주로 임지를 옮겨 주었다. 《新唐書 卷168 劉禹錫列傳》
[주-D007] 난수(灤水)가 침식한 변고 : 
무덤이 수재(水災)로 손상되는 것을 말한다. 난수는 중국 회하(淮河)의 지류인 과수(渦水)의 끝에 있는 강 이름이다. 주 문왕(周文王)의 아버지 왕계(王季)를 과수의 끝에 장사 지냈는데, 난수에 의해 그 무덤이 깎여 나가 관이 드러난 일이 있었다. 《呂氏春秋》
[주-D008] 공이 …… 감탄했다 :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으로 잡혀간 일을 말한다. 당시 이단상은 10세였는데, 어떤 연유로 청나라 군대에 잡혀갔는지는 모르겠다.
[주-D009] 갑오년 상소 하나 : 
앞서 인용한 1654년(효종5) 2월 18일에 올린 상소를 말한다.
[주-D010] 자유(子幼)가 …… 마찬가지이다 : 
자유는 한나라 양운(楊惲)의 자이다. 양운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인데, 외조가 지은 《사기》를 읽고 역사에 밝아 재능이 있는 인물로 알려졌다. 사마천이 죽은 뒤 《사기》를 세상에 전파했다.
[주-D011] 자태가 …… 비슷했고 : 
하안은 미남인 데다가 늘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다녀, 한때 유행이 되기도 했다. 흔히 하랑(何郞)이라 불렀다. 《世說新語 卷下之上 容止》
[주-D012] 정신은 …… 비슷했으며 : 
왕헌지는 성품이 허탄하고 고매(高邁)하여 예법(禮法)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卷80 王獻之列傳》
[주-D013] 풍류를 …… 비슷했고 : 
유담은 하충이 술을 마시는 태도가 항상 온화하고 공손하자, “차도(次道)와 술을 마시다 보면 집에 있는 술동이를 모두 기울이고 싶어진다.”라고 했던 ‘유담경양(劉惔傾釀)’의 고사가 전할 정도로 풍류와 손님을 즐겼다. 《晉書 卷77 何充列傳》 차도는 하층의 자이다.
[주-D014] 곧은 …… 비슷했다 :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豐) 2년(1079) 소식(蘇軾)이 귀양 갈 때 변론하다 연루되어 죄를 입었다. 《東坡全集 卷17 和王晉卿》
[주-D015] 관각 : 
홍문관과 예문관의 문한(文翰) 관서를 말한다.
[주-D016] 괴극 : 
삼괴 구극(三槐九棘)의 줄임말로, 곧 삼공 구경(三公九卿)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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