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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손길이 부드러운 양평

추읍산 2020. 10. 7. 13:37

출처 : blog.naver.com/car4972/222108752743 

 

태양의 손길이 부드러운 양평

김규순의 풍수이야기월간사람과산 2020년 10월호 ​두물머리 나루터 _오대산에서 이어진 한강기맥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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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순의 풍수이야기

월간사람과산 2020년 10월호

 

두물머리 나루터 _

오대산에서 이어진 한강기맥의 끝자락이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 두 개의 강물이 만나는 곳이라고 해서 두물머리이다. 양평군의 두물머리는 드넓은 한강과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소라서 친근한 풍광이다. 나루터 뒤 멀리보이는 강은 북한강이다. 나루터 우측의 수로도 북한강에서 흘러오는 물이다. 원래는 강이 아니었으나 팔당댐으로 저지대가 잠겨 강으로 변하였다.

 

글 사진 :: 김 규 순

 

양평군은 남한강과 북한강 사이의 한강지맥의 남쪽 지역이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내린천은 북쪽으로 흘러 소양강에 합류하고 춘천에서 북한강으로 흘러간다. 오대산 남쪽의 오대천은 동강에 합류한 뒤 영월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남한강과 북한강은 양평군의 두물머리에서 만난다. 한강기맥의 끝에 두물머리 나루터가 있다. 조선시대 말 1908년 양근군과 지평현을 합병하여 양평군이 되었다.

용문산과 유명산 능선 남쪽에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남한강

유명산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에서 본 양평의 진산 용문산

조선시대에는 조운이라고 해서 한강에 배를 띄워 사람이나 물건을 운송하는 시스템이 운행하고 있었다. 한강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생산된 특산물이나 농산물, 축산물 임산물 등이 한강을 통하여 한양에 공급되었다. 따라서 한강 주변의 나루터는 다른 지역보다 풍부한 물산을 확보하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임원경제지>에도 한강의 나루터를 중심으로 나룻배를 운영하거나 땔감이나 특산물을 유통시키므로써 얻는 이익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크다고 했다.

강맹경 묘의 전방 풍광 _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에 있는 조선개국공신 진주강씨 영의정 강맹경 묘. 양평은 사대부가 선호하는 지역이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구리, 남양주, 파주, 강남은 왕릉이 들어선 지역이므로 사대부들이 무덤을 조성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웠다. 만약 왕릉이 들어오면 이장을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양평군은 왕릉이 조성될 가능성이 적었으므로 사대부들의 무덤이 많이 조성되었다. 특히 사진 우측에 뾰족한 백운봉은 권력을 상징하므로 후손들이 대대로 관직에 중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강맹경의 희망대로 후손들이 높은 관직은 아니더라도 줄줄이 관직에 등용되고 있었다. 자연지형을 통하여 조상의 희망을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추읍산과 향리_

추읍산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의 마을 주산이다. 혹자는 추읍산이 임산부의 배와 같다고 해서 다산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금성(金星)노적봉의 노적봉이므로 재물이 풍수할 것으로 보기도 하고, 투구모양이므로 충신이 배출된다고 보기도 한다. 향리는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신안동김씨의 보금자리였다. 신안동김씨는 김상용김상헌 형제를 필두로 손자인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은 모두 정승이었다. 그러나 김창집김제겸(김창집의 장자)김성행_준행(김제겸의 장자_차자) 등 3대가 권력다툼에서 희생되어 사사되었다. 향리에는 김제겸의 4째 아들 김달행이 묻혔다. 김달행의 묘를 소점한 김원행은 풍수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신안동김씨 문중은 풍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풍수사가 아닌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불철주야 풍수실력을 갈고 닦았을 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그의 불굴의 의지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특히 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의 물산이 모두 모이는 곳이라 이 징역의 주민들은 풍족한 생활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교통이 편리해서인지 양수리에 구정승골이 있는데 정승의 무덤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구정승골에는 조선개국공신이면서 좌정승을 역임한 김사형(1333-1407), 6세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갑자사화로 사사되었으나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재기하여 영의정을 역임한 동고 이준경(1499-1572),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로 임진왜란 직후 대마도정벌론을 주장하였으며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이덕형(1561-1613) 등의 무덤이 있다. 개군면 향리에는 신안동김씨가 경종 때 신임사화로 김창집, 김제겸(김창집의 장자), 김성행_준행(김제겸의 장자_차자) 등 3대가 몰살당하여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다.

김달행의 묘_

사진 좌측 빨간 지붕과 하늘색 지붕의 집이 있는데, 하늘색 집이 신안동김씨 김달행의 후손들이 살았던 기와집이었다. 하늘색 가옥과 검은지붕건물 사이(사진의 중앙)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묘가 김달행의 무덤이다. 김원행이 동생 김달행의 묘를 여주시 대신면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단촐하고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풍수적인 지형을 갖춘 곳이다. 김달행의 손자 김조순이 정조에게서 총애를 받았고 후에 순조의 장인이 되어 가문의 옛 영화를 되찾았으니 김원행의 소망이 이루어진 곳이다. 물론 김원행의 증손자 김문근이 철종의 장인이 되었으니 (큰형 김성행의 종증손으로 입양되었지만), 김원행 또한 그의 풍수실력으로 천추의 한을 풀었다. 풍수란 비록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게 해주는 신비스런 작용이 있다.

이항로 생가터_

현재 노산사지(蘆山祠址)가 화서 이항로선생이 태어난 집터이다. 위 사진의 우측에 있는 능선 숲에 반쯤 가려진 기와집이 노산사이다. 노산사 뒤 언덕에 이항로 선생의 무덤이 있다. 이항로 선생이 죽자 유림들이 집터에 노산사를 조성하여 그의 위패를 모셨다. 노산사는 625동란 때 전소되었다.

화서 이항로 선생

이항로(1792-1868)는 양평군이 배출한 인물로 그의 생가가 서종면 노문리 벽계천 가에 있다. 그는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였으나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노론에 속해 있었다. 위정척사론은 조선말기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주장이다. 따라서 국제통상이나 개항을 반대하였으며 개화사상도 거부했다.

이항로선생 가옥 지형 _

주용맥이 지나가면서 벽계천으로 능선을 드리우니 우백호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백호능선의 방향 또한 이항로 선생 집 쪽을 향하고 있으니 등 따시고 배부른 복록이 넘치는 가옥지형이다. 그가 향리에 묻혀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학문은 수행기간이 20년이 걸렸다. 경제적 여건이 받쳐주지 않으면 학문의 경지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최익현, 유인석, 홍재학, 유중교, 김평묵 등이 있다. 위정척사론 운동은 성리학적 질서의 나라를 수호하자는 신념이 있

었기에 그의 문하였던 최익현(1833-1906)은 구국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킨 인물이며 왜양일체론을 근거로 항일의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저택은 좌측 능선에 의지한 산비탈에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늑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대광실의 기와집은 아니고 사랑채와 안채가 직사각형을 이룬 가옥이며 마당 또한 넓지 않다. 생가 동편에 있는 벽계강당은 이항로선생이 그린 설계도를 보고 지은 건축물이다.

이항로선생 가옥 _

이항로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집으로 많은 문인들이 가르침을 받았던 공간이다. 사랑채(양)와 안채(음)가 같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양의 공간과 음의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서 내외벽을 만들었다. 사랑채는 방문객이나 손님, 문인들을 만나 접대하는 공간이므로, 노인이나 여자와 어린이들의 사생활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장치로 내외벽을 쌓았다.

벽계구곡_

벽계구곡은 이항로 선생 생가가 있는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를 흐르는 계곡이다. 구곡(九曲)은 아홉 번의 물굽이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조선 사대부들이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자기가 은거한 장소임을 나타내기도 하고 각 구간마다 이름을 붙여 자기의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며 이를 문인집단이 공유하면서 구곡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 되었다. 하나의 개천이 문화적인 장소와 공간으로 인식된 것이 구곡이다. 그 예로 주희의 무이구곡을 비롯하여, 율곡선생의 고산구곡, 퇴계의 선유구곡과 퇴계구곡, 김수증의 곡운구곡, 송시역의 화양구곡, 정구의 무흘구곡 등등 전국에 수많은 구곡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성리학적 자연관을 반영하였기에 성리학이 퇴색하면서 구곡문화도 이어지지 못하였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한민족 사랑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생가는 양평군 신원역 뒤에 있었고 기념관을 만들면서 생가도 복원되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여운형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몽양 여운형 생가와 기념관_

몽양생가는 사각형의 서향집이었다. 사각형의 집은 대문을 어디로 내느냐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는 특징이 있다. 그 외에도 사각형의 집은 도둑이나 외부인들로부터 보안이 용이한 장점이 있으며, 들짐승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장치로도 유용하였으며, 사방의 바람도 막을 수 있었으므로 중부지역 사대부들이 선호하는 가옥형태였다. 기념관은 생가의 지하에 조성되어 있다.

그는 1900년 서울의 배재학당과 흥화학교 등에서 공부하였으며, 1912년 일본을 방문하여 신문물을 견학했고, 1914년 중국 난징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하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되었다. 소련의 레닌과 트로츠키중국의 쑨원과 교류하며 두 나라의 지원을 이끌어내려 하였으나 장개석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4년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손기정선수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1936년)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였으므로 미군정하에서 미군정과 긴밀히 협력하였으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한지근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생가는 신원리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산 능선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사색하기 안성맞춤의 공간이며 욕심이 없는 지형이다. 땅의 성향답게 그도 민족을 위해 한평생 애만 쓰다가 저격당했다.

[출처] 태양의 손길이 부드러운 양평|작성자 풍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