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 294

역사문화 답사기(충북, 경북)

안동김씨 역사문화 답사팀이 2019년 설립되고 세 번째의 답사가 1박 2일의 일정으로 6월 12일 금요일에 경의중앙선과 3호선의 옥수역 4번 출구에서 시작되었다. 15인여 함께한 탐방은 첫 번째가 학조대사 화상탑이다. 속리산 법주사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은 좁고 굽은 십 리 길에 이르러 짧은 여정상 미리 복천암에 부탁했단다. 두 번, 소형 승합차로 깊고 비탈진 계곡길을 돌아 복천암에 도착했고 탑이 있는 동산에서 회동했다. 세조조에 국사로서 활약했던 학조대사(燈谷: 1432-1514)와 스승이신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 -1480)의 부도탑이 나란히 서있어 설법하시려는 듯 중생 사랑은 끝이 없다. 비탈진 산길을 어떻게 옮겼을까? 안동김씨 현달(顯達)에는 학조대사가 있다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조카이신 서윤..

농암, 대사간을 사직하고 대사헌을 명받다.

관련 : https://www.youtube.com/watch?v=j3Imme1p3hY&list=PLEHM3-PlyNB5lFw4Dfe3kE3bCmyHV2V_X&index=3&t=1168s ○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1월 19일 무술 1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김창협·김우항·오도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창협(金昌協)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민진주(閔鎭周)를 수찬(修撰)으로, 오도일(吳道一)을 응교(應敎)로, 신계화(申啓華)를 승지(承旨)로, 이유(李濡)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전(前) 감사(監司) 윤계(尹堦)는 강화(江華)에 있을 때의 일 때문에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출처 : http:..

하옥 고택

출처 : https://m.blog.naver.com/drkdc/220934501284 지금의 하옥 고택 말이 하옥 고택이지 당사자는 살지 않았는데 왜? 그 이름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 일설(https://m.blog.naver.com/drkdc/220934501284)에 의하면 1865 년(고종 2)에 하옥의 아들 사영 김병기가 지었다고 한다. 』 99칸 전통 한옥이었고 필자도 1964년경 그곳을 찾은 바 있는데 압도당하는듯했다. 현재는 솟을대문, 담장, 행랑채가 없어지고 안채와 별채 42칸만이 남았고 또한, 마을 입구 쪽 연못도 그 범주 안에 있었다고 한다 1865년 그렇다면, 하옥 운명(殞命) 4년 전이고 흥선 대원군의 힘이 막강할 때다. 하옥(諱 左根 1797 -1869)은 아마도 아들 사영[..

묘표(墓表)

○ 8대조 20世 諱 達行[1706(숙종 32) - 1738(영조 14)] 소재지 : 양평군 개군면 향리 128 -3건립시기 : 1822년 규모 : 총높이 210cm . 비신높이 : 127cm . 너비 : 51cm . 두께 23cm 撰 . 書 김조순[撰] . 大字 : 集 蘇軾 .小字 : 集 韓濩발췌 : 鄕脈 28輯 . 양평문화대관 속집 - 2018, 12, 28 양평문화원 발행 - 楓皐集卷之十二 / 墓表 王考贈左贊成府君墓表 府君諱達行。字脩甫。我金出安東。高麗太師諱宣平之後。我朝有諱尙憲。左議政文正公。是嘗斥和拘瀋獄。天下誦其義。而東國學士大夫尊之曰。淸陰先生。於府君爲五世祖。曾祖領議政文忠公諱壽恒。被己巳士禍。是曰。文谷先生。祖領議政忠獻公諱昌集。是曰。夢窩先生。考諱濟謙。右副承旨贈左贊成。號竹醉。妣贈貞敬夫人恩津宋氏。文正公同春先生..

원적산 동록(東麓)의 영원사(영원암)는 가문의 원찰이다

이천시 원적산 동록(東麓)에 있는 영원사 홈페이지(http://www.yeongwonsa.com/ )에서 ● 조선 순조왕 25년(1825) 안암석치감선사가 김조순의 대시주의 도움으로 5창하였다. ● 조선 철종왕 5년(1854년)에 전승통신사가 순원왕후의 명으로 안동김씨의 원찰이 되어 6창이 이루어졌다. 안동김씨 원찰이..

영원암절(영원사) 스님을 생각합니다.

이천시 백사면 송말리에는 영원사(영원암)가 있다. 무구정탑원기는 대웅전 기단에서 출토되었다. 나, 어렸을 적 초등학교 다닐 적이다. 피란에서 고향으로 복귀한 때가 1953년 봄, 휴전 전이다.개군 초등학교 3학년이고 기억으로는 그때부터(그 이전부터 일 것이나 전쟁의 와중이고 유년기 때임을 유의한다.) 1960년대 말까지 세밑이면 찾아오는 스님이 있었다. 이천의 영원암(옛날 이름으로 지금은 영원사)의 스님이라고 들었다. 조상님 내력과 관련 있는 절이고 그 정도로만 알았다. 삶이 그 옛날이 아니니 목탁소리 울리고 어머님께서 쌀 한 됫박 시주하신다. 방에는 아니 들어오시고 사랑 쪽 마루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시는 스님 매년 어김없었다. 6, 25의 상처는 아물지도 않았고 가난을 비켜갈 수 없음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