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덕리 6

발길 돌려 <앙덕 별장>을 찾아가다

김익진(金翼鎭 1884 -1943) 전방앙덕고장병서 (轉訪仰德故庄幷序) 발길 돌려 을 찾아가다 서문을 아울러 붙이다. --------------------- 庄在江上而今屬 閔丙奭 而空虛頹落不勝悵惆 庄邊有藥泉 令人飮之而病具愈 장재강상이금속민병석 이공허퇴락부승창추 장변유약천 영인음지이병구유 ✶ 별장은 강 위에 있었고, 지금은 민병석[閔丙奭 ]이 차지하였는데, 빈터로 쇠퇴하여 무너져 있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별장 주변에는 약수가 나오는 샘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마시면 병이 다 나았다. --------------------- 步步風光轉入佳 山來不盡水無涯 滾滾江聲盈左耳 深深雲氣濕雙鞋 보보풍광전입가 산래불진수무애 곤곤강성영좌이 심심운기습쌍혜 걸음마다 풍광이 나갈수록 아름다워 산에 오니 끝이 없고 물 또한 끝없..

高祖 김병주(諱 炳㴤)의 연시(延諡) 기록

이윤재 양평역사문화 연구회장으로부터 오늘 받은 고조할아버지 김병주(諱 炳㴤 1827 - 1887) 관련 승정원일기다. 할아버지께서는 1887년(고종 24) 6월 12일 여강(驪江 남한강의 여주 경계 안의 강) 가인 개군산면 앙덕리에서 생을 마감하셨는데 그로부터 1년여 후 1888년 11월 7일 고종실록에서는 이조판서 김병주(金炳㴤)에게 효문(孝文)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하였다. 연시(延諡)는 무엇을 말하는가? 앙덕리 별서에서 高宗의 어명을 받드는 의식인 연시례(延諡禮)가 궁금하다. 국가에 공을 세운 분이 별세후 받는 행사로 누가? 내려왔을까. 가문의 영광으로 증조(諱 定圭1862~1903)께서 사은숙배하고 받았을 것이고 이때 문중과 지역민, 유림, 관원들은 얼마나 참석했을까? 숙연(肅然)했을 그때로 명예..

개군면에서 고쳐야할 이모저모

맥결 이윤재 ・ 2020. 11. 25. 22:08 양평군 개군면, 역사 문화 컨텐츠 바로잡기 「양평역사문화연구회를 6년간 이끌어 오면서 관내 문화재, 유적, 역사적 인물의 평가나 묘지 탐방 등은 어느 정도 마무리했고, 개군면도 예외는 아니라고 여겼건만 올 가을 세바퀴 평생학습마을에서 주관한 ‘개군면 역사문화해설사 양성과정’ 강의를 일부 맡아 진행하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개군면은 1963년 이전까지 여주시 소속이였다는 이유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지 못해 역사연구의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 역사와 문화를 거론하기 전에 우선 개군면의 지명부터 흥미를 끈다. 임진란 이전까지 개군에서 이름 있는 산은 추읍산과 파사산이었고, 동리 이름은 釡洞(부동), 香洞(향동), 祭田(계전..

옛 터전에 서서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에는 5대조 황산(휘 유근 1785-1840)께서 마련하신 별서가 있었다. 추리컨대 붉은 선 안(앙덕길 69번길 5)으로 크게 틀리지 않을것이다. 어머님께서는 고조(휘 병주 1827-1887)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금도 주춧돌, 뜰돌, 담벽 등 일부 남아있어 그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심순택이 지은 高祖 할아버비(김병주)의 가장, 시장에서도 만년여강지앙덕촌거(晩年驪江之仰德村居) 라고 하였다. 앙덕리(仰德里) 백 년 家風 찬란한데 보루 황폐하여 머무르셨던 곳 맞나? 향곡(향리)을 기초하고 물가이고 열려있어 하늘과 맛 닿았다오 흔적만이 남은 터전 유서 깊은 고택은? 사다리 타고 올라 찾아올 수 있을까? 물길 따라 굽이굽이 새벽안개 헤치며 산봉우리는 솟았고 겹겹산성 끝없는데 물, 산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