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4) 영안부원군 김조순

추읍산 2009. 6. 13. 22:40

 

 

김조순(金祖淳)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6대손으로서 제가 보는 할아버지는 이렇습니다. 한 마디로 김조순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부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낱말이 할아버지 본래의 모습까지 흐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열린 마음은 천주교(天主敎)에 유연(柔軟)하였으며 서얼소통에 앞장섰고 검소하고 너그러웠으며 많은 어려운 사람에게 가진 것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현대의 모든 정직한 역사적 기록은 정조대왕 유탁에 의해 순조대왕을 훌륭하게 보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김조순에 대한 기록을 옮겨보겠습니다.

 

김조순[1765(영조 41)∼1832(순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달행(達行)이고, 아버지는 부사 이중(履中)이며, 어머니는 신사적(申思迪)의 딸이다.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 1명을 두어 그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해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자는 의견을 건의, 실시하였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待敎) 때 당시 시·벽파(時僻派)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檢校)·직각(直閣)을 거쳐 1800년 보덕(輔德)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副提學)·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있을 때 수효가 적은 친위병을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 지방 목욕 행차를 호종했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민간 실정을 은밀하게 보고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인사(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 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그렇습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기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부정적인 시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 잘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순조대왕을 잘 보필 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순조 임금님의 운신(運身)의 폭을 좁혀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할아버지의 기초였음은 분명합니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세도정치의 폐단(弊端)이 나타나는 것은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1849~ 1863년, 철종 대왕 시기)입니다. 이를 1832년에 별세하신 할아버지께서 전혀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이 부정적인 의미의 낱말이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은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6) 인터넷 검색창에 한국 명문> 문중평론방> no: 157> 8강 결산 1, 3대 세도정치 가문 구조분석 안동김씨 편에서는 영안 부원군 김조순과 세도정치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쓰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myunggakorea.com

 

 

1832년(순조 32년) 4월 3일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별세하시고 장자(長子)인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 1840, 종 백부인 김용순(金龍淳)에게 입후되다. 필자의 5代祖]이 안동김씨의 대표가 됩니다.

황산 김유근은한때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시기도 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더 사랑하신 분입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 1859), 동리 김경연, 문암 유본학, 초의선사 그리고 선배이신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 1845)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하였는데 이분들은 19세기 문화계에 한 축을 이루었던 분 들입니다. 1837년 병을 얻어 이후 은퇴하신 할아버지께선 실어증과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병 속에서 밖에서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몰아치기 시작하는 그 시기 1839년 5월 추사 김정희를 통해 알게 된 유진길(劉進吉 1791~ 1839)에게 세례( 代洗: 사제를 대신하여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를 받고 그리스도교(天主敎)에 입교하시고 7) 박도원, 순교자의 나라 3권 pp 206~207, 4권 p220

1840년(헌종 6년) 12월 17일 운명 하십니다. 8일 후인 12월 25일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세칭 안동김씨 1차 세도정치는 끝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