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한국명문
안동김씨 "6창"의 곳간
앞에서 말했듯이 "6창"은 몽와 김창집,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노가제 김창업, 포음 김창집, 택재 김창립을 말한다. "6창"은 안동김씨 금관자 서말의 곳간이다. "6창의 제1곳간은 김창집 집이다. 몽와의 곳간에서는 왕비 3명, 영의정 4명, 좌의정 3명, 판서 13명이 나왔다
"6창"의 제2곳간으로 가보자. 제2곳간은 김창협 집이다. 농암 김창협은 168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사사된 후 영평에 은거하다가 갑술옥사로 호조참의에 임명되고 대제학, 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유학의 대가로 시문에 능했다. 아버지 김수항이 대제학을 지내고 아들이 또다시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니 부자 대제학의 영광을 안았다. 아버지 김수항이 영의정을 지내고 아들 김창집이 영의정을 지내 형 김창집이 부자 영의정의 영광을 드러내더니 그 형에 그 동생 보란 듯이 부자 대제학의 영광을 보탰다. 돌이켜 보건대 이것은 부자만에 한한 일이 아니다. 김수항의 조부 김상헌이 좌의정에 대제학이었으니 한 대 빠진 3대 상신에 3대 대제학이 난 셈이다. "6창'의 제2곳간 수장 농암은 안동김씨의 주가를 상종가에 올려났다.
제1곳간은 수장이 영의정이라재상이 쏟아졌는데. 제2곳간은 수장이 대제학이라 4대가 글이 쏟아졌다. 김창협, 그 아들 김숭겸, 그 손자 김원행, 그 증손자 김이안, 그 현손 김봉순 모두가 선비이다. 이 중에서도 농암 김창협은 제일 빼어나 조선조 중기를 휘둘렀다. 그 할아버지의 뒤를 미호 김원행이 바짝 추격했다. 벼슬은 공조참의 일개 당상관에 불과했으나 학문과 명예는 재상급을 넘는다. 아버지 미호[김원행]에게 뒤질새라 삼산재 김이안도 증조부 농암[김창협]을 추격했다. 이 농암, 미호, 삼산재의 시문 경쟁은 조선 선비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글이 있는 곳에 벼슬이 나기 마련이다. 미호 증손 김수근이 문과하여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 김수근의 아들이 빼어났다. 두 아들이 모두 영의정에 올랐다. 맏은 김병학이고, 둘째 아들은 김병국이다. 김병학은 백부 집으로 입양되었다. 김병학은 대제학도 지냈다. 삼산재 증손 김병운이 이조판서를 지냈다. 제2곳간은 글이 줄줄 흐르다가 벼슬로 휘나레를 장식했다.
"6창"의 제3곳간으로 가보자. 제3곳간은 김창흡 집이다. 삼연 김창흡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 김창협과 함께 조선조 중기 학계를 크게 울렸다. 삼연 현손에 우의정이 났다. 그 우의정은 김달순이다. 현손에 제3곳간 수장 삼연을 위협하는 문장가가 나왔다. 대산 김매순이다. 대산은 홍석주와 함께 당대 으뜸가는 문장가로 여한 10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고손 김선근은 공조판서를 지냈다.
"6창"의 제4곳간으로 가보자. 김창업 집이다. 노가제 김창업은 형 김창협, 김창흡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노가제 집도 수장 노가제를 닮아 글 읽는 소리가 높았다. 그 소리 또한 끊이지를 않았다. 노가제의 세 아들이 모두 선비이고. 막네 아들은 유명한 화가 김윤겸이다. 진재 김윤겸은 시,서,화 삼절로 명성이 컸다. 진경산수 제작에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는 평을 듣는다. 노가제 김창업의 세 아들 중에 김신겸이 학문이 뛰어나서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이 김신겸의 집에 글이 쏟아졌다. 아들 김양행, 손자 김이구, 증손 김직순 김청순, 현손 김인근 모두 글을 잘 했다. 지암 김양행은 벼슬도 형조참판이고, 글도 조야에 명성이 높았다. 김직순 김인근 부자도 경술로 천거되어 경연관을 지냈다. 김신겸의 형 김언겸의 집도 글이 만만치 않다. 김제행, 김성순, 김보근 모두 선비이다. 글이 있는 곳에 벼슬이 없을 리 없다. 맏집 김우겸 집에 판서가 났다. 김우겸의 손자 김이익이 문과하여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리고 둘째 김언겸 집에 농상공대신 김명규가 났다.
"6창"의 제5곳간으로 가보자. 김창집 집이다. 포음 김창집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가 되었다. 성리학에 밝고 문장가로 이름이 났다. 포음의 아들 효효재 김용겸은 역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두 차례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748년 감역이 되고 1778년 우승지, 1784년 동돈녕을 거쳐 1785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학행과 덕망으로 명망이 높았다. 포음과 효효재 부자가 명성을 떨친 이후 후손들의 활동이 잠잠했다. 현대에 와서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나왔다.
"6창"의 제6곳간으로 가보자. 김창립 집이다. 택재 김창립은 시문에 뛰어났다. 약관에 글솜씨가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17세에 세상을 떠나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유고가 있다. 현손 김학순은 1805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와 이조 의 판서를 지냈다. 화서 김학순의 아들 김연근이 공조참판을 지냈고 김연근의 아들 김병주가 공주와 결혼 하여 창녕위에 올랐다. 부마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이 1860년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를 지내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5적신의 처형을 주장하였으며 한일합방 후 음독자결했다. 1962년 건국공로 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오천 김석진의 아들 김영한이 비서원승을 지냈으며 학행이 있었다. 이 김영한의 아들 김윤동이 또한 학행이 있었다. 김윤동의 동생 김순동이 오늘의 충남대 학장과 성균관 관장을 지냈다. 김순동의 동생 김춘동이 고려대 교수,김춘동의 아들 김동현이 아주대 교수를 각각 지냈다. 김윤동의 둘째 아들이 김충현으로 오늘날 서예 대가가 되었다. 충현의 동생 창현이 창문고 교장을 지냈고 창현의 동생 응현이 역시 서예 대가가 되었다. 김창현과 김응현은 오늘날 서예계의 명성이 지난날 그 선조들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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