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황산과 그 문우들

[스크랩] 김 황산 유근 에게 주다[與金黃山 逌根][1]

추읍산 2009. 8. 5. 13:05
김 황산 유근 에게 주다[與金黃山 逌根][1]

엎드려 안후(安候)를 받드니 계속 흐뭇하외다. 하문하신 금석(金石)은 삼가 살펴본 바 열두 종의 한비(漢碑)는 바로 통행본(通行本)이어서 상고하기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만 한칙비(韓勅碑) 같은 것은 음(陰)이 있고 측(側)이 있어 가장 상량(商量)하기 어려우니, 실로 졸지에 대답해 올릴 수는 없으니 천천히 계획하는 것이 좋겠으며, 봄철에 표구를 하게 되면 좀이 타기 쉬우니 절대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척하(戚下)는 서쪽의 여행 역시 오래지 않을 것이니, 긴 여름 장마철에 하나하나 자세히 연구하여 길이 금석의 좋음을 도모하면 더욱 묘할 것 같은데 어떨는지요?
온천명(溫泉銘)은 위(魏) 나라 효문(孝文)·선무(宣武) 연간 일로서 원장(元萇)은 이미 정사(正史)에 나타나 있습니다. 위비(魏碑)는 금석가(金石家)의 드문 보배로서 자체가 기굴(奇崛)하여 이미 구양 신본(歐陽信本)의 일파를 열어 놓았으며, 위(魏) 자(字)에 산(山)을 붙인[巍] 것은 대개 옛사람이 전법(篆法)에 있어 몹시 엄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졸부(拙賦)는 바로 주염계(周濂溪)의 글이며, 상자확(向子廓)의 분서태극도(分書太極圖)는 이미 주자(朱子)의 수제(手題)가 있으니 의심할 것이 없고, 구루비(岣嶁碑)는 후인의 안작(贋作)이어서 금석가가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혹 따로 한 첩을 만들어서 그 면목을 보존한다면 모르지만 절대로 옥퇴(玉敦) 주이(珠彝)의 사이에 함께 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게 있는 한비(漢碑)도 귀주(貴廚)의 소장보다 더하지 못하오며 그나마 전혀 장황(裝䌙)을 못한 채 그대로 두어서 지금은 내 손에서 떠나갈 수 없으니 그 베고 찢고 한 곳을 실로 다른 사람으로는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외다. 사세가 이러하여 못 보내 드리니 민망하오며, 더위가 밀어 닥쳐서 대강만 적어 올립니다.

[주D-001]한칙비(韓勅碑) : 노(魯) 나라 재상 한칙이 만든 공묘(孔廟)의 예기비(禮記碑)를 말한다.
[주D-002]온천명(溫泉銘) : 북위(北魏) 옹주자사(雝州刺史) 송자공(松滋公) 원장(元萇)이 쓴 것으로서 고염무(顧炎武)는 고증하여 연창(延昌) 연간의 것으로 삼았음. 석(石)은 섬서(陝西) 임동(臨潼)에 있으며 속칭은 파리비(玻璃碑)라 함. 정서(正書)로 21항이며 각 항이 30자로 되었고, 액(額)은 전서(篆書) 양문(陽文)임. 원장은 척발고(拓跋孤)의 6세손인데 효문(孝文) 시대에 회삭진(懷朔鎭) 도대장(都大將)에 임명되고 선무(宣武) 시대에 벼슬이 옹주자사에 이르렀음.
[주D-003]구양 신본(歐陽信本) : 당 나라 서가(書家)의 사대가(四大家)인 구양순(歐陽詢)은 임상인(臨湘人)인데 수(隋)에 벼슬하여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으며,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이르고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선서(善書)하여 처음에는 왕희지를 모방했는데 험경(險勁)은 호히려 왕희지를 능가하였다. 그 체를 이름하여 솔경체라 하였으며, 그의 아들 통(通)도 선서하여 소구양(小歐陽)이라 함.
[주D-004]구루비(岣嶁碑) : 하우(夏禹)가 치수(治水)할 때 쓴 것인데 가장 오래된 석각(石刻)으로서 우비(禹碑)라고도 불린다. 형산현(衡山縣)의 운밀봉(雲密峰)에 있으며 보존된 것이 77자인데, 근대 사람들은 명(明) 나라 양신(楊愼)의 위조라고 의심하기도 함. 구루(岣嶁)는 형산(衡山)의 별칭임.
[주D-005]옥퇴(玉敦) 주이(珠彝) : 퇴(敦)는 《예기(禮記)》명당위(明堂位)에 의하면 서직(黍稷)을 담는 그릇이라 하였고, 이(彝)는 술그릇인데, 종묘(宗廟)의 상기(常器)를 모두 이(彝)라 함. 옥(玉)과 주(珠)를 붙인 것은 수식하기 위한 말임.
[주D-006]귀주(貴廚) : 주(廚)는 실(室)의 뜻으로 상대방의 장서실(藏書室)을 말함.
출처 : ▒ 한 산 草 堂 ▒
글쓴이 : 천하한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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