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편지

김용순(金龍淳)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10

추읍산 2009. 12. 14. 18:56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 소장.     도록, p64

 

 

47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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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록 p300

10. 김용순(金龍淳)이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 10        

(1821.2.7)


日刊侍狀如何 爲念不己 吾盡送內行 獨坐公衙 歸心倍極 若不可堪 此中又出殺

일간시장여하 위념불기 오진송내행 독좌공아 귀심배극 약불가감 차중우출살


獄 兩日驅馳於七十里之間 遍身疲憊 是何苦狀 奈何奈何 新兒至黃州 患痘不可

옥 양일구치어칠십리지간 편신피비 시하고장 내하내하 신아지황주 환두불가


不留置 鶴堂使愼汝守之 內行則前進 初四則似當優入去矣 到今形勢 三分五落

불유치 학당사신여수지 내행칙전진 초사칙사당우입거의 도금형세 삼분오락


不可成說 將於送服後 加留長 吾卽會同於黃旅 仍爲率去計 還家料不出此月內

불가성설 장어송복후 가유장 오즉회동어황려 잉위솔거계 환가료불출차월내


耳 方修文案 傍無一人  沓沓不可言 不具 成衙書付去 必爲討答以送也

이 방수문안 방무일인  답답불가언 불구 성아서부거 필위토답이송야


辛巳二月初七日夜 父

신사이월초칠일야 부



요사이 어른 모시고 어떻게 지내느냐?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내행(內行)을 모두 떠나보내고 텅빈 관아에 홀로 앉아 있으니 견디기 힘들구나. 이곳은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칠십 리 사이에서 이러지리 뛰어다니느라 온 몸이 피로하다. 이 얼마나 힘든 모습이냐만 어찌하겠느냐? 새로 태어난 아이는 황주(黃州)에 이르렀는데, 천연두를 앓아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어머니께서 신여(愼汝)를 시켜 지키게 했다. 내행은 계속 나아가 4일에는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지금 서로 뿔뿔이 흩어져 지내니 말이 되지 않는다. 장차 보고서를 보낸 후 더 머무르다가 황주 여관에서 만나 데리고 갈 계획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계산해보니 이달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방금 문서 작성을 끝냈는데 곁에 한 사람도 없어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만 줄인다. 성천 관아에 보내는 편지도 함께 부치니 반드시 답장을 받아 보내라.


1821년 2월 7일 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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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저의 6대조인 김용순이 아들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는 이를 끝으로 마칩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김조순의 장자인 김유근이 대를 이었음은 밝힌 바  있습니다. 공의 나이 24세 때인 1777년(정조 1)에 생원 진사시에서 식년시(式年試) 2등(참고 :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사마방목(司馬榜目>>) 으로 관직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 줄곧 외직(外職)으로 근무하신 것 같습니다. 이는 4촌 동생인 영안 부원군 김조순이 1785년(정조 9), 급제하여 출사한 것보다 8년이 빠릅니다. 이후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는 집에 기록이 없어 모르겠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때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고 67세로 연로하심에도 황주 목사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셨으며 정경(正卿, 정 1, 종 1, 정 2품)을 하실 학덕과 식견이 있었음에도 최고 직책이 실권 없는 공조참의(비석에 工曹參議라고 쓰여 있습니다. 1821년 귀경 후 받은 직책?) 밖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세칭,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 속에 김조순의 순조 대왕 보필시기(1804~1832)의 저희 가문의 모습입니다. 위의 마지막 편지를 보내시고 곧 명에 의해 이임하여 귀경하셨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2년여 1823년(순조 23) 4월 14일 운명하십니다. 할머니 풍산홍씨는 이로부터 9년을 더 사시고 1832년(순조 32) 8월 27일 돌아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