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김병주의 친형님이신 김병계[金炳溎] 할아버지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
炳始 |
炳溎 |
炳冀 |
炳地 |
炳㴤 |
25세 |
宗圭 |
容圭 |
性圭 |
用圭 |
錫圭 |
定圭 |
족보상의 김병계(金炳溎)
字範一
純祖甲申六月二十四日生戊申文科歷翰苑右承旨乙卯正月二十五日卒
○配淑夫人延安李氏丙戌生戊戌九月十日卒父蔭承旨忠翼祖蔭令興愚曾祖光秀外祖判書金箕殷本光山
○墓先兆次卯坐合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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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계[金炳溎] 참고: 물이름계를 물창일할연의 연으로 잘못 표기하여 바로 잡는다.
왕/년도 : 헌종(憲宗) 14년
과거시험연도 : 1848 무신
시험명 : 증광시(增廣試)
등위 : 을과4(乙科4)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병계(金炳溎)
자 : 범일(範一)
본관(本貫) :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 경(京)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 김홍근(金弘根)
조부(祖父) : 김명순(金明淳)
증조부(曾祖父) : 김이경(金履慶)
외조부(外祖父) : 윤치익(尹致翼)
한국학 홈 > 역사와 인물 > 조선의 방목 > 김병계(김병연으로 잘못 적고 있다.)
출처 :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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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철종실록에 실린 김병계(金炳溎)의 짧은 출사기록이다.
1849(철종 즉위년), 11, 27
한림 소시(翰林召試)82) 를 행하여 조병학(趙秉學)·성재원(成載瑗)·정건조(鄭健朝)·김병계(金炳溎)을 뽑았다.
1849, 12, 21
관록(館錄)을 행하였는데, 이경부(李敬溥)·김중하(金重夏)·권응기(權應夔)·이종순(李鍾淳)·조헌섭(趙憲燮)·김병계(金炳溎)·정헌교(鄭獻敎)·남종순(南鍾順)·임응준(任應準)·김영수(金永秀)·홍우길(洪祐吉)·임건수(林謇洙)·강연(姜鍊)·이계선(李啓善)·이종우(李鍾愚)·홍종서(洪鍾序)·윤정구(尹正求)·윤병정(尹秉鼎)·김진형(金鎭衡)·성재구(成載球)·최우형(崔遇亨)·조석원(曹錫元)이다.
1851(철종 2) 12, 26
도당록(都堂錄)303) 을 행하여, 이경부(李敬溥)·김중하(金重夏)·권응기(權應夔)·이종순(李鍾淳)·조헌섭(趙憲燮)·김병계(金炳溎)·정헌교(鄭獻敎)·남종순(南鍾順)·임응준(任應準)·김영수(金永秀)·홍우길(洪祐吉)·임건수(林謇洙)·강연(姜鍊)·이계선(李啓善)·이종우(李鍾愚)·홍종서(洪鍾序)·조석원(曹錫元)·최우형(崔遇亨)·성재구(成載球)·김진형(金鎭衡)·윤병정(尹秉鼎)·윤정구(尹正求)를 뽑았다
1852(철종 3), 3, 13
수릉(綏陵)에 친히 제사하였을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고, 집례(執禮)인 부사과(副司果) 김보현(金輔鉉), 집준(執尊)인 교리(校理) 이정신(李鼎信), 대축(大祝)인 부사과(副司果) 김병계(金炳溎)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853(철종 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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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계(諱 炳溎 1824~1855)는 저의 고조 김병주(諱 炳㴤 춘산 김홍근의 둘 째 아들로 좌찬성 김달행 종가댁의 대를 잇기위해 종백부인 김유근에게 입후하였다.)의 생가(生家) 형님이시다. 운명하실 때가 1855년으로 3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이때로 추정되는 순원왕후가 재종동생인 김흥근(諱 興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아래와 같이 슬픔마음을 담고있다.
안악[김병계의 근무처인 황해도 안악으로 추정]의 상변喪變은 천만 뜻밖이니 오죽 참담하고 슬프실까 할 말이 없아옵고, 놀라고, 그 사람됨이 아깝고 불쌍하니 어찌된 일인지 지금 거짓말 같아서 괴이 합니다. 평상시 병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술 마시는 것이 과하다고 하되 저 지경이 될줄은 몰랐습니다. 밥은 변변히 먹지 아니하고 그리 지냈으니, 스스로 알고 저지른 일이니 절통하고 애달픕니다. 데리고 간 책객(冊客: 고을 원의 비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 관제官制에는 없는데 사사로이 임용하였다. '책방冊房'이라고도 하였다.)이 젊은 사람이라 하니 큰일을 당하여서 초종初終을 어찌 지냈는지, 형님[김병계의 어머니]의 모습도 다 차마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직각[김병계의 동생 김병주]도 어찌 갔는지 불쌍하여 잊지 못하겠습니다. 응당 올라오셔서 바로 묘하로 가겠으니 짐작에 ##[해독불가] 어느 날이나 오겠습니까? 길에서 흉보를 들으시고 놀라고 참담하고 비통하실 것이니, 기력도 손상하여 계실 것이니 염려가 놓이지 못하며, 다행히 (죽은 이에게) 어린 아들이 있는 것이 그것이라도 다행하더이다.
출처: 순원왕후의 한글편지(역주 이승희, 2010, 12, 1 도서출판 푸른역사 발행).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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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고조할아버지(金炳㴤)의 친형님(金炳溎)에 대하여 궁금증이 컸었다. 탐구력 부족으로 오늘에 이르렀는데 다행히 순원왕후의 한글편지가 최근 출간되어 그간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 단편적이나마 밝혀져 위와 같이 글을 쓰고 구전(口傳)을 더하기로 하였다. 족보를 보면 김홍근(金弘根)은 2남(김병계, 김병주) 3녀를 두고 있었다. 당시 찬성공 달행(贊成公 達行)의 종손이신 김유근의 대를 金弘根의 2남인 김병주가 입적하여 종가의 대를 이었는데 그때의 모습을 어머님은 이렇게 전한다.
그때[여러 정황을 보면 황산 할아버지께서 1840, 12, 17 돌아가시기 전 몇 달 전으로 생각한다.] 저의 고조(김병주)의 생모이신 해평윤씨는 둘째 아들 김병주가 황산 김유근 앞으로 입적됨을 극력 반대하여 일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크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종가에 대통을 이어야 함은 시대적 소명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어명(御命 헌종)에 의해 양자절차가 이루어졌다는데 이를 전교(傳敎)?를 물어 시행하였다고 들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시고 식음을 전폐하셨던 할머니! 소금까지 뿌리셨다고요? 그러나 대를 이으셨고 이렇게 글 쓰고 있는 저희가 있잖아요. 멀리 그러나 가 뵐 수도 없는 곳에 계시지만, 저희는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두 가문의 우의가 돈독해지도록 마음속에 담겠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적 김기동 형님이 향리 선영에 오셨다. 바로 저의 8대조의 셋째 아들 김이경의 종손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일가 형님으로만 생각하였다. 기동 형님이 여기에서 적는 김병계의 현손(玄孫)이신데 저의 7대조 김이기(諱 履基)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올 때 묘하인 골밭에서 아버지로부터 소개받고 인사드린 기억이 있다. 기동 형님의 분산(墳山)은 인천시 계양구 계양중학교 뒷산으로 1957, 윤 8, 5 돌아가시고 지금은 아들 무현(武顯)씨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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