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105
4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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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p328~329
51. 김정균(金定均)이 김병주(金炳㴤)에게 보낸 편지 3
(1883. 2.17)
安洞從叔母主 昨日酉時棄世 一門慟廓 何以盡達 漏罷後 卽爲小斂 而從叔主諸
안동종숙모주 작일유시기세 일문통곽 하이진달 루파후 즉위소렴 이종숙주제
卽 無至受損 待敎過哀 見甚悶沓 伏末審日來氣體候更若何 大小渾度均穏 伏慕
즉 무지수손 대교과애 견심민답 복말심일래기체후갱약하 대소혼도균은 복모
區區 無任下成 子昨日申後往安洞 今纔歸來 而夜蒙承旨恩點 萬萬感祝 而旣通
구구 무임하성 자작일신후왕안동 금재귀래 이야몽승지은점 만만감축 이기통
喪家 則勢不得出仕 黙以服制耳 貴童悤悤下送 而潤錫之子 昨告下去 故書封出
상가 칙세불득출사 묵이복제이 귀동총총하송 이윤석지자 작고하거 고서봉출
付矣 滯雨未發 今玆同呈耳 承洞叔主 似當今明間還往耳 餘不備白
부의 체우미발 금자동정이 승동숙주 사당금명간환왕이 여불비백
癸未二月十七日 子 定均上書
계미이월십칠일 자 정균상서
안동(安洞) 종숙모 님께서 어제 유시(酉時)에 돌아가셨습니다. 일문(一門)의 슬픔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파루(罷漏) 후에 즉시 소렴(小斂)하였습니다. 종숙부께선 별 탈은 없으시지만 대교(待敎)27)가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을 보니 매우 슬픕니다. 요즈음 안부는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평안한지 견딜 수 없이 그립습니다. 저는 어제 신시(申時) 후에 안동(安洞)으로 갔다가 이제 돌아왔습니다. 밤에 임금의 은혜로 승지(承旨)로 낙점 받았습니다. 매우 감축할 만한 일이나 이미 상가(喪家)임을 통지했으니 형편상 출사(出仕)할 수는 없고 묵묵히 상복을 입을 따름입니다. 귀동(貴童) 을 바삐 내려 보냅니다. 윤석(潤錫)의 아들은 어제 내려간다고 고해서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런데 비 때문에 출발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함께 보냅니다. 승동(承洞) 숙부님은 오늘 내일 사이에 돌아갈 듯 합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1883년 2월 17일 아들 정균(定均)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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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교(待敎): 예문관(藝文館)의 정7품에서 정9품 사이에서 선발한 규장각(奎章閣)의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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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20세 金達行
21세 |
履慶 |
履中 |
履基 | |||
22세 |
明淳 生父 履基 |
祖淳 |
龍淳 | |||
23세 |
興根 |
應根 |
弘根 |
左根 |
元根 |
逌根 生父 祖淳 |
24세 |
炳德 1825~1892 |
炳始 1832~1898 |
炳溎 1824~1855 |
炳冀 1818~1875
|
炳地 1830~ 1888 |
炳㴤 1827~1887 生父 弘根 |
25세 |
宗圭 1862~1922 |
容圭 1864~1902 |
性圭 1846~1896 |
用圭 1867~1927 |
錫圭 1864~1905 |
定圭 1862~1903 |
그러면 승동(承洞 인사동과 종로2가에 걸쳐 있는 마을) 숙부님을 누구일까. 위 표에서 김정규(金定圭, 舊名 金定均)의 부친인 김병주(金炳㴤)의 생가의 친형님 김병계(金炳溎)는 1855년 32세로 운명하였고 김정규의 종숙으로 김병시(金炳始), 김병덕(金炳德)이 있다. 김병덕의 집은 안동임이 밝혀졌고 그렇다면 승동은 김병시의 집일 것일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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