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陵看審之 行入豊德 祇謁厚陵 恭賦一律 并序
산릉간심지 행입풍덕 기알후릉 공부일률 병서
산릉(山陵)을 자세히 살펴본 뒤에 풍덕(豐德)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후릉(厚陵)185)을 배알하고 삼가 율시 한 수를 짓다 -서문과 함께
김유근(金逌根 1785~1840)
謹按太祖開國之際 定宗以宗子承大統 念太宗功業 授以神器紫茅宮 視千
근안태조개국지제 정종이종자승대통 념태종공업 수이신기자모궁 시천
乘如浮雲 自古稱讓國者 ?以伯夷泰伯爲言 而二人者皆逃之他國 身不在焉
승여부운 자고칭양국자 ?이백이태백위언 이이인자개도지타국 신불재언
惟我定考 則受授光明 功德彰著 惟意所欲 無迹可尋 嗚呼其至矣
유아정고 칙수수광명 공덕창저 유의소욕 무적가심 오호기지의
삼가 살피건대 태조(太祖)께서 국가를 개창하신 뒤에 정종(正宗)께서 맏아들로서 대통(大統)을 이으셨는데, 정종께서는 태종(太宗)의 공적을 생각하셔서 신기(神器).자의(紫衣).모궁(茅宮)186)을 주시고 천승(千乘)의 나라187)를 뜬 구름처럼 여기셨다. 옛날부터 임금의 자리를 양보한 사람을 말할 때면 항상 백이(伯夷)와 태백(泰伯)188)을 거론하는데, 이들은 모두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본국에 있지 않았다. 오직 우리 정종께서만이 임금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 명확하고 그 공덕이 드러난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것을 하셨으나 찾을 만한 흔적이 없으니, 훌륭하기 그지없도다.
煌煌開國日 황황개국일 개국(開國)하던 찬란한 날
王實是維城 왕실시유성 임금께서는 실로 계승자였네
脫屣輕天位 탈사경천위 짚신 버리듯 임금 자리 가볍게 여기시고
凝旒澹世情 응류담세정 단아한 모습 세속의 마음 없으셨지
神功眞不有 신공진불유 신령한 공덕 참으로 소유하지 않으셨으니
至德孰能名 지덕숙능명 지극한 덕 그 누가 명명할 수 있겠나
遺址隣仙寢 유지린선침 유지(遺址)가 묘소와 이웃하고 있으니
千秋仰聖明 천추앙성명 성스럽고 명철함 영원히 우러러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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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후릉(厚陵) : 조선 정종(正宗)과 정종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시 판문구)에 있다.
186) 신기(神器).자의(紫衣).모궁(茅宮) : 신기는 국가의 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옥새(玉璽)이고, 자의는 임금의 곤룡포이고, 모궁은 거처하던 궁전이다.
187) 천승(千乘)의 나라 : 유사시에 전차 1000대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로, 천자의 만승지국(萬乘之國)에 대한 제후국 조선을 말한다.
188) 백이(伯夷)와 태백(泰伯) : 백이는 상(商)나라 말기 고죽군(孤竹君)의 맏아들이다. 아버지가 동생 숙제(叔齊)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고죽군이 죽고 숙제가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자 백이가 받지 않고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전후로 망명해서 본국을 떠났다. <『사기』61「백이열전」> 태백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맏아들이다. 막내동생 계력(季歷)이 현인인데다 그 아들 창(昌, 이후 문왕)이 성덕(聖德)이 있어,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고 하는 태왕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고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 동생 중옹(仲雍)과 형만(荊蠻) 땅으로 도망갔다. <『논어』「태백(太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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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정종(定宗)의 능침(陵寢)은 현재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 백마산 기슭에 있다. 북한 보존급문화재 제55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어서 통일되어 개방되었으면 한다. 작가가 언제인가? 이곳을 찾고 글로 남겼다(정종의 능침은, 후릉 이미지를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은 어떤 분이실까? 아래로 안내합니다.
정종[定宗]
1357(공민왕 6)∼1419(세종 1). 조선의 제2대 왕. 재위 1398∼1400.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경(0xB887)이고, 초명은 방과(芳果)이다. 자는 광원(光遠)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는 판예빈시사 증문하좌시중월성부원군(判禮賓寺事贈門下左侍中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행실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해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다. 1389년(창왕 1) 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1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에 책록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그 해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 아래에서 격파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졌다.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고, 이듬 해 의흥삼군부중군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節制使)로 개수(改授)되는 등 병권에 관여하였다.
1398년 8월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면서 세자 책봉문제가 제기되었다. 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이 양보해 세자가 되었다.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종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안군의 양보로 즉위했으므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정종 1) 3월 개경으로 천도하였다.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관인(官人)이 권귀(權貴)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해 권귀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400년 2월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안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그 해 4월 정당문학 겸 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좌산기상시(門下府左散騎常侍) 김약채(金若采) 등의 소를 받아들여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내외의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 하륜(河崙)에게 명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三軍府)로 고치면서, 삼군의 직장(職掌)을 가진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정무를 담당하고, 삼군부는 군정을 담당하는 군·정 분리체제를 이뤘다. 이러한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뤄진 것이라 하겠다.
1399년 3월 집현전을 설치해 장서(藏書)와 경적(經籍)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그 해 5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다. 11월에는 조례상정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였다. 1400년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해 노비 변정을 기도하였다.
재위 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으로 삼았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하였다.
시호는 처음에는 온인공용순효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었으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묘호(廟號)는 정종(定宗)이다.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인물 > 왕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83525&v=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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