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유백교(柳伯敎)에게 주다

추읍산 2011. 3. 2. 11:18

 

贈柳伯敎 증유백교


유백교(柳伯敎)에게 주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利仁柳郵丞 이인유우승 이인역(利仁驛)204) 유 우승(郵丞)205)

奇書遠相訊 기서원상신 멀리서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네

備言別離苦 비언별이고 이별의 고통 상세히 말하고

兼致酒肴贐 겸치주효신 아울러 술과 안주 보냈네

 

郵丞官雖卑 우승관수비 우승은 낮은 관직이지만

腰間亦佩印 요간역패인 역시 허리에 관인(官印)을 차고 있지

縱無民社責 종무민사책 백성을 구제할 책임 없지만

管轄皆良駿 관할개량준 맡은 일 처리는 어떤 것이나 훌륭했지

 

廩俸誠無厚 름봉성무후 녹봉은 정말 적지만

寧至憂饑饉 령지우기근 굶주림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官舍?軒敞   관사?헌창 관청은 넓으면서 환하고

四圍山翠潤 사위산취윤 사방엔 푸른 산이 촉촉하지

 

亭亭雙碧梧 정정쌍벽오 우뚝한 벽오동 두 그루

疎影軒楹襯 소영헌영친 성긴 난간에 두리우고

娟娟細叢竹 연연세총죽 어리고 예쁜 총축(叢竹)206)

迎風如掃汛 영풍여소신 바람 맞아 빠르게 흔들렸지

 

別舘復在傍 별관복재방 곁에 있는 별관(別舘)은

危欄欲飛迅 위란욕비신 난간이 날아갈 듯 높고

欄下有淸池 난하유청지 난간 아래 맑은 연못 있어

其廣數畝僅 기광수무근 그 넓이 겨우 몇 이랑이지

 

池中有小島 지중유소도 연못 안에 작은 섬

其高不盈仞 기고불영인 그 넓이 여덟 척도 되지 않고

島上有古松 도상유고송 섬위에 오래된 소나무

其色四時振 기색사시진 그 빛깔 사시사철 푸르네

 

不意衰暮境 불의쇠모경 늘그막에 생각지도 않았는데

得此於一瞬 득차어일순 한 순간 그 좋은 곳을 얻어

薄酒聊自酌 박주료자작 부족하나마 막걸리를 자작하여

微醺復上髩 미훈복상빈 취기가 얼굴 가에 올라왔지

 

吾生寧不樂 오생령불락 내 삶이 어찌 즐겁지 않았겠는가

所遇隨處順 소우수처순 상황마다 순리대로 살았지

我今讀君書 아금독군서 지금 그대 편지 읽어 보니

君意庶可認 군의서가인 그대 마음 이해하겠네

 

君自富文詞 군자부문사 그대는 글을 잘 지어

才思同懷瑾 재사동회근 보배 같은 재주와 생각 지녔는데

落魄老無成 락백노무성 불우한 나는 늙어 이룬 것 없으니

何異爲世擯 하이위세빈 세상에서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지

 

縱然暫作宰 종연잠작재 잠시 고을 원님 되었지만

居官多悔吝 거관다회린 벼슬살이 후회와 아쉬움만 남네

一朝遽褫鞶 일조거치반 하루아침에 벼슬에서 쫒겨나니

何暇及遊刃 하가급유인 어느 겨를에 칼날을 놀릴 수 있었겟나207)

 

歸來破屋裏 귀래파옥이 무너져가는 집으로 돌아오니

有誰能賙賑 유수능주진 그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餓死亦復難 아사역복난 굶어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

天意獨可信 천의독가신 하늘의 뜻만 오로지 믿는다네

 

今之治民者 금지치민자 지금 백성 다스리는 사람들은

往往膏血浚 왕왕고혈준 종종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서

田園旣遍置 전원기편치 소유한 땅이 이미 사방에 널려 있는데

庫儲復充牣 고저복충인 창고에 또 물품 가득 채우지

 

怒馬與鮮衣 노마여선의 씩씩한 말 타고 고운 옷 입는 이들을

赫赫稱雄俊 역역칭웅준 성대하게 영웅호걸이라 떠든다네

君但視此輩 군단시차배 그대는 단지 이런 무리들만 보게 되니

詎能身以殉 거능신이순 어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겠나

 

日哦梧竹間 일아오죽간 오동나무 대나무 사이 매일 시 읊으리니

詩思更精進 시사갱정진 시상(詩想)이 더욱 치밀하고 향상되었겠지

臨池且涉園 임지차섭원 연못을 굽어보고 동산에 산보하며

携笻晩涼趁 휴공만량진 저물녘 서늘한 기운 속에 지팡이 짚고 다니겠지

 

超然無俗累 초연무속라 초연하여 세속의 속박 없을 것이고

坐處餘香燼 좌처여향신 머무는 곳엔 피우던 향불 남겠지

使人見此狀 사인견차상 사람들이 그런 모습 보면

足以躁競鎭 족이조경진 뒤질세라 시끄럽게 그대를 욕하리니

 

願君保淸福 원군보청복 그대는 맑은 복을 보전하여

勿替其終愼 물체기종신 물러서지 말고 유종의 미 거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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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이인역(利仁驛) ; 충청도 공주에 있는 역명(驛名)이다.


205) 우승(郵丞) ; 찰방(察訪)의 별칭이다.


206) 총축(叢竹) ; 키가 작고 줄기가 가는 대나무이다.


207) 칼날을...있었겟나 : 정무(政務)에 대해 자유자재로 잘 처리하는 것을 이른다.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으니 문혜군이 잘한다고 감탄하였다. 포정이, "소의 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으니 없는 것으로 있는 것에 들어가면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릴 수가 있다." 했다. <『장자(莊子)』> 「양생주(梁生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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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필자는 유백교(柳伯敎)에 대하여 문외한이다. 윗글에서 보면 두 분은 같은 취향의 문우로서 사랑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모습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추적하였는데 몰랐던 사실이 밝혀지고 아! 이런 훌륭한 문우가 한 분 더 있었구나! 공부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백교(伯敎)는 유본학의 자이고 호는 문암(問庵)이다. 문화유씨로서, 정조 시대의 저명한 문인인 유득공(柳得恭.1749-1807)의 맏아들이다. 출몰연대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황산 김유근(1785~1840)과 비슷한 연대일 것이다. 황산 김유근,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추사 김정희, 동리 김경연을 가리켜 아름다운 문우 사이로 알려졌는데 본 글에 등장하는 유본학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선 고비(古碑)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주인공이 추사에 앞서 유본학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아래 보기에서 알아보자!

 

보기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ojozzz&folder=4&list_id=8788987


아우인 유본예(柳本藝)도 문인으로, 서울의 인문지리를 다룬<한경지락(漢京識락)>의 저자로 이름이 높다.

 

유본학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백교(伯敎), 호는 문암(問菴). 유득공의 맏아들로 아우 본예(本藝)와 더불어 당시 예원(藝苑)에서 이름이 높았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정조·순조 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서로 1812(순조 12)~13년의 시작품 157편을 모아 엮은 1책의 〈문암집〉이 있고, 〈문암문고〉가 고본(藁本)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문암문고〉에는〈오원전〉·〈김풍헌전〉·〈김광택전〉·〈이정해전〉·〈김시적전〉·〈박열부전〉 등 6편의 전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오원전〉은 고양이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이다. 도적을 잘 살핀다는 것 때문에 등용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던 오원이 점차 교만·포악해지면서 급기야 버림받고 도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전(史傳)의 형식을 갖춘 논찬 부분에서 작가는 사람에게는 시종(始終)이 있기 어려운 법이라고 전제한 뒤, 하찮은 과실이 큰 공을 덮지 못한 점을 진지하게 지적했다. 나머지 전은 기인(奇人)이나 일사(逸士)의 행적을 기록한 탁전(托傳)이다. 〈김풍헌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의원 김풍헌이 불치의 병을 고치고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춘 이야기를 적고 있으며, 〈김광택전〉은 신검술을 익혀 나라에 기여하려 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지내야 했던 김체건·김광택 부자의 불우한 삶을 그리고 있다. 기이한 재주나 신통한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사회적 통념과 신분적 제약 때문에 좌절해야 했던 중인 이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1442a 

 

윗글 證柳伯敎(증유백교)를 쓸 때는 유본학이 이인역[利仁驛, 충청도 공주에 있는 역(驛)]에서 우승(郵丞)직책을 수행중 이었다고 한다. 우승의 같은 말인 찰방(訪)은 어떤 직책일까?


찰방[察訪]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 고려 때는 지방의 역(驛)을 담당한 관리는 시대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바뀌었다. 초기에는 제도관(諸道官) 또는 역순관(驛巡官)이 파견되었으나 현종 때는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로 개칭되었다. 1272년(원종 13)에는 전국에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파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역승과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함께 설치되었다. 정역찰방은 1402년(태종 2) 경기지방의 역로를 고찰하려고 파견된 것이다. 1433년(세종 15) 이전까지도 전라·경상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도에 1, 2인이 파견되었다. 정역찰방의 임무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州郡)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 엄히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정역찰방이 곧 찰방의 전신(前身)으로 추측된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전국의 역승 일체를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이 있은 뒤 1462년 1월에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으므로 찰방도(察訪道)에 역승 1인을 더 설치하자는 논의에 따라 역로를 크게 개편하였다. 이 해 8월 충청·전라도에 찰방과 역승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과 역승 각 5인씩,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만 2인씩 두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경기·충청·전라도에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 5인과 역승 6인,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 2인과 역승 1인, 영안도에 찰방 3인, 평안도에 찰방 2인으로 법제화되었다.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이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체제로 전환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이미 역승을 혁파해 찰방으로 대치했으므로 찰방 수가 크게 늘어나 경기도에 6인, 충청도에 5인, 경상도에 11인, 전라도에 6인, 황해도에 3인, 강원도에 4인, 평안도에 2인이었다. ≪대전회통≫에서는 그 수에 변함이 없다.


찰방은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책임자였다. 또한 유사시에 북방지역에서는 합배(合排 : 함경·평안도 연안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역촌)를 순행하면서 부방(赴防)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면에서는 대간(臺諫)이나 정랑직(正郎職)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을 차출해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하게 함으로써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제도 > 관직

 출처: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83547&v=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