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역사관> 소장 도록 p128
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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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前箕伯 執事 전기백 집사
離違京城 雖甚悵然 旅路無事得達 意謂到營 昨聞意外逢前古所無之變怪
이위경성 수심창연 여로무사득달 의위도영 작문의외봉전고소무지변괴
想必驚愕罔措矣 非但萬萬驚駭痛惋而己 蹉驛無名分紀綱頽弛之致 其可日卿之
상필경악망조의 비단만만경해통완이기 차역무명분기강퇴이지치 기가일경지
不幸而己乎 人心漸漸如此者 思之懍然 此事非不變怪在卿 無欠箕伯亦遞鮮 불행이기호 인심점점여차자 사지름연 차사비불변괴재경 무흠기백역체선
安心平 安上來 爲之驚駭 玆遺中官 望聞平問耳 不宣
안심평 안상래 위지경해 자유중관 망문평문이 불선
丁亥四月二十七日
정해사월이십칠일
서울을 떠나시고나니 매우 슬펐지만 무사히 여행하여 이제 평양 관찰사영(營)에 도착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어제 뜻 밖에도 일찍이 없던 변괴를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반드시 경악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계시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애통한 일일 뿐 아니라, 이는 명분과 기강이 무너진 때문입니다. 어찌 경(卿)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인심(人心)이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니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은 경에게 있어 변괴일 뿐만 아니라 흠이 없는 평안도 관찰사가 교체되는 것 또한 드문 일입니다. 마음을 평안히 가지시고 올라 오십시오.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에 중관(中官: 내시)을 보내니 잘 계시다는 소식을 듣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1827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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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저는 위 사항에 대하여 집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전연 듣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삶에 쫓겼고 한자로 된 기록, 사리의(辭吏議)는 남아 있었지만, 한문실력이 미천하여 미처 무엇을 말하는지를 몰랐습니다.
후일 인명사전을 통해 알았지만, 잘못 알려진 내용이 기사화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삶의 현실 또한, 한동안 잊게 했습니다. 조상님의 행적을 추적함은 최근의 일로 불행한 일이 있었음은 사실로 밝혀졌고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이를 가리키는 잘못된 기록을 보면서 진실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한때의 불행을 가지고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완벽하게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효명세자의 대처가 지혜롭습니다. 어떻든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김유근은 정계를 떠나려 하는데 붙잡아 두고자 하는 효명세자와의 실랑이는 순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김유근을 인명사전 등에서 소개하기를 위 변괴(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위해 행차 도중 서흥에서 있었던 일)를 가리켜 "가족 5명이 살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숫자도 맞지 않고 일행의 불행을 가족의 불행으로 오도함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옮긴이는 잘못 쓰고 있는 인터넷상 유명 인명사전에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고 여러 곳에서 바로잡았으나 아직도 방치(가족 5인의 살상을 당하여)된 곳이 있습니다. 도록 집필진마저 인명사전에서 베낀 것인지 가족이 살상당하여 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래에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래에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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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827년(순조 27) 4월 27일의 글
평안 감사 김유근(金逌根)이 하직 인사를 드리고 부임하러 가다가 서흥(瑞興)에 도착해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부임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천고(千古)에도 없던 흉악한 변고를 당하였는데, 절월(節鉞)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처음부터 논할 것이 없거니와, 원통하고 통분스러워 죽고만 싶습니다.
신이 처음에 마음먹기는 감영에 도착한 뒤에 곧바로 노모(老母)와 본생모(本生母)를 맞이하여 한때 잘 봉양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노인을 모시려면 시중들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겠기에 신의 서제부(庶弟婦)와 첩(妾)으로 하여금 먼저 신을 뒤따라 와서 정돈해 놓고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서흥에 도착하여 신은 공청에 들어가 거처하고, 서제부와 첩은 여관에서 머물게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마침 덕천군(德川郡)에서 퇴임(退任)한 아전 장가(張哥)란 놈이 여러 차례 만나기를 청하다가, 문지기가 막고 거절하자, 곧바로 여관으로 가서 옷을 벗고 칼을 들고서 안방으로 들이닥쳐 만나는 사람마다 찔렀습니다.
신의 첩은 도망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서제부와 주모(主母)는 악독한 손에 죽고, 감영 소속 사비(私婢) 가운데 죽게 된 자가 두 사람이고,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는 자는 세 사람이나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에도 없는 흉악한 변고입니다.
신이 비록 미처 부임하지는 못하였지만, 40주(州)의 백성들을 거느리는 사람인데, 부하(部下)인 한낱 퇴임한 아전이 감히 조금도 두려움 없이 고약한 행패를 부렸으니, 신이 무슨 얼굴로 관서(關西)의 이속과 백성들을 대할 수 있겠으며, 신으로 말미암아 화가 형제에게 미쳤는데, 차마 무슨 마음으로 의연히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의 노모(老母)가 이 참변의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슬픔을 안고 나올 리가 없습니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신이 부임할 수 없기에 길가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큰소리로 우러러 호소하오니, 곧바로 체차해 주소서. 그리고 흉악범은 지금 막 잡아서 부옥(府獄)에 가두었는데,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있으므로 신이 번거롭게 청할 바가 아니고, 삼가 유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하령하기를, “지금 들어온 글을 보고 너무나도 놀랍고 참혹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다. 사람의 흉측하고 악독함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세상의 변고가 거듭 생기니, 더 말하고 싶지 않다. 경의 심정은 매우 슬프겠지만, 밀부(密符)를 찬 곤외(閫外)의 중요한 지방 장관의 자리를 어찌 한낱 강도(强盜)의 변괴로 인하여 갑자기 체차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미 늙은 어버이를 모시고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결코 지극한 정리상 견딜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또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시켜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도 예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니므로, 청한 바대로 시행하라. 흉악한 놈에 있어서는 앞으로 율에 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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