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황산유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붓 가는 대로 쓰다

추읍산 2011. 3. 20. 14:52

 

閒居隨筆

한가롭게 지내면서 붓 가는 대로 쓰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歲已晏矣 田事告功 官租旣完 私蓄足以禦冬 食無兼味 而蔬糲可以充腸也 衣非狐貉 而布帛可以掩身也 于斯時也 雨雪凄然 門巷閴寂 紙窓燈火 幽懷可掬 乃命家人 釀秫燒笋 殺鷄爲黍 以供朝夕之饌 日與心遠而身閒者數子 探討經史 商畧今古 論天人之際 而究性命之原 倦則琴棋博奕 以佐其歡 時復携笻理屐 步荒徑 跨斷橋 涉小邱 臨絶磵 悠然遠覽 消搖徜徉 已而 入室 尊彛古雅 筆硯精良 擧觴相酬 醺然取醉 興酣揮毫 行草無方 疲甚思睡 便聯牀而臥 抵足而眠 村雞叫而報晨 日已高於三竿久矣 偃仰起居 心曠神怡 旣不受羈縛 復不事高尙 頹然自放 全我天趣 可謂能事畢矣 世果有斯人者歟 有必躡屩而從之矣


 한 해가 저물었다. 농사일을 모두 마쳐 세금으로 내는 곡식도 관청에 이미 바쳤고 집에 저장한 곡식도 겨울을 나기에 충분하다. 먹는 밥은 반찬이 많지 않지만 조촐한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고, 입는 옷은 여우 털이나 담비 털로 만든 가죽이 아니지만 베옷으로 몸을 가릴 수는 있다. 이런 때에 쓸쓸히 눈이 내리고 거리는 적막한데, 종이창 아래 등불을 밝히니 그윽한 회포를 펼 만 하였다.

 이에 하인에게 명하여 차조 술을 빚고 죽순을 구우며, 닭을 잡고 기장밥을 하여 아침저녁에 먹을 음식으로 준비하게 한 후에, 뜻은 원대하나 일이 없어 한가한 사람 몇몇과 매일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며 옛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하여 토론하고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논의하며 본성(本性)과 천명(天命)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그러다가 지칠 때 거문고를 타거나 바둑과 장기를 두면 그 즐거움을 배가 되고, 이따금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잡초 우거진 길을 산보하고, 끊어진 다리에 걸터앉거나 작은 언덕을 넘고 절벽 아래 계곡을 굽어보면서 물끄러미 먼 곳을 바라보고, 이리저리 한가하게 거닐곤 하였다. 잠시 뒤에 집으로 돌아오면 고풍스런 술병과 정갈한 붓과 벼루가 준비되어 있다. 술잔 들어 서로 술을 부어 얼근하게 취할 때까지 마시고, 흥이 도도해지면 일필휘지로 글을 쓰는데 행서(行書)건 초서(草書)건 문제 삼지 않았다. 피곤이 몰려와 졸리면 침상을 붙이고 발을 나란히 하여 누워 잠들고, 동네의 닭들이 울어 새벽을 알린 후 해가 중천에 뜬 지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편안하게 생활하여 마음이 트이고 기분이 맑으며, 속박을 받지도 않고 고상한 일을 하지도 않으며, 쓰러지듯 자신을 내버려 자연의 정취(情趣)를 온전하게 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만 하다. 세상에 과연 이 같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기필코 짚신을 신고 그를 따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