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운 어머니

투전국

추읍산 2011. 5. 25. 10:41

홍철주

어머니 풍산홍씨께서는 친정내력을 전하실 때는 외증조 (瀅周)의 친형님 이신 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 할아버지가 단골로 등장할 적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조선 후기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고종 때 암행어사로 맑은 행적을 남기시어 명성이 높았으며 판서급인 정이품까지 올랐던 분입니다. 1887년 조선전보총국의 초대 총판으로서 근대화의 길목에서 통신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효헌공께서 여주목사로 근무하셨던 1871년 여름[고종 8년, 봉직 기간은 5월~ 11월]의 행적을 어머님의 말씀을 통해서 되살리고자 합니다. 관아에는 육방관속(六房官屬)에 속한 관리들이 있습니다. 여주 목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여주군의 행정과 치안을 총괄하는 자리로 군수에다 경찰서장을 겸임한 자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그때는 지금의 여주군보다 행적구역이 넓었습니다)? 또한, 여주는 세종대왕의 능침이 있으신 곳이라서 그런지 규모보다 단계 높은 목(牧)으로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관리들과 새로 부임하는 사또(목사) 사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었다고 하네요.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선사회에서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요? 그러나 분명히 새로 부임하는 사또의 기를 꺾으려는 못된 전통? 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상관 길들이기라고 해야지요. 이것이 새로 부임하는 사또가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목사로 부임은 하셨으나 영(令)은 안 서고 이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조선 후기 그때는 투전놀이가 사회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고스톱에 빠진 모습에 비교할 수 있겠지요. 이 모습 또한, 여주 관아를 비켜가지 못했고 관내 상류층에게까지 유행했었다네요. 투전이 무엇이냐고요? 필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검색하니 화투가 나오기 전 조선 후기의 도박 등에 사용했던 놀이 기구라고 합니다. 이는 맨 아래 위키백과의 글을 별도로 공부하기로 해요.

 

여주를 선도해야 할 관리들과 지도층부터 이 모양이니 여주목사(홍철주)의 고민은 컸을 것입니다. 어느 날 관아의 모든 관리와 지도층은 한자리에 앉았습니다. 말하자면 투전을 좋아하는 인사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주목사가 마련한 자리로 주제는 여주목의 발전을 위한 자리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떠들썩한 자리의 강단에 서셨을 여주목사의 인사말에는 여주의 발전을 위해 모두가 나서 달라고 당부하셨을 겁니다.

 

이어 연회로 이어졌고 음식상에는 으레 따르는 막걸리도 등장했겠지요. 다시 여주목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특별음식을 마련했으니 남긴 없이 들라는 당부(令 ?)와 함께 따끈한 국 한 그릇씩이 안겨졌습니다. 건배 제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모두가 좋아하는 특별음식은 투전을 넣어 끓인 투전국이 아니겠습니까? 사또를 바라보았습니다. 범 치 못할 위엄이 좌중을 압도했습니다. 실로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비위가 틀리고 보지 않아도 비디오입니다.

 

침묵만이 흐르고 어느 순간 크게 깨달은 좌중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사또 앞에 부복했습니다. 새로운 마음가짐의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로 여주에서는 투전이 사라졌고 기강은 바로 섰다고 합니다. 오직 여주의 발전만을 위해 하나 되었을 것입니다. 홍철주 할아버지께서 여주를 떠나시는 날 늘어선 백성은 눈물로서 배웅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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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사에서 소개하는 홍철주 영정

 

여주군사 제2권 성씨와 인물 p435에서 촬영함

 

 

 

아래 사진과 글은 위 사진 좌측 글씨까지 포함한 것이다

 

사진 다음 장의 글 이어 쓰면 -판서되었으며 1885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7년 3월 전보국총판이 되어 전선(電線) 가설에 공을 세웠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일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