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양 선영인 개군면 향리와 흥천면 효지리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1950 - 60년대 그때만 해도 교통수단이 미약하여 강 건너편을 갈 때에는 주로 나루를 이용하였습니다. 때론 이포와 양촌나루를 찾기도 했지만, 주로 양화나루를 이용했습니다.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 내양리에 있는 나루로 대신면 건너멀띠와 연결되고 조선 시대에는 곡식과 산판 나무를 서울로 운송하였던 수상 교통 요충지라고 합니다.
전쟁(6, 25)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봄 개군면 향리로 복귀한 후에도 1년이면 여러 차례씩 다녔습니다. 그때는 여름에 보리쌀 한 말, 추수가 끝나고 나면 쌀 한 말씩 내고 언제든지 배편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효지리 선영은 이성관 할아버지 이영희씨께서 도맡아 관리하셨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용무가 있을 적마다 일 년이면 여러 차례씩 다녔습니다. 그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향리 집을 나선 어머니와 저는 계전리를 지나 원통이 고개를 넘어 대신면 소재지인 율촌리에 이르고 하천을 건너 떠들엉 산 옆 늪을 지나 건너멀띠 옆 남한강에 도착합니다. 강 건너 마을이 양화이고 나루터의 본거지죠.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때론 바로 대기하던 배를 탈 적도 있지만, 강을 건너올 적에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윽고 나무로 만든 유선형 배에 오르고 긴 장대를 잡은 사공의 몸짓으로 헤쳐나갑니다.
오가는 배 안에는 항상 여러분이 타고 있었습니다. 사공은 우리를 알아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면서 효지리의 근황도 들려주십니다. 긴 장대로 강바닥을 디딤 삼아 배는 힘차게 나아갑니다. 곡수장날이면 더욱 떠들썩하였다고 하는데 소를 팔은 분, 새로 입식하는 분으로 북적였답니다.
강 중간 정도 이르면 검푸른 물결이 꽤 깊어 보였습니다. 배는 목적지에 이르고 줄 서서 내립니다. 사공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양화마을 지나 개울을 건넙니다. 작은 목다리라도 있었을 터인데 기억을 더듬어도 옷을 걷어 올린 모습밖에 없네요. 굽이굽이 하천 길을 돌아 곧 효지리에 이르지요. 하루 또는 이 삼일씩 머물렀는데 용무를 마친 어머니와 저는 역순으로 되돌아옵니다.
필자는 10년 전에 능서면 내양리를 지나다가 양화나루를 찾았는데 표석이 세워져 나루터였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조선 시대 아니 1960년대에도 숱한 사연을 실어나른 곳이고 내가 수없이 건넜던 곳이구나 하면서 감회에 젖어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기도 했습니다. 산천은 그대로나 물빛이 영 아니었습니다. 나루터의 정취만 간 게 아니라 깨끗한 물도 함께 가버려 씁쓸한 마음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4대강 사업이 상당히 진척된 것 같고 양화나루 위아래에서 대역사가 진행 중입니다. 깨끗한 물로 환원되고 홍수를 예방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담
6, 25는 민족의 슬픔입니다. 먼저 피란하려는 모습은 강 나루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지 못해 어머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어느 나루터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종합하면 양화나루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은 흥천면 효지리로 피란하기 위해 나루터에 도착하였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우리 가족이 있었습니다. 배가 도착하면 먼저 건너려는 인파로 질서는 무너졌고 약한 사람들은 뒤 쳐질 밖에요. 이런 모습은 되풀이되었습니다.
질서를 잡겠다고 나선 뱃사공! 주위를 응시하는데 그 속에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발견한 사공! 오르시지요. 이리하여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데 빼놓고 싶지 않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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