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락호의 처지에 있던 흥선군이 그의 저택을 방문하자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처지가 궁한 그가 석파란으로 알려진 난초화를 가져오면 이를 받고 소정의 금액을 지불해주기도 하였다. 흥선군을 귀찮게 여긴 다른 사대부가와는 달리 흥선군에게 용돈, 노잣돈을 줘서 돌려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의 중심인물로서 헌종과 철종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폈으며 1863년 12월 철종이 아들없이 급서하여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원상 정원용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인 명복(命福)이 사왕(嗣王)으로 결정되자 봉영사(奉迎使)로 파견되어 고종으로 옹립하는 일을 주관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영의정에서 물러났으나 원임대신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여 국정을 자문하였다.
아들 김병기와 함께 몰락왕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도왔으며, 다른 안동김씨 일족이 숙청당했을 때도 몰락하지 않고 원로대우를 받았다. 1864년부터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철종실록》 편찬을 주관, 지휘하였다. 1868년 대원군에 의해 삼군부(三軍府)가 부활, 설치되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치사하였으며, 1866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69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충익(忠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출처 : 워키백과
옮긴이의 글 : 다른 안동김씨 일족이 숙청당했을 때도 몰락하지 않고 원로 대우를 받았다고 하였다. 철종 때 정이품 이상의 안동김씨 인사들은 고종 재위 때(흥선 대원군 집권 포함)는 어떠했을까? 주체(主體)만 달라졌을 뿐 중요한 면면을 살피건대 그대로이지 않는가. 역사는 연로하여 국정을 자문한 김좌근, 김흥근을 빼놓고는 정이품 이상으로 출사하고 있었는데 거짓으로 오도하는 부류들이 많아 무슨 생뚱같은 거짓인가? 이 또한, 역사의 왜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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