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명당이라는 영화

14, 김좌근 부자를 보는 눈

추읍산 2019. 3. 20. 16:00

김좌근의 졸기

고종실록 6, 고종 6425일 정묘 3번째기사 1869년 조선 개국(開國) 478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좌근(金左根)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은 바로 내가 봉영(奉迎)한 영상이다. 바른 몸가짐과 공평한 지조에 대해서는 과인이 의지하였고 조야(朝野)가 우러러 복종하였으니, 그의 처지가 특별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병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부고를 받고 놀라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하니 더욱 슬프기 그지없다. 별세한 영돈녕부사의 상례에서 예장(禮葬)을 하는 등의 절차를 규례를 살펴 거행하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를 수송하라.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녹봉은 3년에 한하여 보내 주고, 시장(諡狀)을 기다릴 필요 없이 성복 전에 시호를 의논하라."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보는 김좌근 부자(발췌하였다)


김좌근[金左根]

정의 : 1797(정조 21)1869(고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영의정 김창집(金昌集)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이중(金履仲)이고, 아버지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김조순(金祖淳)이며, 어머니는 심건지(沈健之)의 딸이다.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누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9(순조 19)에 생원이 되고 부수(副率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을 거쳐 1838(헌종 4) 판관으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副校理직각(直閣대사성·이조참의·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병조판서·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850(철종 1)에는 우참찬·제학 겸 지실록사를 거쳐 총위영(總衛營)을 총융청(總戎廳)으로 개편, 총융사(總戎使)를 맡고 이어 금위대장 등 무직(武職)의 수뇌부를 관장하여 당시 혼란한 사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훈련대장·공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세 번씩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발생한 각지의 민란을 진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總裁官)을 맡기도 하였으나,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편찬에 참여한 뒤 영돈녕부사로 1866년 기로사에 들어갔다.

인품은 정량(貞亮: 곧으면서 맑음)하고 공평하였으나, 안동 김씨 세도정치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역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좌근 [金左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병기[金炳冀

정의 : 1818(순조 18)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潁). 부사 김이중(金履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김조순(金祖淳)이고, 아버지는 판돈녕 김영근(金泳根)이며, 어머니는 윤치승(尹致升)의 딸이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 1847(헌종 1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849(철종 즉위년) 대사성이 된 뒤 1850년 이조참의·실록청수찬관(實錄廳修撰官규장각직제학·예조참판, 1851년 이조참판, 1852년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재정이 고갈 상태임을 조정에 보고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도록 청하였다. 1853년에 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공조판서·한성판윤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호조판서, 1860년 금위대장·어영대장을 지냈다.

1862년에는 삼남 지방으로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민란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설치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구관당상(句管堂上)이 되었다. 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이조판서·어영대장·판돈녕부사직을 두 차례, 호조판서직을 다섯 차례나 거치는 등 관력(官歷)이 화려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자 1864(고종 1) 판돈녕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 등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요직에 기용되어 1865년 병조판서·좌찬성, 1866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867년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김문근(金汶根)의 조카로 성격이 호방해 김문근의 사랑을 받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일 때에 초야에 있던 흥선대원군과 교유해, 뒷날 흥선대원군이 집정해 안동 김씨 일파가 대부분 제거될 때도(철종 때 안김 세도가들은 대부분 정이품 이상으로 있었지만 여기서는 지나치자-- 옮긴이 씀) 여전히 관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저서로 사영집(思潁集)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병기[金炳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