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문곡과 영안위

같은 외가 김수항과 정명공주

추읍산 2020. 3. 23. 08:04

혈통으로 보는 정명공주(부군 영안위)와 김수항(어머니 연안김씨) 가문

김제남(연안김씨 연흥부원군)

1562년(명종 17) - 1613(광해군 5)

인목대비(1584 - 1632 宣祖의 繼妃)

김래(1576 -1613 配 초계정씨

정명공주(1603 - 1685 夫君 영안위 홍주원)

연안김씨(1596 - 1633 김광찬의 配, 청음 김상헌의 子婦)로 필자의 12대조 할머니로 혈통을 이었다.

홍태망, 홍만용, 홍만형, 홍만희, 홍태량, 홍태육, 홍만회.  풍산홍씨 추만공(홍영)파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1629 - 1689)

안동김씨 문정공(김상헌)파

후손은 홍국영, 홍봉한, 홍인한, 혜경궁 등

후손은 김창집, 김창협, 김원행, 김조순 등

 

 

○ 안동 김씨 을미보(2015년) 7권 첫 장 광찬(光燦)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 요약한다.

-- 配 증정경부인 연안 김씨(1596 - 1633)께서는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손녀로 부친은 목사 래(琜)다.

 

○ 인목 대비는 연흥부원군의 따님으로(仁穆王后 金氏, 1584년 12월 15일/음력 11월 14일 - 1632년 8월 13일/음력 6월 28)으로 선조의 계비인데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따라서 김광찬의 배위 연안김씨와 정명공주는 내외종(內外從)임을 알 수 있다. 정명공주는 김수항의 5촌(외종이모)으로 같은 外家를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곡은 1633년부터 1640년까지 원주 외가(김제남家)에서 사셨다.

2019년 예문춘추관에서 발행한 김위현 편역 一廟四忠遺敎 기사유교 편 p 44 - 45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고 이는 문곡 김수항의 후명(後命 귀양 보낸 사람에게 사약(死藥)을 내림)을 앞둔 5일간의 흔적으로 셋 째 아들 삼연 김창흡이 기록하였다.

 

창흡(문곡의 아들 6창중 셋째)이 묻기를

“어릴 때 집에 계실 적에 어르신들이 칭찬하고 기대하는  말씀들을 하셨다면 자세히 듣고자 합니다. ” 라고 하니 대답하시기를 “내 어렸을 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실력이 없었으니 어찌 칭찬하고 장래를 기약하는 말씀이 있었으리, 내 다섯 살(1633)에 어머니(연안 김씨)를 여의고 외조모(초계 정씨로 김제남의 자부)를 따라 원주(안창리 의민공 사우)에 가서 살았는데 외조모마저 돌아가시자 의탁할 곳이 없어서 아버지(同知公 光燦)를 따라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청음 상헌)를 안동(安東)에서 만나 뵈었다. 이때 내 나이 열두  살(1640년 봄)이었다.”  청음은 1640년 12월 청의 심양으로 압송되셨다.

 

계축옥사로 인한 수난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로 김제남은 죽음을 당했고 세 아들도 같은 화를 입었다.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이듬해 강화 부사 정항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대북파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618년에는 인목 대비를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청음 김상헌 아들인 김광찬은 배위가 연안김씨로 연흥 부원군(김제남)의 손녀이다. 연안 김씨는 강제로 쫓겨남을 당해 실권했고(인조반정으로 다시 복권했다) 김상헌은 1613년(광해군 5)에 연안 도호부사에서 파직을 당하였다

 

김상헌은 1617년(광해군 9, 선생 48세) 모후(母后),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위(廢位)를 반대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대의(大義)를 진달(陳達) 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었는데, 글을 보내어서 천리(天理)의 정당함을 서술하였고 이후 안동으로 내려가 1621년까지 우거(寓居)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와 연안 김씨(김상헌의 子婦)는 복권되었는데 계축옥사에 얽힌 얼룩진 수난은 시대가 낳은 아픔이다. 청음 김상헌은 청백리로 병자호란 때는 척화파로 절의를 지켜 이후 조선왕조를 받쳐주는 밑바탕이 되었고 정명공주(부군은 永安尉 洪柱元) 후손과 연안김씨(김광찬의 配)의 후손(안동김씨 문정공파)이 쌓아놓은 행적은 기리 후세에 빛으로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