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文谷 金壽恒

《문곡집》 발문

추읍산 2020. 3. 28. 15:37
한국고전종합DB

文谷集跋 [김창협(金昌協)]      

             
이상은 선부군(先府君)의 문집이다. 불초(不肖) 형제들이 함께 산정(删定)했는데, 시(詩)가 모두 1천 3십 수(首), 문(文)이 모두 4백 7십 7수이며, 전체 28권이다. 부군의 휘(諱)는 수항(壽恒)이고 자는 구지(久之)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문곡(文谷)은 선부군의 호이다.
숭정(崇禎) 2년 기사년(1629, 인조7)에 태어나,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으로 입격했고 23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마침 효묘(孝廟)를 만나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거쳤다. 28세에 중시(重試) 2등으로 붙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31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34세에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마침내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총재(冢宰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뒤에 또다시 문형을 맡았으며, 44세에 정승이 되었다. 현묘(顯廟)가 승하할 적에 고명(顧命 다음 임금을 부탁하는 명)을 받았다.
금상(今上) 을묘년(1675, 숙종1)에, 군소배(群小輩)들이 동조(東朝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를 도리에 어긋나게 무함할 때 상소를 올려 극론하다가 영암(靈巖)으로 귀양을 갔다. 무오년(1678)에 철원(鐵原)으로 옮겼다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귀양지에서 발탁되어 영의정에 제배되었으며, 정묘년(1687, 숙종13)에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은거했다. 기사년(1689)에 사화(士禍)가 일어나 후명(後命)을 받고 진도(珍島) 귀양지에서 졸하였다. 6년 뒤인 갑술년(1694) 관직을 복구시키고 사제(賜祭)하였으니, 이것이 부군의 평생 행적이다.
부군은 어려서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선생에게서 배웠는데, 문정공은 매번 부군의 글을 칭찬하면서 주제를 잘 표현했다고 말씀하였다. 15세 때에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이 배를 타고 미호(渼湖)에 놀러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근체시(近體詩)를 지어 바치자, 현주는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필묵을 주어 권장하였다.
또 〈오호도시(嗚呼島詩)〉를 지어 대제학 택당(澤堂) 이공(李公 이식(李植))에게 질정하자, 택당은 더욱 칭찬하면서 곁에 있는 손님을 돌아보고 “이는 근래의 과체(科體)를 익힌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성균관 시험에서 선발하여 1등을 주고는 앞으로 불러 이르기를 “그대가 지은 시를 보니 시속(時俗)의 투식을 크게 벗어났으니, 칭찬할 만하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 고가(古歌)와 고시(古詩)를 지어라.” 하였다. 그리고 훗날 또 사람들에게 극찬하기를 “내년 사마시에서 분명히 이 사람이 장원으로 뽑힐 텐데, 그렇게 되면 과거장의 비루함을 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뒤에 독서당(讀書堂)의 학사에 뽑혔는데, 호주(湖洲) 채유후(蔡裕後)가 실제 대제학으로서 선발을 담당하면서 각별히 부군을 으뜸으로 밀었다. 학사들의 시를 과시(課試)할 때면 늘 유독 부군의 작품을 칭찬하여 ‘문장을 주관할 솜씨’라고 하였다. 시남(市南) 유계(兪棨)도 부군의 시를 칭찬하여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품격을 지녔으니 자연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또 부군의 문장이 집안과 문단의 명공(名公)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그렇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부군은 평소에 자신을 부족하게 여겼다. 사화가 일어나 변고를 당했을 때 불초 우리가 문집을 엮는 일에 대해 한번 말해 보았더니 부군은 “나는 재주가 본디 범상하고 부족한 데다 독서량도 매우 적어 지금껏 써 온 작품들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기록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이 차마 그냥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정한 뒤에 집에만 보관해 두어야 하니, 굳이 남에게 빌려 줄 것은 없다.”라고 하고, 또 “문집은 분량이 적어야지 많아서는 안 된다. 우리 동방의 문인들의 문집 중에는 오직 《석주집(石洲集)》만이 정밀한데, 이는 택당이 산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초 우리는 그 말씀을 삼가 받아들여 기억하였다가 감히 잊지 않고 지금 유집(遺集)을 편집하면서 시는 열에 여섯을 버리고 문은 그의 절반을 버렸으니 되도록 간략하게 함으로써 유지(遺旨)를 따랐다. 그러나 감식력이 밝지 못해 취사선택을 그르쳐 불효한 죄를 더하지나 않았을까 여전히 두렵기에 오직 이를 전전긍긍할 뿐이다. 편차가 정해진 뒤에 판각할 여력이 없어 근심했는데, 마침 불초(不肖) 창집(昌集)이 명을 받고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부임한 뒤 가까스로 교서관(校書館)의 활자를 구해다가 약간 본을 인출하였다. 불초 창협은 삼가 부군이 걸어온 평생의 대체적인 사실과 평소 선배들에게서 들은 논평 한두 가지를 약술하고 책 끝에 적어 후세의 군자가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숭정 기원후 72년 기묘년(1699, 숙종25) 12월 갑오일에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주-D001] 군소배(群小輩)들이 …… 갔다 : 
궁녀와 통한 이정(李楨) 등을 처벌하려고 할 때 허목과 윤휴가 이정을 구원하려고 했다. 윤휴가 상소를 올려 대비(大妃)를 ‘관속(管束)’하라고 했다. 《국역 숙종실록 1년 4월 25일》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윤휴 등의 횡포를 비판했고, 이어 귀양을 갔다. 《국역 숙종실록 1년 7월 12일, 18일》

출처 :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397A_0290_00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