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운 어머니 25

옛 시골 우리 집 부엌

동지가 가까워서 그런가 하루 해 짧기만 하네 세밑이 코 앞인데 어린 시절 그리움은 왜일까? 아침 일찍 일어났지 가마솥에 물 길어 붓고 군불부터 지펴야지 따듯한 방 만들기 위해 얼기설기 놓은 장작 불쏘시개 불 집혔지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산골 마을 풍경이었다네 저수지 만든다고 뜯겨 옮겨온 집 허술하기 짝이 없고 한겨울엔 더욱 추웠어요 부엌은 움푹하고 문이 두 개지 삐거덕 열고 들어가야 했는데 문고리에 손은 쩍 달라붙고 그을린 사방은 더욱 어둡게 하네 솥은 네 개 걸렸지 오른쪽엔 가마솥 물 데웠고 가운데는 밥 짓는 솥 왼쪽에는 작은 솥과 물두덩 가운데 솥은 두껍고 견고했지 밥 짓는 솥으로 쓰였고 고조할아버지 평안감사 때 가져오신 솥이라고 들었네 작은 쪽마루엔 찬장 하나 있었고 아래 공간에는 장작을 쌓았어..

포천 외가댁 풍산홍씨 선영

양주 청헌공 가문의 묘역을 나오면서 외사촌 형님(홍대식)에게 전화를 드렸다. 전날 연락하였고 오후 2시경이라고 하였는데 생각 밖으로 일찍 찾아가게 되어 점심시간과 맞아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원 벤치에 앉아 형수님의 극진한 대접과 이야기꽃을 피웠고 형님과 함께 근처 내촌면 소재지인 큰 외가댁을 찾았다. 어머님 생존 시에는 자주 들렸던 큰 외가댁인데 그곳 형수님을 인제야 뵙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조선기와 집으로 새로 단장한 널찍한 집에는 큰 형님 내외분이 살고 계셨고 형제들은 모두 미국에 나가 계신단다. 종손 홍병흠 형님의 안내를 받았다. 여러 곳의 모신 조상님을 이곳 내촌면으로 모셔와 가문 납골 묘역을 조성하였다. 깨끗하게 잘 관리하고 있어 교훈으로 다가왔고 숙연하였다. 어머님께서 늘 말씀하셨던 외..

가시밭길 헤쳐오신 어머님

어머니 풍산홍씨 께서는 1911년 참위(參尉) 홍우경(洪祐景)과 광산김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따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위로 오빠 한 분 계셨습니다. 대전 부근 송촌이라는 곳에서 성장하셨다고 해요. 그곳에서 사시다가 1930년경 저희 부친 하고 결혼하셨습니다. 여주군(지금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 160번지(현 향리 저수지 안)에는 저희 집인 조선 기와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40칸? 정도였을 겁니다.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하셨는데 일본 강점기 때죠. 층층시하로 고생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더구나 부군인 저희 아버지는 심신이 허약하셔서 항상 피동적 모습이셨답니다. 말이 ◯◯이고 ◯◯◯이지 왜들 그렇잖아요. 일제강점기에는 유명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으로 그때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았습니다. 가세는 수그..

외사촌 형님과 어울렸던 어린 시절

6.25 때 잠시 시골 우리 집으로 피난 오신 외가 식솔들은 얼마 안 되어 그해(1950년) 가을경인가? 되돌아갔습니다. 외사촌 형제들과 집 옆, 뭍 밭 8대조(諱 達行) 묘역에서 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후 1.4 후퇴 때 저희는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고 외가는 군포로 피난하였다가 그만 미군 전폭기의 공습으로 외할머니와 외숙모, 외사촌 형제들, 향리에서 대동한 이승재? 누님이 방공호로 피신하였다가 모두 부둥켜안고 운명하였음은 이미 쓴 글( 6, 25전쟁 속의 어린 시절 )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때 논두렁으로 피한 외삼촌과 큰형만 살아남았는데 그때 상황이야 오죽했겠습니까?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총성은 멈췄고 외삼촌과 홍대식(1938년생으로 필자보다 6년 연상) 형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남대문 하늘에 메아리친 암행어사 출두야 ~

어머니 풍산홍씨께서는 필자의 외증조(瀅周)의 친형님 이신 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여주 목사 때의 투전국 이야기는 전장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이번에는 암행어사로서의 홍철주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어머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고종 때 주로 출사하신 할아버지는 암행어사로도 명성을 날리신 분입니다. 고종 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흥선 대원군이 실질적인 집권자일 때입니다. 암행어사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어명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 구석구석을 암행하면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미약했던 옛날에는 그 역할이 지대하였음은 여러 이야기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