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움은 강물처럼

흥천초등학교 다닐 때

추읍산 2011. 5. 28. 09:38

효지리에 머무를 때

-------------

 

6, 25전쟁이 한창이던 1, 4 후퇴 때 우리 가족은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 갔음은 여러 곳에서 적은 바 있습니다. 그때 개군면 향리(아랫상골) 많은 분과 함께했는데 기거할 곳이라야 우리 묘막이었던 집이 전부였죠. 그곳은 용인이씨 할머님이 기거하고 계셨고 숙부님과 고모님의 생활하셨던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가족 자리 잡기도 좁은 곳이었습니다. 마을 분들 임시로 헛간 등에 자리 잡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말 아니었습니다. 곧 근처 귀백리의 뱅골 등으로 옮겼고 함께 남은 분은 김홍국씨댁 뿐이었습니다.

 

 제2의 선영인 그곳에서도 어려움은 말 아니었죠.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가족을 책임지신 어머님의 고생은 오죽했겠습니까?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그때를 되살리셨던 어머님의 말씀에

숨죽였고 저야 그저 그런 와중에서도 뛰어놀았던 기억밖에 없으니

어머님의 방패막이 덕분입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애환을 함께

하신 이성관 할아버지의 모습이 저희에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내 고모랑 면 소재지(효지리의 한 곳인 읅뜨리)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1951년 2월경이었을 겁니다. 여기저기 전흔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초등학교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텅 빈 교실 안에는 의료 기구와 약품인듯한 잔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무엇일까? 신기하게 바라보았죠. 아마도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던 것 같았습니다. 언제인가 급히 철수하면서 잔해들이 널브러진 것이겠지요.

 

필자는 곧 흥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51년 3월경이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 학창시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문에서 기다리신다.

            참새들이 전깃줄에 앉아서 짹짹 ~

 

저수지를 끼고 걸어서 2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또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우리 꼬맹이들은 신 나게 뛰어놀았습니다. 어울려 산속을 헤매기도 했고 잠자리와 매미 잡는다고 거미줄 끈끈이를 막대기에 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벗들과 산속을 돌아다녔는데 그만 해골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전쟁에 와중에서 죽어간 어느 병사의 모습은 아닐까요?

 

소풍 간 추억

그곳에서 소풍 간 기억은 두 곳만 떠오릅니다. 오래되어서 가물가물 하기 때문입니다. 봄 가을에 가는 소풍은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한 번은 세종대왕 능으로 갔습니다. 이웃인 능서면에 있고 한 시간 조금 더 걸었을 겁니다. 엄청나게 큰 능을 바라보면서 신기해했고 넓은 제절 앞에서 뛰어놀았습니다. 그때는 한글을 창제하신 임금님! 그 정도의 지식이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 번은 남한강 변으로 갔는데 어느 곳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도 양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흐르는 물에 동심을 띄었습니다. 강 건너에는 여주 땅콩(지금은 고구마 산지)으로 유명했던 대신면의 벌판(일명 여주뻘)이 보이는 곳이죠

 

전쟁의 와중에서 용인이씨 할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직 증조할머니 청해이씨께서 생존하셨는데 먼저 세상을 뜬 것입니다. 슬픔을 안고 마을 앞산에 모셨는데 저희를 사랑으로 다독거리셨죠. 함께 한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기도하시는 모습 외에는 달리 남는 추억이 없습니다.

 

물결에 휩쓸리고

언제인가? 개군면 향리를 다녀오기로 하여 오동, 계옥 누님(6, 25 때 가족을 잃어 우리 집에 합류한 분)과 나섰습니다. 아직 휴전 전으로 흥천면과 개군면을 오갈 수 있었을 때입니다. 왜 나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개군면에 가 계셨던 같았고 하여튼 무슨 용무가 있었겠지요. 서낭당 앞을 지나 양화나루(능서면 내양리에 있습니다.) 쪽으로 향했습니다. 양화나루를 낀 마을 전에는 큰 개울이 흘렀는데 평상시는 문제없이 건넜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난밤에 비가 많이 왔었는지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생각도 짧지 왜 그곳을 건너려고 들어섰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 정도이고 셋이서 손을 꼭 잡았는데 아뿔싸 그만 물에 둥둥 떠내려갔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인가 떠 갔고 다행히도 가 쪽에 다다랐습니다. 개울을 건넌 우리는 한동안 멍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죠. 양화나루에서 도강하여 대신면을 거쳐 개군면 향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인가? 다시 효지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아직 향리로 복귀 전이니까요.

'남기고 싶은 글 > 그리움은 강물처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슬 한 봉지  (0) 2011.05.29
양화나루 바라보며  (0) 2011.05.29
국군 유해를 송별하다.  (0) 2011.05.27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0) 2011.05.27
산소 터  (0) 2011.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