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 294

풍고 김조순의 서화론(書畫論)

30.9×137.1 나僕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 그러나 다만 농묵(弄墨 필묵 장난) 하기를 즐겼고 또 몽당으로 말없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명주에 그려져 과투(科套 과거시험의 투식) 중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그림이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남들로부터 꾸지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인古人들께 이러한 진취(眞翠 천진한 작품)의 작품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말미에는‘풍옹지楓翁識’라고 썼다. 발췌한 곳 : http://www.myartauction.co.kr/auction/art_detail.php?offset=50&r_no=4980&search_m_no=66

안동 김씨를 말하다

아랫글 출처 : http://www.joongboo.com/?act=articleView&idxno=918498&mod=news 정조도 인정한 '명가' 안동 김씨…조선 망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경화사족의 삶과 문화] ⑤절개·학문·문예 겸비 조선후기 최대 명문가 안동 김씨 ▲ 겸재의 ‘석실서원도’와 현재의 석실서원 터. 한강변(현 남양주 미사리)에 자리잡은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학문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지고 지금은 서원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⑤절개·학문·문예 겸비 조선후기 최대 명문가 안동 김씨 이경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19세기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는 정확히 말해 신(新) 안동김씨 ‘선원파’와 ‘청음파’를 말한다. 선원파는 선원 김상용의 ..

김계행의 묘갈명(墓碣銘)

국역 국조인물고 김계행 [金係行] 원본글 출처 김계행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이광정(李光庭) 대표관직 대사간(大司諫) 이명 자 : 취사(取斯) 호 : 보백당(寶白堂)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3 경재(卿宰) 명(明)나라 정덕(正德, 무종(武宗)의 연호) 12년(1517년 중종 12년) 12월 신해일(辛亥日)에 대사간(大司諫) 보백당(寶白堂) 김 선생(金先生)이 대질(大耋, 고령(高齡))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 이듬해인 무인년(戊寅年) 3월 임오일(壬午日)에 학가산(鶴駕山) 아래 직곡(稷谷)의 을좌(乙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비석(碑石)은 있지만 비문(碑文)이 없는 지가 대체로 2백 15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공의 8세손(世孫) 지항(至恒)과 9세손 이호(爾鎬)와 영(泳)이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