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金朝漢)는 일본 강점기에 서울 중동중학교(지금의 중고등학교 과정을 중학교라고 불렀습니다.)를 나오시고 선영인 개군면 향리에서 일생을 교육으로 헌신하신 분입니다. 일본 강점기에는 양평 원덕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해방 전후에는 개군면 자연리에 있었던 강습소(개군초등학교 분교?)에서 교단에 서신 바 있습니다. 6.25 때에는 한때 국군 보급단에 나가셨고 전쟁은 끝나 다시 교단에 서셨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6.25 후 교단에 서시고 문맹 퇴치에 나서신 모습을 더듬어 쓰고자 합니다.
공민반
저의 초등학교 동창을 보면 나이 차이가 큽니다. 많게는 5세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8세에 정상적으로 입학한 또래가 다수이지만 일부는 그렇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왔을까? 저는 연고지(여주군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 가고 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제 나이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개군초등학교로 옴은 1953년 3학년 때입니다. 그러나 많은 피난민 중 일부는 입학도 못하였는가 하면, 중단된 교육을 잇지 못한 학생들이 꽤 있었습니다.
전쟁은 끝나고 귀향하였습니다.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같은 또래 학년으로 들어갈 수는 없고 뒤 쳐질 수밖에요. 그때 이런 어린이들을 별도로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육과정이 있었습니다. 이를 저의 부친께서 도맡으신 거여요. 일정 기간의 교육이 끝나면 학교로 편입하게 하는데 같은 또래 학년은 아니었어요, 말하자면, 교육의 수준을 맞춘 것이죠. 이 과정을 공민반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창 중 나이 차이가 남은 이런 현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군초등학교 옆, 교회는 공민반 교실로 사용되었습니다. 학교에 편입하기 위해 뒤처진 어린이는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아버지 한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들여다보니 배우려는 열의가 가득하였습니다. 저는 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지참했는데 일제의 잔재가 남았을 때라 그런지 벤또라고 불렀습니다. 점심시간에 교회(공민반)로 달려갑니다. 아버지와 함께 도시락을 들기 위해서지요.
교회 옆에는 ○○씨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데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밥상을 대할 때가 잦았습니다. 왜 그렇도록 친절할까? 6.25 전쟁은 이성을 잃게 했습니다. 법은 없고 질서는 무너질 때라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여장부로 대담하셔서 항상 그러셨지만, 국군 입성 후에도 면내에서 부동의 위치였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온 힘을 다하셨다고 해요. 교회 옆 ○○씨 집도 어머님의 대담한 기지로 위기를 넘겨 항상 저희를 보면 가족같이 따듯함으로 대해 주셨음은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문맹 퇴치
아버지의 제자는 곳곳에 널려 있었어요. 그래서 김 선생님 댁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6, 25로 공부할 기회를 잃어버린 어린이를 위해 공민반 교육에 서신 아버지는 문맹 퇴치에도 온 힘을 다하셨습니다. 정부방침에 의해 전개된 이 운동은 1954~1958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네요.
다시 교육 현장에 서신 것입니다. 작은 한글교본을 들고 교단(방 또는 마루)에 서신 아버지! 방안에는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로 가득했어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던 분들이 많았을 때입니다. 가갸거겨~ 나냐너녀~ 열의로 가득했고 깨우칠 적마다 그 보람은 배가되었습니다. 그 모습 아른거리네요.
붓글씨와 부모님 그리고 작은 아버지
아버지는 글씨가 명필이어서 주위에서 따라올 분 없었습니다. 또한, 서당을 열어 한학을 가르치기도 하셨는데 그 교재인 동문선습이 양평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보기: 동몽선습(童蒙先習)
어머니(풍산 홍씨) 또한, 한글 붓글씨를 잘 쓰셔서 몇 년 전 KBS 느티나무 방영시간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어머님의 글씨 보기: 선세유교
아버지께서 교육 현장에 서신 것은 할아버지(金翼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망국의 설움을 민족교육으로 매진하신 할아버지는 여주군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또한 야학회는 아니지만, 김익진(金翼鎭) 등은 1922년 7월에 교원 2명과 학생 35명으로 하자포학술강습회(河紫浦學術講習會)를 설립하였다. 11) 출처: 아래
http://history.yj21.net/Theme/Theme.asp?BC_ID=a0279&SearchWord=%EA%B9%80%EC%9D%B5%EC%A7%84
위는 어머님의 이야기와 일치하며 하자포는 지금의 개군면 소재지인 하자포리를 가리킨다. 개군면은 1963년 여주군에서 양평군으로 편입되었다.
작은아버지(金星漢)도 교단에서 일생을 보내셨는데 이 또한, 가풍을 이어받은 것이겠지요. 서울의 선린상고, 창덕여고, 경기여고를 거쳐 홍익여자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하셨고 생존해 계십니다.
이제 한글 모르는 분은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만큼 과학적인 한글은 깨우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운명(1967년)하신지도 44년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약하셔서 어머님의 대담한 성격과 대비되는데 이는 내력인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어머님과 함께 평안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