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 948

가시밭길 헤쳐오신 어머님

어머니 풍산홍씨 께서는 1911년 참위(參尉) 홍우경(洪祐景)과 광산김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따님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위로 오빠 한 분 계셨습니다. 대전 부근 송촌이라는 곳에서 성장하셨다고 해요. 그곳에서 사시다가 1930년경 저희 부친 하고 결혼하셨습니다. 여주군(지금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 160번지(현 향리 저수지 안)에는 저희 집인 조선 기와집이 있었다고 합니다. 40칸? 정도였을 겁니다. 그곳에서 신혼생활을 하셨는데 일본 강점기 때죠. 층층시하로 고생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더구나 부군인 저희 아버지는 심신이 허약하셔서 항상 피동적 모습이셨답니다. 말이 ◯◯이고 ◯◯◯이지 왜들 그렇잖아요. 일제강점기에는 유명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으로 그때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았습니다. 가세는 수그..

외사촌 형님과 어울렸던 어린 시절

6.25 때 잠시 시골 우리 집으로 피난 오신 외가 식솔들은 얼마 안 되어 그해(1950년) 가을경인가? 되돌아갔습니다. 외사촌 형제들과 집 옆, 뭍 밭 8대조(諱 達行) 묘역에서 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후 1.4 후퇴 때 저희는 흥천면 효지리로 피난하였고 외가는 군포로 피난하였다가 그만 미군 전폭기의 공습으로 외할머니와 외숙모, 외사촌 형제들, 향리에서 대동한 이승재? 누님이 방공호로 피신하였다가 모두 부둥켜안고 운명하였음은 이미 쓴 글( 6, 25전쟁 속의 어린 시절 )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때 논두렁으로 피한 외삼촌과 큰형만 살아남았는데 그때 상황이야 오죽했겠습니까?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총성은 멈췄고 외삼촌과 홍대식(1938년생으로 필자보다 6년 연상) 형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