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 948

산소 터

효지리에 머무를 때 ---------- 마을 앞산 넓은 공터 있었어요 그곳은 조상님 묘역 잔디밭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꼬맹이들 놀이터가 되었고 함께 뛰어놀았어요 놀이기구는 새끼 감아 만든 공이었고 편 갈라 축구가 시작되었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은 그 모습 볼 수 없고 그때 뛰어놀던 벗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둘만이 남았네 애들아, 놀자 귓가에 들려오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 그리움 되어 밟핍니다

남대문 하늘에 메아리친 암행어사 출두야 ~

어머니 풍산홍씨께서는 필자의 외증조(瀅周)의 친형님 이신 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여주 목사 때의 투전국 이야기는 전장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이번에는 암행어사로서의 홍철주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어머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고종 때 주로 출사하신 할아버지는 암행어사로도 명성을 날리신 분입니다. 고종 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흥선 대원군이 실질적인 집권자일 때입니다. 암행어사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어명이 잘 미치지 못하는 곳 구석구석을 암행하면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미약했던 옛날에는 그 역할이 지대하였음은 여러 이야기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투전국

어머니 풍산홍씨께서는 친정내력을 전하실 때는 외증조 (瀅周)의 친형님 이신 홍철주(洪澈周 1834~1891 자: 伯泳 | 시호: 孝獻) 할아버지가 단골로 등장할 적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조선 후기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고종 때 암행어사로 맑은 행적을 남기시어 명성이 높았으며 판서급인 정이품까지 올랐던 분입니다. 1887년 조선전보총국의 초대 총판으로서 근대화의 길목에서 통신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효헌공께서 여주목사로 근무하셨던 1871년 여름[고종 8년, 봉직 기간은 5월~ 11월]의 행적을 어머님의 말씀을 통해서 되살리고자 합니다. 관아에는 육방관속(六房官屬)에 속..